1990년대 초 냉전 해소에 따른 한반도의 상황 변화를 주체적으로 모색하는 노력이 가장 지속적으로 나타난 것이 남북고위급회담이었다. 그 전의 남북 정부 간 지속적 대화로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만들어진 남북조절위원회가 있었다. 조절위원회는 1972년 10월부터 1973년 6월까지 공동위원장회의 3회와 본회의 3회를 열었다.
조절위원회의 남측 공동위원장이 중앙정보부장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회담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8차에 걸친 고위급회담은 양측 총리를 수석대표로 여러 분야의 대표가 참석하는 전면적 정부 간 회담이었다. 이 회담을 통해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고, 그 직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도 이 회담을 배경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고위급회담의 진행 상황은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회담 진행 중 통일원 차관으로 옮김) 회담에 참여했던 임동원의 <피스메이커>(중앙북스 펴냄) 제2장 “탈냉전의 새로운 남북관계 모색”(140-303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의 기록은 첫 회담을 보름 앞둔 1990년 8월 20일 대표단 구성의 공식 발표로 시작된다. 남측 대표단은 강영훈 총리와 홍성철 통일원장관, 정호근 함참의장,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이진설 경제기획원차관, 이병용 안기부장 특보, 그리고 임동원이었다.
1988년 여름 서울올림픽으로 고조됐던 긴장과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고위급회담 추진이 시작되었었다. 1988년 11월 16일 북한 총리 연형묵이 부총리급을 단장으로 하는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한 데 대해 남한 총리 강영훈이 12월 28일 남북관계 개선에 관한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제의한 데 따라 1989년 2월 8일 예비회담이 시작된 것이다.
19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열리는 회담인데도 회담의 실현 자체에 당사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의혹을 품고 있었던 것은 회담의 위상과 규모가 워낙 큰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담을 일주일가량 앞두고 대표단과 전략요원들이 한 식당에 모여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아직도 북측이 대표단 명단을 통보해 오지 않아 모두들 초조한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 홍성철 장관이 좌중의 의견을 물었다. “과연 북측 대표단이 서울에 올 것인가?” 하는 물음에 “온다” 또는 “안 온다”로 택일하여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20여 명의 회담 핵심요원 중 80% 이상은 “북측대표단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8-15를 전후하여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북측 정무원 총리가 서울에 나타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합의한 대로 서울에 올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나와 김종휘 수석을 포함하여 4명에 불과했다. (<피스메이커> 174-175쪽)
회담 나흘 전에 명단을 보낸 북측 대표단은 연형묵 총리와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대장), 안병수 조평통 서기국장, 백남준 정무원 참사실장, 김정우 대외경제사업부 부부장, 최우진 외교부 순회대사, 김영철 인민군 소장으로 구성되었다. 남측 대표단의 명단을 연구하고 그에 맞춰 대표단을 구성하느라고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임동원은 남측 대표단 중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직책에 따르는 당연직 대표”들이었다고 했는데(위 책 169쪽), 법령에 따른 당연직은 물론 아닐 테고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책임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임동원 자신은 회담 실무를 총괄하는 간사 역할이었을 것이다. 임동원의 북측 상대역은 최우진 순회대사였다.
고위급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19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 채택한 남북기본합의서였다. 이 합의서의 의미는 나중에 세밀히 들여다볼 것인데, 오늘은 그 직전에 이뤄진 유엔 동시가입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겠다.
1990년 9월 초순의 제1차 고위급회담에서 유엔가입 문제를 협의할 남북대표접촉을 갖기로 결정한 데 따라 임동원과 최우진이 두 달 동안 세 차례 회담을 가졌다. 북측은 ‘하나의 한국’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고, 남북의 별도 가입은 “분열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는 ‘분단 고착’의 길이라고 계속해서 반대했다.(위 책 185-188쪽) 그러나 결국 동시가입에 동의하게 된 경위를 임동원은 이렇게 설명했다.(위 책 188-189쪽)
문제해결의 물꼬를 튼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정세의 변화였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하게 되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고,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이 가속화되는 등 국제정세의 지각변동에 따라 북한은 정치-사회-심리적으로 감내하기 버거운 체제위기와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태도도 돌변했다. 세바르드나제 소련외상이 평양을 방문(90.9)하여 한국과의 수교방침을 통보하자 북한 지도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
경제위기가 다가오는 상황과 때를 같이하여 중국이 1991년 5월에 유엔가입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로 확정하자 마침내 북한의 고집이 꺾이게 된다. 평양을 방문한 중국의 리펑 부총리가 한국의 유엔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한 중국 공산당 정치국의 결정을 김일성 주석에게 통보하며 북한도 남한과 함께 가입할 것을 권고하자, 결국 북한도 중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종전의 입장을 180도 전환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의 국가정통성을 유엔에 의지하려 했다. 냉전을 시작하면서 미국이 유엔을 소련 봉쇄정책에 이용할 때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소련과의 협의를 회피하고 유엔에 상정했기 때문에 1948년 남한의 5-10선거는 명목상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유엔은 그것을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로 인정했다. 이승만은 이것을 마치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받은 것처럼 왜곡해 선전하며 ‘북진통일’ 정책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유엔데이’(10월 24일)을 국정공휴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유엔의 인정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유엔가입을 열심히 추진했다. 그러나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권을 피해 갈 길이 없었다. 국제여론도 분단 상태의 한국 단독가입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1958년 이후로는 한국 가입안 상정이 중단되었다.
북한은 초기에 유엔을 적대시했다. 남한의 단독건국이 유엔에 의지해서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 한국전쟁 참전을 ‘유엔군’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이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 몇 차례 유엔가입을 신청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1960년대 들어 ‘자주외교’를 내세우면서 유엔을 더욱더 무시하는 태도로 나갔다. 1961년 유엔총회에서 제3세력 국가들이 추진한 남북 대표 초청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나 북한은 유엔의 권능을 인정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이 초청을 거부했다.
1970년대 초 세계적 데탕트 속에 유엔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바뀐 것을 김계동은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 420-421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적인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1970년대 초반 유엔 내부의 변화도 일어났다. 1971년 제26차 유엔 총회에서 중국이 대만을 축출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미국이 반대하지 않음에 따라 1951년 유엔에 의하여 침략자로 규정되었던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게 되었다. 서방측이 거의 독점적으로 누려오던 유엔에서의 지위가 중국의 가입으로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한국과 미국은 1971년과 1972년에 유엔에서의 한반도 문제 토의를 연기함으로써 재량상정방식에서 더욱 후퇴한 불상정방식을 채택하였다. 한국정부는 당시 진행 중이던 남북적십자회담과 7-4공동성명 채택에 따른 한반도 화해의 분위기에서 한반도 문제가 유엔에서 토의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하여 강력히 비난하면서, 이러한 전술 되에는 ‘음흉한 목적’이 숨어 있다면서 “미국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을 가리우고 남조선 위정자들이 미제 침략군을 남조선에 계속 주둔시키려는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에서 한국정부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밝히자, 북한은 같은 날 발표한 ‘조국통일 5대 강령’에서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주장하면서 유엔을 인정하는 동시에 유엔외교를 시작하였다. 1973년 7월 북한은 유엔에서의 옵저버 자격을 획득하였고, 이어서 1973년 9월 5일에는 유엔본부 상주대표부를 개설하였고, 제네바에 있는 유엔 사무국에도 상주 옵저버 대표부를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부터 세계보건기구 등 각종 유엔 산하기구 및 전문기구, 정부간 국제기구 등에도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유엔회원국도 아닌 남한에서 유엔데이를 법정공휴일로 삼은 기이한 제도가 철폐된 것이 이 시점이었다. 중국이 상임이사국이 되고 북한이 유엔활동을 시작하면서 “아, 이제 유엔마저 빨갱이 동네가 되는구나!” 한탄한 것인지. 1973년 6월의 6-23선언에서 ‘동시가입 불반대’ 입장을 공표하기는 했어도 유엔 독점이 깨어진 데 대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북한의 유엔 접근에 따라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세 차례 총회에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었다. 유엔에 대한 북한의 요구는 지금까지의 한국 개입을 중단하라는 것인데, 1973년에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해체에 주력하고 유엔군사령부(UNC) 문제는 강하게 내세우지 않았다. UNCURK 해체에는 남한도 동의했기 때문에 이 의안은 표결에 부치지 않고 ‘합의성명’(consensus statement)으로 발표되었다.
1974년과 1975년 총회에서는 치열한 대결이 있었다. 1974년에는 유엔사 해체와 외국군 철수를 요구한 북한 제안이 정치위원회에서 부결된(48:48) 반면 남한 제안이 정치위원회와(61:42) 총회를(61:43) 통과한 남한 승리였다. 그러나 1975년에는 남한 제안과 북한 제안이 모두 통과했는데, 북한이 제3세계 대표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결과였다.
1970년대 이후 유엔은 북한의 중요한 외교무대가 되었지만 미국의 영향력이 큰 유엔에 대한 북한의 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북한이 유엔에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타이완에 대한 중국의 당당한 승리였다. 북한의 ‘하나의 한국’ 주장은 중국의 ‘하나의 중국’ 주장과 같은 틀이기 때문에 중국이 타이완을 몰아낸 것처럼 북한이 남한을 몰아낼 것을 북한은 바랐다. 남한에 대해 최대한 유화적인 입장을 보일 때도 유엔 가입에 대해서만은 개별 가입을 반대했다.
그러다가 결국 공산권 붕괴 앞에서 동시가입에 동의한 것은 북한 대외정책의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유엔에 가입한다는 것은 40년 전의 적국 미국과도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제일 분명히 보여준 일이다. 1990년대 초의 위기를 맞아 북한은 나름대로 국제정세 변화에 순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말 고위급회담의 중단에 이어 1993년 초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북핵문제’가 부각되면서 한반도에 ‘고난의 시대’가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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