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황장엽 회고록>을 들여다본 것은 공산권 붕괴를 향한 세계정세 변화가 진행되고 있던 1980년대 상황에 북한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 시기에 조선로동당 국제 비서 등 요직을 맡고 있던 인물의 증언이라면 당시 북한 지도부의 상황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회고록에서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정직한 증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소득이라면 북한에서 출세나 권력 획득을 위해 어떤 행태가 만연했는지 하나의 사례를 보면서 한국전쟁 이후 가장 중대한 정세변화를 앞두고 북한 지도부가 내부 문제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도다.
북한 내부의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이처럼 제한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외부 시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책으로 김성보의 <북한의 역사 1>과 이종석의 <북한의 역사 2>가 눈에 띈다.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역사비평사 펴냄)의 일환인데, 일반인이 북한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편리한 책들이다. “냉전 이후”에 관심 가진 독자들에게 두 권 다 강력히 추천한다.
<북한의 역사 1>의 마지막 장 “글을 맺으며-북한의 역사에서 찾아본 열린 가능성”에 세 개의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 있다. (1)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였는가?” (2) “북한은 어떻게 초기 경쟁에서 남한에 우위를 점령했는가?” (3) “북한 체제는 왜 경직되기 시작했는가?”
질문(1)에 대해 김성보는 북한 정권이 애초부터 동유럽 위성국들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소련의 통제 의지도 약했다고 본다. 소련은 ‘종주국’보다 ‘후원국’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펼치게 된 것을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질문(2)에서 김성보는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이 자주성, 개혁성, 안정성 등 모든 분야에서 남한을 압도하게 된 이유 세 가지를 제시한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점, 외부 원조를 체계적으로 활용한 점, 그리고 강력한 권력구조를 창출한 점이다. 다만 이 조건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용성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 질문(3)으로 이어진다.
질문(3)에 대한 김성보의 대답은 “다양성의 상실”이다. 건국과정과 전쟁, 그리고 1955년을 전후한 대숙청 등 세 단계에서 이질적 요소를 배척하고 권력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민족통일전선과 인민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역사에 비약이란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비약은 반드시 후유증을 낳는다는 문제를 그는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산권’에 속한 모든 국가를 ‘공산국가’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자유진영’에 속한 국가 모두가 ‘자유국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공산권 국가들의 실제 모습에도 큰 편차가 있었다. 김성보는 초기 북한 정권이 추구한 인민민주주의가 원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길’이었는데, 냉전 심화에 따라 공산권에서는 공산주의로 진행하는 하나의 중간단계로 인식된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노동자 계급의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반봉건 근대 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자신의 체제를 구축했다. 북한의 집권층은 애초에 인민민주주의 제도가 과도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기에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취약하며, 북한에 남한과 전혀 이질적인 제도를 만들 경우 통일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냉전이 심화되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이분법적 대립이 명확해지면서, 제3의 유형으로서의 인민민주주의의 존속 의미는 점차 퇴색되었다. 사회경제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이는 밖으로 소련 등 공산권의 지원을 받고, 안으로 인민의 역량을 총동원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사회주의 이행 급진화의 논리가 점진적 이행의 논리를 압도했다. 이웃 중국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조 정책은 북한을 더욱 자극했다. 체제 경쟁에서 남한에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까지 더해지면서, 195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사회주의 개조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 과정에서 저항과 마찰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런 갈등은 지도력을 더욱 강화하고 체제를 경직화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북한의 역사 1> 242-243쪽)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조선이 일본 지배로부터 해방될 때 조선 인민의 최대 염원은 민족국가 건설이었고, 압도적 다수가 그 방향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원했다. 당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는 지역 대부분의 민심이 같은 방향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선택은 그들에게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냉전은 이들 지역에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일부 지역만이 ‘비동맹’으로 남았다. 조선은 양쪽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곳이었다.
공산권에 들어간 국가들도 공산주의혁명이 당장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과도기를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해진 정책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위 글에서 “이웃 중국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조 정책”이 북한을 자극했다고 하지만, 원톄쥔은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 70-72쪽에서 “1950년대는 극좌가 아니라, 공업화와 친자본을 추구한 시기”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이종석은 1980년대 북한 지도부가 스스로의 발전 단계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단계”로 설정한 점을 중시한다. 무계급사회가 실현되어 사회주의라는 과도기가 끝나고 진정한 공산사회가 완성되기 직전의 마지막 고비로 보았다는 것이다. 개혁개방 노선에 나선 중국과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한다. (<북한의 역사 2> 127-128쪽)
사회주의 완전 승리 테제에 기초한 북한의 사회 발전 구상은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내세우며 경제 발전을 위해 개혁개방을 추진한 중국의 태도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지도부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하면서 드러난 생산력의 저발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하게 자기 사회의 발전 단계를 사회주의 초급 단계로 규정하고, 그 극복을 위하여 서방의 선진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구사했다. 그들은 사회 성격 차원에서는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되었으나 경제의 저발달로 인해 인민이 사회주의 제도에 걸맞는 경제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기아에 허덕이는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생산력 발전을 사회주의 건설의 표준으로 내세운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표방했다. 반면 북한 지도부는 낮은 생산력 수준에도 불구하고 무계급사회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중국 지도부가 볼 때, 북한의 사회주의 완전 승리 테제는 비현실적인 구호였다.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은 1987년 11월 자신을 예방한 이근모 북한 정무원 총리에게 중국공산당 13차 대회에 대해 보고하면서 건국 100년까지의 경제 발전 전략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1세기 중반 중국은 중등 발달 국가의 수준에 달할 것이며, 이때까지는 아직 62년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사회주의 완전 승리 테제를 주장하며 조급한 성과를 추구하는 북한에게, 그들보다 경제 발전이 앞선 중국조차 사회주의 초급 단계 기간으로 백 년을 상정했음을 강조함으로써 올바른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1980년 10월의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는 10년 만에 열린 당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이 정치국 위원 및 비서국 비서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뽑혔다. 후계체제 확립을 위한 ‘수령-후계자 공동통치’ 시대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김정일은 경제를 비롯한 내정을 맡게 되었다. 후계자의 권위 상승을 위해서도 경제발전의 성과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현실경제는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속도창조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한 점을 <황장엽 회고록> 277쪽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김정일은 1970년대에 실권을 잡으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70일 전투’라는 유명한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경제적인 고려 없이 무작정 속도전이나 전격전의 구호를 내걸고 인민들을 무리하게 내몰았다. 그래서 설비를 혹사하고 원가를 무시하여 각종 자재와 노력을 엄청나게 낭비했으며, 경제학의 초보적 이론마저 무시하여 국가 경제발전에 치명적인 차질을 초래했다.
예컨대 석탄을 캐기 위해서는 굴진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저 높이 세운 목표의 달성만 요구하다 보니 굴진을 선행시키는 원칙을 무시하고 이미 굴진하여 확보된 탄맥의 탄만 긁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생산계획을 달성한 사람들은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굴진은 하지 않고 계속 채탄만 하다 보니 결국 석탄생산이 중지되다시피 했다. 그래도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자기 공로를 과장하여 보고하기 일쑤였다.
1950년대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대한 비판과 너무 판박이라서 조금 미심쩍기는 하지만 문제의 성격은 제대로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인다. 1980년대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이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권위를 지키고 높이기 위해 얄팍한 수법을 동원할 개연성은 분명히 있었다.
6차 당 대회에서는 김정일의 전면 등장과 함께 당 지도부에서 혁명 1세대가 물러나고 혁명 2세대와 실무형 지도자들이 들어서는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새 지도부는 이념보다 현실 측면에서 역량을 발휘할 책임을 갖고 있었으니, 1980년대의 경제발전은 후계자의 권위만이 아니라 당 지도부의 신뢰가 걸린 절박한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제상황은 신통치 않았다. 1978~1984년간 2차 7개년 계획의 성과는 계획기간이 끝난 지 2년 이상 지난 뒤 애초의 목적을 대충 달성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미국과 한국의 정보기관은 그 절반 수준으로 추정했다. 서방 정보기관의 성격과 능력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북한 공식 발표보다 크게 낮은 수준의 실적으로 보인다. 1987년 3차 7개년계획에 돌입하기까지 2년간의 조정기간을 둔 것이 실패를 자인하는 조치였다.(이종석 위 책 122-123쪽)
3차 7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93년 12월 강성산 정무원 총리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보고에서 공업생산량 성장이 1.9배 목표에 못 이르는 1.5배에 그쳤다고 실패를 인정했다고 하나 이종석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한 실패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 주민과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왜곡과 과장을 행했으리라는 것이다.(이종석 위 책 125쪽)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가 진행된 시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참혹한 실패가 당연한 일이다.
경제 부진에 겹쳐 서울올림픽 진행과 공산권의 전반적 침체에 따라 북한의 대외관계도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었다. 대내외적 위기의 심화 속에 북한의 통일정책도 변화를 겪는다.
북한의 통일정책은 분단건국 당시부터 ‘남조선혁명론’을 기조로 하고 있었다. 정당한 건국이 북쪽에서만 이뤄지고 남쪽을 미제의 괴뢰정권이 장악했으니 인민의 저항이 마땅히 괴뢰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므로 이 저항을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두 개의 한국’을 부정하는 원칙 아래 남한을 고립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이르게 되면 남한의 순조로운 경제발전 앞에 더 이상 내부 봉기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이종석은 1980년 6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방안을 북한 통일정책의 큰 변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북한의 연방제 제안은 1960년에 시작된 것이고 1973년에는 ‘고려연방공화국’이란 이름도 나왔다.(그래서 남한 반공정권은 일체의 점진적 평화적 통일방안이 북한의 연방제 주장을 따라가는 것이라 하여 탄압하기도 했다.) 그런데 1980년에 나온 방안은 종래의 연방제가 통일에 이르는 과도기 체제로서 제시된 것이었음에 반해 연방제를 최종적 통일 형태로 제시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는 것이었다.(이종석 위 책 136-143쪽)
연방제가 과도기 체제라면 그 다음의 최종적 선택이 과제로 남아있다. 1960년대 북한의 제안은 “연방제를 시행하기만 하면 인민이 우리 체제를 선택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공세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1980년에 와서 김일성이 내놓은 방안은 체제경쟁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접어놓은 것이었다. ‘두 개의 한국’을 부정하는 원칙은 지키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사회로서 남한의 존재를 항구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남조선혁명론’을 포기하는 의미가 있는 방안이었다. 이종석은 이 방향 전환이 이후 남한의 체제경쟁 승리 양상 속에서 북한 입장을 방어하는 이론적 방파제가 된 역설을 지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방안이 198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속에서, 대남 분야에서 위기에 처한 북한 체제를 지키는 이론적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의 고려연방제가 남북한의 빠른 통일과 그것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고려민주연방제는 오히려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분단된 두 개의 국가임을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평화공존하자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 방안은 남북이 서로 상대방의 제도를 실질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방안은 애초에 공세적 차원에서 남한 당국에 제안된 것이었음에도, 동독 붕괴로 인해 한반도에서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론이 나돈 1990년대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북한 체제를 보호-유지하는 이론적 수비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종석 위 책 142쪽)
'냉전 이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의도’는 무엇? (34) | 2014.03.02 |
---|---|
(12) 박정희의 회피정책에서 노태우의 포용정책까지 (0) | 2014.02.26 |
(10) 황장엽이 보여주는 1980년대의 북한 (1) | 2014.02.20 |
(9) 고립의 위험이 짙어지던 1980년대의 북한 (8) | 2014.02.16 |
(8) “친미 일변도”를 비판한 박철언은 ‘자주파’였나? (1) | 2014.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