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을 나는 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출발점으로 본다.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남한 정부의 자세가 이 선언을 계기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남북한은 겉으로는 서로를 적대할 뿐이었고, 속으로는 이용할 뿐이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 1993-1994년에 통일원장관을 지낸 한완상은 최근 낸 책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펴냄) 머리말에서 냉전기 남북관계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적대적 공생관계란 무엇인가? 이 정체를 나는 이 비망록과 회고록에서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한반도는 아프다>는 바로 이 기괴한 ‘적대적 공생관계’의 실제적 효력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특징은 무엇인가? 도대체 이 비극적 관계가 증폭되면 어떻게 남북 대결이 첨예화되면서 그 비용도 그만큼 무거워지게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관계가 갖는 비극적 특징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첫째, 남북 간의 대결이 심화되는 것은 양 체제 안의 권력주체가 극단주의적 정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쪽에 극우 수구세력이 집권하고 북쪽의 극좌 군부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남북 간 냉전 대결은 극단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즉 남북 간의 극단적 대결은 각 체제 안의 권력 주체가 갖는 극단주의 정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호전적 권력주체는 체제 안보의 이름으로 다른 체제와의 긴장과 대결을 부추기고 합리화한다.
둘째로, 남북 양 체제의 권력주체는 안으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될 때마다, 곧 그들의 권력이 체제 안에서 도전을 받거나 위협에 직면하게 될 때마다, 이 위기를 관리하고 극복하기 위해 짐짓 상대방 체제로부터의 위협을 심각한 것으로 각색하고 과장한다. (...) 다시 말하면 반정부-반체제를 이데올로기의 적으로 범죄화하여 그들의 인권을 박탈한다. 그만큼 양 체제는 반민주적-반인권적 정권으로 퇴행하게 된다. 그만큼 민족과 국가 둘 다 앓게 된다.
셋째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양 체제의 강경-극단 권력은 체제 간 긴장을 고조시킴으로써 그들의 권력기반을 더욱 강화시키려 한다고 했다. 남북 간 긴장은 바로 남북 안의 강경권력이 호전적 극단주의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고 했다. 그러기에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극단세력이 집권하게 되면 두 체제 간 모순-갈등은 각 권력주체에 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에 하나의 심각한 정치적 위선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그리고 겉으로는 상대방 체제의 권력주체를 미워하고 악마화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양 체제의 극단세력은 서로 도와준다는 기막힌 역설과 위선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
7-7선언 이전에 남북한이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민간을 통한 우회적 대화 아닌, ‘당국 간 대화’도 이따금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가 아니라 대화의 시늉에 그치는 경향이 있었다. 1972년의 7-4공동성명이 전형적인 예다.
1969년 7월 ‘닉슨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상대로 데탕트정책을 펴며 베트남 철군 등 동맹국에 대한 군사적 책임을 줄이는 정책으로 나섰다. 이 변화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 지도부는 무력을 앞세운 대남정책을(1968년의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와 울진-삼척사태 등) 전면적 평화공세로 바꿨다. 남한 정부는 이 상황에서 불안감에 빠졌으나 미국의 강압 아래 남북대화에 나서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황을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선인 펴냄, 75-76쪽) 이렇게 설명했다. 인용된 김형욱 발언의 출처는 “From Embassy Seoul to Department of State(1970.1.2), ‘Conversation with General Kim Hyung Wook, former Director, ROK CIA’”로 표시되어 있다.
북한의 위협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권유하였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주한미군 추가 철수조차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중국과 북한을 소련 압박 카드로 생각하는 한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미국과 공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은 대중 관계개선,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부담 경감, 대소 긴장완화를 위해 박정희 정권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서 주기를 원했으며 필요시 압력도 행사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다음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이나 베트남의 상황은 한국과 매우 다르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독일이나 베트남 어느 쪽보다도 더 나쁜 경험을 했다. 대사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은 군사력과 산업,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북측과 어떠한 형태로든 접촉을 가질 만큼에 이르진 못했다. 그 같은 일을 하기엔 구조가 너무 허약해서 해체되고 말 것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어떠한 주제로든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북쪽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대화를 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그를 용공주의자라고 비난할 것이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남북 당국 간 대화의 출발점은 1971년 11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제9차 예비회담장에서 한적 대표단의 정홍진이 북적 대표단의 김덕현에게 실무자 간 비밀접촉을 제의한 것이라고 한다.(김해원 위 책 80쪽) 이로부터 7-4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7개월간 24차례 판문점에서 접촉이 있었고, 정홍진의 평양 방문(1972년 3월 28~31일)과 김덕현의 서울 방문(4월 19~21일)이 있었으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5월 2~5일)과 북한 박성철 부주석의 서울 방문(5월 29일~6월 1일)이 있었다.
그런데 대화가 시작된 직후인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사실이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 선언과 함께 약 3천 자에 달하는 긴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이튿날 <동아일보> 기사 “국가비상사태 선언, 안보 위주로 급회전” 중 담화문 내용 일부에 대한 설명을 옮겨놓는다.
박 대통령은 안보위기론의 정당성으로 (1) 핵의 교착상태 때문에 강대국들의 행동이 제약받는 때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으로 인해 한반도의 국지적 긴장이 더욱 높아지고 있고, (2) 유엔에 가입한 중공이 유엔 결의로 창설된 유엔군과 언커크(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해체를 요구하고 (3) 미국에 우리 안보를 부탁할 수 없는 실정에다 주한미군의 추가 감군 문제도 이미 논의 중에 있으며 (4) 이웃 일본도 중공 및 북괴와 더욱 빈번히 접촉하기 시작한 사실 등을 들었다.
담화문 중 “혹세무민의 일부 지식인들의 무책임한 안보론”을 지적하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응분의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필요할 때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비상사태 선언 이후 언론의 자율성이 심각한 제한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도 않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의 표현은 이런 우려를 씻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지금 읽는 데는 약간의 기술이랄까, 감안이 필요하다. 위 기사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에 대한 신뢰가 표명되어 있지만, 바로 옆의 사설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문단으로 맺어져 있다.
한데 자유민주체제를 살리기 위한다는 이유 아래 바로 그 자유민주체제의 제 장점이 부당히 유린되는 자기모순의 사례를 우리는 여러 후진국에서 많이 보아왔다. 공산독재와 싸우는 대결 과정에서 이와 같은 자기당착적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다 같이 반성하고 명심하지 않는다면 국가비상사태 선언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2012년 12월 24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한홍구의 글 “‘자랑스런 동아일보’는 이렇게 추락했다” 중 1975년 초 동아일보 사태 때 “새로이 이사 겸 주필로 선임된 사람은 1971년 12월 비상사태 선포를 비판하다가 정권의 압력으로 물러난 이동욱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위 사설 때문에 혼이 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비상사태 선언은 1971년 10월 15일 학생운동 진압을 위해 위수령을 발동한 지 두 달도 안 된 시점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국민이 감지할 만한 아무런 사태 변화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조치에 어리둥절했다.
국민이 모르고 있던 사태 변화는 당국 간 접촉의 시작이었다. 비밀리에 접촉을 진행하면서도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필요할 때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해야 한다”는 엄포를 놓지 않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불안한 상태에 박정희 정권은 처해 있었던 것이다.
휴전협정 때도 입장을 서로 맞추지 못했던 남북한이 함께 합의한 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 7-4공동성명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이 성명을 발표하면서도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한 ‘굴복’이라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발표 사흘 후인 7월 7일 국무회의에서 “7·4 공동성명이 나왔다고 좋아라 날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이런 자들을 단속하는 동시에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하라”는 훈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공동성명에 뒤이어 체제 유지를 위한 극단적 조치로 유신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 79쪽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연구자로서 국가관이 나보다 훨씬 확고한 분으로 보인다. 그의 연구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입장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음미할 대목이다.
이와 같은 국제적 데탕트 하의 국내정치적 도전과 압력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추진하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시키는 정치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호기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가비상사태 선언 등 일련의 정치적 조치는 한반도 정세를 보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미국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국무부의 한 분석자료는 “북한의 새로운 유연성에 대한 반응으로 최근 박정희 대통령은 더욱 경직된 정책노선을 택하였다”고 묘사하기도 하였던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있어서는 남북대화 추진 그 자체보다는 북한의 평화공세를 불식시키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집요하고도 일방적인 평화공세를 잠재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2월 6일 비상사태 선포를 조치하고 난 이후 비밀접촉에서 비로소 남북정치회담을 제의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홍석률은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펴냄) 392-393쪽에서 7-4공동성명의 의미를 “분단의 내재화”로 설명했다.
미중관계 개선과 맞물려 남북대화도 시작되었다. 한반도 분단의 내재화는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해주는 측면이 존재했다. 그러나 분단 문제의 근본적 개선이 없다면 이는 분단유지의 책임과 비용이 남북한에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반도 분단을 둘러싼 기본 대립구도가 동서 진영대결에서 남북의 체제경쟁으로 이행되는 것을 의미했다. 미중관계 개선과 남북대화는 새로운 화해국면을 열었고 한반도 평화유지에 보탬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남북의 체제경쟁은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었다. 남북은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타자화하는 체제우월성 경쟁과 자신의 체제를 상대방 지역으로 확산하려는 체제확산 경쟁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남북간의 외교적 경쟁도 치열해졌다.
남북의 체제경쟁은 결국 남북의 집권세력이 각자의 정치체제를 더욱 억압적인 방향으로 개악하는 데 활용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 모두 미중관계 개선, 데땅뜨로 조성된 유동적인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였다. 이를 활용하여 남쪽에서는 유신체제가 수립되고, 북쪽에서는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고 후계체제가 확립되었다. 남북의 집권세력은 일면 데땅뜨 상황에 부응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체제경쟁을 격화시키고, 데땅뜨를 위기국면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가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분단의 내재화”란 타율적인 것이었던 분단이 자발적인 것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국민 모두의 생각이 그렇게 바뀐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 정부가 분단 상태에 대한 내부의 반대를 스스로 억누르며 분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미-소군의 진주로 시작된 분단은 외세의 강압에 따른 타율적인 것이었고 미국은 한국인의 민심에 역행하는 이 상태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이제 미국이 갖고 있던 책임을 한국 정부가 넘겨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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