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1989년 7월 3일 평양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 중이던 임수경이 기자회견장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마 셋째 절이 여기 적은 것과 달랐을 것 같다. 그에 관한 생각은 뒤에 적겠다.
임수경 방북의 배경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설명했다.
1988년 올림픽 공동개최 투쟁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통일운동은 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로 이어졌다. 북한은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대회라는 점에 의미를 두면서 동시에 서울 올림픽이 공동 개최될 경우에도 대비해 1987년 봄부터 ‘축전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막대한 시설 투자와 더불어 열성적인 준비를 해왔다.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의 평양축전 초청장을 받은 전대협은 89년 2월, 그 해 7월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겠다고 공식 선언하고 산하에 ‘평양축전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와 관련해 89년 초반 정부의 반응은 우호적이었다. 예컨대 <한국일보> 2월 12일자에는 “대학생들 평양축전 보낸다”는 큰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정부는 애초 평양축전 참가를 승인하려 했었지만, 1989년 3월 갑자기 방침을 바꿔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투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위해 문교부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축전 시기가 임박한 6월 초 정부가 평양축전은 반미반한의 정치 선전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허 방침을 내리자 끝내 축전 참가는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되었든, 이 무렵 정부의 입장은 오락가락했는데, <워싱턴포스트>는 노태우 정부의 종잡을 수 없는 대북한 정책으로 한국인들이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익환의 방북을 계기로 공안정국의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지금 상황에서 통일운동에 주력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라는 의견이 운동권 내부에서도 제기되며, 평양축전 참가는 물건너간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대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가고야 말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4권 116-117쪽)
노태우 정권 ‘북방정책’의 ‘정략성’에 대한 강준만의 지적은 지당한 것이다. 1980년대 말 세계적 해빙 추세에 보조를 맞춰 민족문제 해결을 지향한다는 기본 방향은 타당한 것이었지만, 변화의 성과를 정권에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는 집착이 너무 강했다. 이 집착이 흐름을 왜곡시키며 혼란을 일으켰고, 그 혼란이 후에 북방정책의 좌초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1987년 체제’의 문제점과 한계가 지금은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뤄지지 못한 것보다 이뤄진 것이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의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민족문제 해결도 그 하나였다.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동유럽의 해빙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과감한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림픽 공동개최 운동을 통해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상황에서의 관점도 자라나고 있었다.
1989년 3월 황석영과 문익환의 연이은 방북, 그리고 석 달 후 임수경의 방북이 이 움직임을 대표한 것이다. 현직 국회의원 서경원이 1988년 8월 몰래 방북했던 사실도 뒤이어 밝혀졌다. 남한 정부는 이에 모두 사법처리로 대응했는데, 실정법을 존중하는 ‘법치’의 원칙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평양축전 참가 불허 방침은 설명이 안 된다. 아직 열리지 않은 행사에 ‘반미반한’ 정치 선전의 조짐이 있다면 대표단을 보내 그런 선전을 억제하도록 애쓸 일 아닌가. 거의 모든 참가국이 우리 수교국이거나 수교를 추진하는 나라들인데. 변화의 칼자루를 정권이 독점하려는 집착에 기인한 자가당착이었다.
위에 올린 ‘통일 노래’의 셋째 절이 원래는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었다.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통일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뒷받침한 변화로 보인다.
그 노래가 만들어질 때는 민족의 분단이 생살 찢는 고통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느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후의 긴 세월 동안 고통의 성격이 바뀌었다. 살이 찢겨졌던 부위는 딱지를 몇 번이고 떼어내며 적어도 표면은 아물었다. 분단 직후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 때문에 필사적인 심정으로 매달리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민족문제 해결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의 내 모습이 일그러진 사실을 자각하고 과거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당당한 미래를 맞겠다는, 보다 능동적이지만 덜 절박한 과제로 바뀌어 왔다.
민족문제에 대한 이 사회의 인식이 약해진 사실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분단의 상처에서 당장 피가 철철 쏟아지지 않고 있으니 목숨까지 바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헤어지기 싫은 사람들을 억지로 떼어놓는 것이 하나의 폭력이었던 것처럼, 뭉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뭉치기를 강요하는 것도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지금의 우리 모습을 스스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에 민족문제에 대한 태도가 달려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이 사회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면 민족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 이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그 문제가 분단 상태와 긴밀히 얽혀있는 것이라고 볼 때 민족문제 해결이 절실한 과제가 된다. 민족문제에 대한 소위 ‘진보’와 ‘보수’ 사이의 온도차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1988년 7-7선언 직후의 좌담 “민족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박현채-백낙청-양건-박형준, <창작과비평> 1988년 가을)에서도 이 온도차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양건은 급박한 상황 전개를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보수’ 입장을 소개했다.
양건: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통일문제의 제기가 일반시민들이 처음 받아들일 때에는, 좀 뭐라고 할까요, 적절한 표현 같지는 않지만 느닷없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통일문제, 분단문제가 재야운동권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왔지만, 시민들은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또 한편으로, 시민들 중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열려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6-10남북학생회담 문제가 나왔을 때 대한변호사협회에서 회장 이름으로 나온 성명서가 있는데, 그것이 일반시민들의 보통 느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런 골자입니다. “너무 성급한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한다.” 이것이 첫번째이고, 또 하나는 “통일논의에는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먼저 기성세대 설득부터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두번째 얘기, “기성세대 설득부터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점이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운동에 있어서 시민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또 앞서 나간다라는 선도적인 역할도 중요하겠습니다만, 특히 민주화운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중간층의 흐름을 누가 잡느냐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보수적 입장을 ‘기성세대’란 이름으로 내놓고 ‘설득’이 가능한 대상으로 양건은 본 것이다. 지금 독자들에게는 ‘기성세대’보다 ‘기득권층’이란 이름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고,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기득권층의 이해관계 인식이 민족문제에 대한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동안 많이 확인되어 왔기 때문이다.
폭넓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양건의 희망은 ‘87혁명’의 주류 관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도 얼마 전 감사원장을 그만두면서는 그런 희망을 많이 접었으리라고 짐작되거니와, 25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희망이었다. 나 자신 비슷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박현채는 당시에도 문제의 성격을 더 확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박현채: 나는 조금 견해가 달라요. 6-10회담에서 나타난 양상이란 것은 28년 전에 나타난 양상입니다. 4-19 후에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제안이 있었고 6-10과 똑같은 양상의 진전을 보였습니다. 물론 내용은 달랐죠, 그러나 큰 맥락에서 봤을 때 그것은 같은 양상이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꼭 이런 것들이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해서 주어져야 하고 학생이나 또 각기 작가면 작가, 음악가면 음악가, 이런 다원적인 접촉이 거부되어야 하는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7선언에 대해 본다면 민주화와 통일이 하나라는 인식, 그로부터 통일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태우정권이 종래와 같은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야권의 논리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자기 안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통일추구세력의 논리에 대한 대응으로서 주어진 것이 이번 7-7선언이었습니다. 이 7-7선언에서 제기한 바가 통일원장관 이홍구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민족공동체이다” 이런 것이 기초한다고 했을 때, 다원적 접촉을 위한 ‘국민적 합의’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민족 밑에 종속하는 것이 지금 현상적으로 국가란 말이죠. (...)
‘통일추구세력’과 ‘정권’을 별개의 대응 주체로 놓고, 통일추구세력의 논리에 정권이 모처럼 내놓은 합리적 대응으로 7-7선언을 평가한 것이다. 두 주체의 입장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지만, 이런 대응과정을 통해 사회의 진로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면 25년 전의 내게는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민족문제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봉쇄되어 있는 40년 동안은 생살 찢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도 못하고 있었던 셈일까? 표현의 자유가 회복되기만 하면 분단건국 당시의 민족의식이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대로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자란 내 또래 사람들 중에도 다른 문제에 몰두해서 민족문제를 경시하는 풍조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런 풍조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민족문제 표출을 가로막은 반공독재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설득’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처해 있는 조건과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민족문제에 대한 입장에는 우리 사회 안에 상당히 큰 편차가 있고, 어느 입장도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일의 당위성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 자신 근년에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이 지나쳐 불필요한 고통을 불러올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세상의 좋은 점을 잘 지키려는 노력에 비중을 둔다.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점진적 방안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왔다. ‘통일’보다 ‘통합’으로 인식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도 “정말 이런 건 바뀌어야 하는데”, 생각되는 일인데도 이 사회에서 너무 인식이 아쉬운 것들이 있다. 민족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평화, 정의, 민주주의 등 중요한 가치들이 민족문제의 미해결로 인해 큰 장애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는데도 아직까지 사회에 충분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설득은 역시 필요하다. 설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문제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의 어떤 기형적 문제들이 민족문제 미해결에 말미암은 것인지, 지금까지 쌓여온 훌륭한 지적들을 드러내는 것을 이번 <냉전 이후> 작업의 한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대통령의 발언 앞에서 이 필요를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대통령의 딸이 된 것을 대박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대통령 된 것을 대박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민족문제도 복권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 몫을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에게는 통일이 한 차례 게임이나 작전으로 끝날 수 없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힘들고 괴로운 점이 있더라도 열심히 그것을 살아낼 뿐이다. 대박 같아서 달려들고, 대박 아닌 것 같아서 걷어찰 대상이 아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라도 정성을 바쳐 추구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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