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었다. 하나의 측면은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확대였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이 이 측면에 유리한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뒤이어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노태우의 임기 말까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이 측면은 큰 성공이었다.
또 하나의 측면은 북한과의 관계였다. 이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이 이뤄지는 것 같았는데, 연재 앞머리에 소개한 1992년 9월의 ‘훈령 조작사건’을 계기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 측면의 중심축은 1990년 9월부터 2년간 8회에 걸쳐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이었다. 임동원은 이 회담의 출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태우 정부의 이런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자세는 국제정세에 대한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외교안보 문제 전문가요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합리적 현실주의자 김종휘 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검사 출신으로 전향적 역사의식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서동권 안기부장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산파 역할을 한 정치학자 출신 이홍구 통일부장관이 닦아놓은 기초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선양하는 계기가 된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평양이 서울의 제의를 받아들여 1989년 2월 초부터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1년 반의 시간이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무려 8차의 예비회담을 거듭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주요 내용으로는, 회담 명칭을 ‘남북고위급회담’으로 하고 제1차 회담은 1990년 9월 4일부터 서울에서, 제2차 회담은 10월 16일부터 평양에서 개최하며, 의제는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 문제’로 결정했다. 대표단은 각각 7명으로 하고 수행원은 33명, 취재기자 50명 등 총 90명으로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피스메이커>(중앙북스 펴냄) 171-172쪽)
1985년부터 안기부장 특보로 ‘남북 비밀 회담’을 맡아 온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정책보좌관에 임명되었다. 그 업무는 첫째 북방정책 추진, 둘째 대북 비밀접촉과 대북 문제 전반, 셋째 국내 정치의 중장기 기획, 넷째 당면한 주요 현안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판단의 네 가지였다고 한다. 박철언은 새 자리에서도 비밀 회담의 대표 자리를 지켰고, 그 운영을 위한 직통전화 ‘88핫라인’을 청와대 사무실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정책보좌관실 안에 ‘기밀실’을 만들었다.(<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권 299쪽, 302-303쪽)
청와대 비서실은 정책 집행이 아니라 대통령 보좌를 위한 부서다. 그런데 정책보좌관이 회담 대표를 지속적으로 맡는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상당한 혼선이 빚어졌다. 박철언 자신의 기록에도 1988년 7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제기된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중국 및 소련 방문설’을 언급하며 “나의 북방 정책 추진과 대북 접촉에 대해 누군가가 야당에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같은 책 2권 31쪽)
임동원의 <피스메이커> 내용에 관해 저자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점 하나가 있다. 박철언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에서 외교안보연구원장 직책으로 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낸 저자의 회고에 당시 북방정책의 기수를 자임하던 박철언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뜻밖의 일이다.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저자를 만나도 묻지 않는 게 예의일 것도 같다.) 짐작한다면, 참모 신분의 박철언이 현장 활동에 너무 열성적으로 나섰다는 모순점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서술에서 배제한 것이 아닌가싶다. 임동원이 이 책에서 서술한 것은 행정가들의 손으로 진행된 정규적 대북관계다. 정규적 진행에서 벗어난 정치인 박철언의 ‘와일드카드’ 역할을 배제함으로써 서술의 안정성을 지키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박철언의 활동 폭을 놓고 당시 논란이 많았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2권 51-52쪽에 박철언이 기록한 1989년 1월 4일의 청와대 회의 상황에도 이 문제가 나타난다.
1989년 1월 4일, 대통령 주재로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가 열렸다. 나는 남북 문제, 북방 정책, 정책 보좌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1989년 12월 8일에 정치특보로 임명된 노재봉 특보가 북방 정책 이야기를 꺼냈다. 노 특보는 “북방 외교와 남북 문제를 구분해서 혼동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북방 외교의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미국, 일본, 타이완과의 관계를 먼저 다져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민주 신봉 세력들이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자세이니 간접적인 지원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를 했다.
당시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나의 주도하에 추진되는 북방 정책에 대하여 ‘용공 외교’ ‘밀사 외교’ ‘밀실 외교’ ‘졸속 외교’라며 마구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친미 일변도의 시각과 극우 보수주의 측에서도 우려하는 분위기가 높았다. 이를 대변하는 듯한 노재봉의 문제 제기였다.
논란이 된 자기 역할을 박철언은 ‘대통령 지시’로 정당화했다. 1988년 12월 6일 박세직 신임 안기부장의 대통령 보고에 홍성철 비서실장과 자신이 배석한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이렇게 인용한 곳이 있다.
“북방 정책, 남북 문제, 국내 정치의 중장기 판단, 당면 주요 현안에 대한 깊은 판단은 청와대 정책보좌관실에서 하니 안기부도 특보제를 강화하여 뒷받침해주도록 하라. 박철언 보좌관 팀이 남북 정상 회담의 비밀 창구이다. 고도의 보안을 필요로 한다. 보안을 지켜줘야 한다. 또 안기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같은 책 2권 47쪽)
박철언의 사조직 월계수회의 63빌딩 본부에 ‘북방정책연구소’ 간판을 걸어놓았던 사실을 보더라도 정치인 박철언과 북방정책 담당관 박철언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1988년 4월에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만났을 때 직원들 회식이나 시켜주라며 준 봉투에 “보좌관실 직원 50여 명이 회식을 몇백 번 하고도 남을 큰돈”이 들어 있기에 정중하게 돌려줬다는 이야기가 위 책 308-309쪽에 적혀 있다. 그가 정치자금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는 세간의 인식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1989년 1월 싱가포르에서 가진 ‘비밀회담’ 이야기는 그와도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 1월 22일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싱가포르에서 한시해 대표와 ‘88계획’ 상의 남북 비밀 회담을 갖기 위해서였다. 강재섭, 강근택, 김용환이 나를 수행하였다. 1월 26일, 보안을 위해 호텔 수영장에서 한시해와의 비밀좁촉을 가졌다. 한시해 대표는 “고위 당국자 회담에 박 대표도 참석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 대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며 한시해의 의견을 물어봤다.
한시해 대표는 “박 대표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도록 여러 측면에서 뒷받침해줄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상의해주십시오. 이번에 10만 불 정도를 지원해줄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마음속으로는 ‘아니! 이 양반이 돌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한 호의는 고맙지만 민족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돈 얘기는 피차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정색을 하면서 응수했다.(같은 책 55-56쪽)
말도 안 되는 제안으로 박철언은 생각했다지만, 한시해는 4년간 거의 매달 박철언과 회담을 가져 온 카운터파트였다. 한시해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이상한 생각을 한 것만일 수는 없다. 한시해가 자기 돈 갖고 그런 제안을 한 것일 수도 없다. 박철언이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지 떠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북측에서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얘기가 나온 김에 대기업이 북방정책에 관여한 흔적도 박철언의 ‘증언’ 중에 언뜻언뜻 살펴볼 수 있다. 대우의 김우중은 헝가리 수교에 큰 기여를 하는 등 공산권에서의 활발한 활동이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박철언과의 접촉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1988년 4월에 돈 봉투를 받았다가 돌려준 얘기 외에 같은 해 7월 29일에 북한을 방문할 예정인 김우중과 만나 대북 정책 문제, 헝가리 투자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정도가 보일 뿐이다.(같은 책 2권 30쪽) 김우중이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은 틀림없는 일인데 다른 채널을 통한 것인지, 아니면 박철언이 말을 아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반면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협력관계에 관해서는 훨씬 소상히 밝혔다. 1988년 10월 4일 프라자호텔 2085실의 만남에서는 소련 방문 계획에 대한 협조 요청과 함께 금강산 관광특구에 대한 구상을 설명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12월 17일과 1989년 1월 5일에 청와대 사무실로 찾아와 임박한 북한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같은 책 2권 32쪽, 48-49쪽, 52쪽)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89년 2월 2일 정주영이 북한에서 돌아왔을 때의 기록이다.
2월 2일, 정주영 회장이 귀국했다. 공항에서 동행을 요구하는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리고, 오후 1시 50분경 바로 청와대의 내 사무실로 달려왔다. 정 회장은 “허담 비서가 ‘박 대표에게 정중한 안부를 전해달라’고 당부하더군요. 허담 비서는 비방 방송의 중지 제의를 총리 회담 예비 회담에서 할 예정이라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내가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허 비서는 군비 축소도 주장했습니다”라고 허담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
그러나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개발은 엄청난 역풍에 부닥쳐야 했다. 물론 9년 후인 1998년 11월에야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으나, 당초의 구상대로였다면 1989년 7월에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대북 경협도 10년은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향적인 대북 정책과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향한 북방 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판과 견제가 너무 심했다.(같은 책 57-58쪽)
정주영은 무슨 재주로 공항에서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렸을까? 안기부를 따돌리고 바로 달려온 곳이 박철언의 사무실이었다는 사실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안기부는 박철언이 3년간 몸을 담은 곳이었고, 청와대 보좌관 입장에서 현장 활동에 관여하려면 제일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할 기관이었다. 그런데 안기부마저 따돌리고 정주영과의 관계를 혼자 챙기려고 드는 것은 참으로 ‘밀실 외교’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자세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을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다고 하는 데서도 박철언의 업무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실행 부서도 아닌 청와대 보좌관이 그런 사업의 구상-추진에 재벌 총수와의 합작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다니, 그를 둘러싸고 혼선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철언은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관계와 학계의 ‘친미파’와 대비되는 ‘자주파’로 자신을 내세운다. 나 자신 우리 사회, 특히 엘리트계층의 ‘종미’에 가까운 지나친 친미 경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미국과의 공조 필요성을 제기하는 정도의 주장을 박철언이 “친미 일변도”로 비판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미국과의 관계가 가진 현실적 중요성까지 부정하는 ‘자주파’라면 진정한 자주의식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기 쉽다.
박철언의 기록’ 내용을 검증할 다른 자료를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기록만을 놓고도 세심히 들여다보면,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최대의 과제로 내세운 그의 활동이 고위급회담을 주축으로 진행된 정상적 대북관계와 별도로 전개되었고, 이로부터 많은 혼선의 소지가 발생한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강준만이 노태우 정권 북방정책의 정략성을 크게 보는 이유도 여기 있고, 1992년 말 고위급회담이 정략적 의도로 좌초될 위험도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것이 아닐지.
1990년을 전후한 국제정세 변화는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초유의 기회를 가져왔다.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겨 더 큰 계기를 만들기 위해 고초를 무릅쓴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직책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회담은 대박”이란 식의 정략적 사고를 갖고 모처럼의 기회를 그르친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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