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과 9월에 각각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를 ‘국토 일부를 참절한 반역도당’으로 간주하였다. 남쪽 헌법에는 대한민국 영토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되었고, 북쪽 헌법에는 수도가 서울로 되어 있었다. 서로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 극한적 대립상태는 냉전 종식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대립상태의 성격을 김근식은 “북한과 대한민국”(<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이병천-홍윤기-김호기 엮음, 한울 펴냄) 317-318쪽)에 이렇게 요약 설명했다.
전쟁 이후 분단의 공고화와 본격적인 체제경쟁의 가속화는 남한의 자본주의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는 한편 북한 역시 사회주의체제가 보다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남과 북은 서로가 상이한 체제로 더욱 멀어져갔고 남한의 반공국시에 입각한 권위주의체제와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유일체제는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면서 이를 통해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주는 이른바 ‘적대적 의존관계’로 고착돼갔다. 이제 남북의 구성원은 잠재의식 속에서조차 상대방을 적대하는 데 익숙해야 했다. 적화통일과 승공통일의 구호 속에서 남북은 그 어디서도 절충점을 찾을 수 없었다. 뿔 달린 괴물 이미지와 미제의 괴뢰 이미지가 상호 교차하면서 남과 북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민족이라기보다 타도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다. 남북한 당국은 상대방과의 적대관계를 내부의 정권유지와 정적 탄압에 유용한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과 체제분만 세력들은 곧바로 적대하고 있는 상대방과 내통한 세력으로 매도됐고 이는 곧 반체제세력으로 낙인찍혀 정치적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결국 분단은 양측의 적대적 대결을 한층 첨예화시켰고 냉전은 이를 더욱 확대재생산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분단의 공고화가 진전되면서 불완전한 반쪽은 자기 반쪽이 아닌 다른 한쪽에 의존하는 종속적 국제관계를 결과함으로써 외세의 영향력을 확대해가야만 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첨예한 대결장이 돼버린 한반도는 남과 북 공히 민족의 협력과 단합이 아니라 각 진영의 첨병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남측은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진영의 이해관계를 추종해야 했고 북측 역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진영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남과 북 모두 적대적인 다른 반쪽을 압도하기 위해 전혀 다른 한쪽에 좌우되는 피동적인 지위였을 뿐 한 번도 주도적 입장에 서지 못했다.
김근식이 말하는 ‘적대적 의존관계’는 내가 <해방일기>에서 지적한 극좌-극우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연장된 것이다. 해방에서 정부수립에 이르는 3년간의 해방공간 속에서 극좌파와 극우파는 상대방의 존재를 자기 노선의 근거로 삼아 정상적 정치현상을 가로막으며 각자의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 권력 위에 세워진 두 국가는 상대방의 부정을 자기 정체성의 일차적 근거로 삼으며 독재권력을 유지한 것이다.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의 가장 큰 의미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 있었다.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선언은 북한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앞서 남한을 스스로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있어서 획기적 전환을 담은 것이었다. 남한의 국가권력이 북한과의 대결 주체로서 존재 의미를 가진다는 40년간의 집착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이 선언에 들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해 준 선언이었다. 경제 발전 덕분에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국가의 역할이 상당 수준 충족되었고 1년 전의 민주화운동 결실로 민주공화국의 요건도 대폭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냉전 때문에 거듭 파행을 겪던 올림픽대회가 서울에서 모처럼 성공적으로 열릴 전망이었으니 국제사회에 대한 대한민국의 체면도 크게 올라가 있었다. ‘반공의 보루’를 넘어선 국가정체성을 당당히 내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나는 이 선언의 의미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 면이 있었다. 양김 대립 덕분에 불과 36.6퍼센트 지지로 당선되어 군사독재정권의 유산을 지키고 있던 당시 정권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는 위에, 두 달 후로 닥쳐 있던 올림픽대회를 위한 정략적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7-7선언에 앞서 학생권과 재야에서 펼쳐 온 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 운동을 정부가 탄압해 온 상황을 보더라도 7-7선언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임기 말까지 ‘북방 외교’ 노선을 유지한 사실을 이제 와 놓고 생각하면 정략적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의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7-7선언은 냉전 이후 남북관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7-7선언은 냉전 종식을 선포한 몰타선언보다 17개월 앞서 나온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냉전 종식의 기미가 아직 느껴지지 않고 있었으나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체제 붕괴를 향한 변화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올림픽대회만 하더라도 제22회 모스크바대회와 제23회 로스앤젤레스대회를 ‘반쪽 대회’로 만든 동서대립이 1988년에는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제24회 서울대회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종식이 동유럽에 국한된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본다고 지난 회에 적었다. 공산권의 서울올림픽 참가 대세도 동유럽 국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북방 외교 최초의 큰 성과였던 헝가리 수교의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정리했다.
7-7선언 후, 동구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헝가리였다. 노태우는 올림픽 개막을 불과 4일 앞둔 9월 13일 헝가리와 대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헝가리와의 외교관계 수립은 뒷거래의 산물이었다. 올림픽 개최 이전에 적어도 공산주의 국가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기에, 6공은 헝가리와의 협상을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88년 6월 남한이 10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준다면,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남한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할 의향이 있다는 헝가리 정부의 제안이 있은 후, 박철언을 협상 책임자로 한 비밀협상이 3차례 진행되었다. 그리고 올림픽 개막식 4일 전에 헝가리에 6억2천5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우중이었다. 이미 84년 헝가리를 방문해 헝가리와 일련의 사업 계획을 성사시켰던 김우중은, 이런 관계를 활용해 87년 말과 88년 초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각각 무역사무소가 개설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인물과사상사 펴냄) 1980년대편 3권 283쪽)
공산권 국가 중 헝가리가 한국의 첫 수교국이 된 까닭은 무엇보다 헝가리가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당시의 체제 변화를 순조롭게 겪어내고 있던 나라라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헝가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56년의 ‘헝가리사태’ 때문이었다. 스탈린이 죽은 후 나지 임레(Nagy Imre, 1896~1958) 수상의 ‘신노선’ 아래 진행되던 헝가리의 자유화 운동이 소련군의 침공으로 좌절된 사태다. 이 사태가 소련과 위성국의 관계를 비방하는 자료로 서방에서 크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이 헝가리란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태 이후 1988년까지 32년간 헝가리를 이끈 카다르 야노슈(Kádár János, 1912-1989)의 업적이 눈여겨 볼만한 것이다.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 편”이란 그의 말이 유명하다. 이것은 스탈린시대 헝가리 독재자였던 라코시 마챠슈(Rákosi Mátyás, 1892-1971)가 했던 “우리를 돕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 적”이란 말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 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카다르는 라코시 같은 독재자보다 나지 같은 개혁가에 가까운 성향의 인물이었고, 나지 내각에 국무장관으로 참여하고 있었다.(헝가리에서 다른 유럽국과 달리 성을 앞에, 이름을 뒤에 적는 것이 흉노 기원설의 한 근거다.) 소련 지도부가 헝가리 침공 후 그를 선택한 것은 헝가리인의 반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33년이 지난 후 죽음을 몇 달 앞둔 시점의 연설에서 그는 당시 자신이 소련의 위협에 너무 쉽게 굴복했다고 반성하고, 존경하던 동지 나지의 처형에 협조한 것이 자기 인생의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동유럽 지도자 중 가장 온건한 인물의 하나였던 카다르가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32년간 권좌를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헝가리의 정치적 평온을 말해준다. 그는 소련의 통제를 감수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실용적인 정책노선을 추구해서 헝가리를 동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이끌었고, 공산권 붕괴에 임해서도 헝가리의 체제 변화가 가장 순조로운 편이었다. 그가 당서기직에서 물러난 것은 한국과의 수교 발표 넉 달 전이었다. 그 수교 방침도 그의 지도 아래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공산권 붕괴를 위한 조건은 1970년대의 경제 불황 속에서 성숙된 것으로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에서 설명한다. 불황에 대한 대응책에서 소련과 중국의 차이를 설명한 것을 보면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와 냉전 종식이란 동유럽에 국한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더 굳어진다.
(소련과) 매우 비슷한 시장 자유화와 분권화 정책이 모택동주의 퇴조 이후 중국에서 극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1980년대 중국의 GNP 성장률은 연 평균 10퍼센트 가까운 것으로, 한국 한 나라에게만 뒤질 뿐이었다. (...) 만약 1980년의 러시아가 (그 시점의 중국처럼) 기껏 호강을 꿈꾼다는 것이 텔레비전 갖추는 것 정도인 농민의 비율이 80퍼센트인 나라였다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훨씬 나은 결과를 보았으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 개혁정책 성과의 대비가 이런 시차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쪽이 중앙 통제체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사실을 덧붙여도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다. 사회체제와 관계없이 경제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규명되고 있는 동아시아 문명전통으로부터 중국이 얼마나 큰 혜택을 얻었는지 밝히는 것은 21세기 역사가들에게 남겨줄 과제다. (<The Age of Extremes>(Vintage) p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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