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기자 여러 명이 남북협상을 취재하러 평양에 갔지만 통신 여건이 안 좋았는지 그 취재 내용이 잘 보도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경우 4월 27일의 김구 인터뷰와 4월 29일의 김일성 인터뷰가 모두 5월 3일자 신문에 게재되었다. 기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남북협상 보도는 거의 전적으로 평양방송에 의존하고 있었다. 4월 29일자 <조선일보>에 남북협상 진행을 개관한 기사가 게재된 것은 귀환자 인편에 본사로 보낸 것 같다.

 

민족자결주의원칙에 의거한 남북통일정권을 확립하기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는 지난 1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회되어 23일에 폐회되었는데 그간의 종합적인 회의 경과를 회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회의 초일인 19일에는 46개 정당사회단체와 545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월송의 개회선언 애국가 주악이 있은 후 김일성·김두봉·허헌·박헌영·최용건·김원봉·백남운·김달현 제씨를 비롯하여 28명의 주석단을 선거하고 이어 김일성의 사회로 회의는 진행되었다. 위선 각 9명의 대표 심사위원 및 서기부와 7명의 편찬위원을 선출하였다.

 

익일인 20일에는 휴회하고 제2차 회의는 21일부터 재개되었으나 시종 토론으로 끝마치고 제3일째인 22일 12시 28분경에는 한독당 김구를 비롯하여 조소앙·조완구 양 씨와 민독당 홍명희가 우레같은 환호리에 입장하자 곧 4씨를 주석단에 보선하고 이어 김구·조소앙 양 씨의 축사로써 오전의 회의를 끝마치었는데 그 후는 홍명희 이외의 전기 3씨는 최종 회의일인 23일에는 참석치 않았으며 22일에 평양에 도착한 김규식도 23일 회의에 참석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4일째인 최종회의일(23일)에는 김원봉 사회로 조선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에 이어 동 회의의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 및 미소 양국에 보내는 요청서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뒤늦게 참가한 단체 및 대표를 합하여 16개 정당 40개 단체 대표에 의하여 서명되었으며 끝으로 남조선선거를 반대하는 결정서를 통과시킨 후 이어 투쟁위원을 선출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연 4일간에 걸친 남북연석회의는 김두봉의 폐회사로 원만 종막을 고하였다. 한편 측문한 바에 의하면 북조선의 유일한 우익지도자인 조만식은 김두봉으로부터 양차에 걸쳐 동 회의에 참석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였다 한다.

 

지난 19일부터 평양에서 개최되었던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는 그동안 평양방송으로써 남북협상으로만 보도되었으나 그 실은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로 정명(定名)된 것으로 23일의 최종 회의로써 일단 종막을 고하였는데 남북협상에 대한 구체적인 토의는 금후 남북요인회담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5월 1일자에 여운홍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여운홍은 연석회의로부터 미국 측에 보내는 요청서의 전달 책임을 맡아 다른 요인들보다 먼저 돌아와서 남북협상의 진행 상황을 언론에 알렸다.

 

“보라! 협상의 정체, 이래도 자주(自主)인가? - 남선 측 발언 봉쇄, 통일 위한 협상이 아니라 총선거 방해가 목적”

 

유엔위원단의 결의로써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자주통일이라는 명목 하에 남북정치요인회담을 제안한 김구 김규식 양 씨를 위시한 일부 불평정객은 과거 3개년간 전 조선을 적화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의도를 목격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적도(赤都) 평양으로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서울을 떠날 때에는 단시일에 대성공이라도 할 듯이 민심을 자극시키면서 2백여 명이라는 다수가 북행한 지 불과 2주일에 지나지 않은 지난 29, 30 양일간에 김구, 김규식, 최동오, 홍명희, 이극로,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씨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남하하였다.

 

남북연석회담에서 가결한 미소 양국에 보내는 요청서를 미측에 전달하기 위하여 지난 29일 서울에 선착한 여운홍, 정운영, 김성규 3씨의 말을 종합하여 보면 이번 회의는 하등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남북 요인이 일석(一席)에 회합하였을 뿐이며 회의에 있어서 중간파 요인들은 무조건 거수가결하였을 뿐 하등 발언한 일이 없다 한다. 그리고 한동당 계열에서는 동 회의에서 가결된 결정서 중에 3상결정 추진에 대한 조목에 대하여 과거 반탁투쟁을 하여 오던 남조선 측의 주요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동의 날인하였다 한다.

 

그리고 평양에 잔류하고 있는 김구 김규식 양 씨 외 6명은 북조선 측의 김일성 김두봉 양 씨 외 5명 합 15명으로 구성된 남북요인회담을 작 30일부터 개최하였다 하는데 5월 4, 5일경에 남하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결정서를 일방적으로 채택하여 기성사실을 확립한 후 이 원칙에 의하여 협상하는 이상 4김회담이든 수석단회의든 간에 하등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있으며 남북통일을 위한 협상이 아니라 국련총선거 반대를 위한 협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9일 서울에 선착한 여운홍, 정운영, 김성규 3씨는 작30일 기자와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조(曺)씨와에 면회 거부, 귀경한 인사와의 문답 내용”

 

문: 금번 회의의 성과는 무엇인가?

답: 이번 회의는 남조선 단선 단정의 방해운동에 대한 결의가 있었을 뿐이고 현재로 보아 성공하였다고는 볼 수 없으나 남북 요인이 일당에 모였다는 것뿐이다.

 

문: 회의에 통과된 결정서에 김구 김규식 양 씨가 직접 날인하였는가?

답: 양김 씨 자신이 직접 날인하지는 않았으나 한독, 민련이 날인한 것은 사실이다.

 

문: 조만식 씨를 만나보았는가?

답: 면회를 요청했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 측에서 지금 어디 갔다고 하여 면회치 못하였다.

 

문: 회의에서 불만한 점에 대하여 발언한 일이 있는가?

답: 무조건 거수찬성하였으며 발언한 일은 한 번도 없다.

 

문: 평양방송에 의하면 김규식 박사가 대표초대연에서 남조선청년단체를 테러단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답: 그런 말은 일체 한 일이 없다. 그 방송이 모략이다.

 

문: 기초위원회는 어떠한 인사들로 구성되었는가?

답: 북조선 측 대표 11명과 남조선 측은 여운홍, 엄항섭, 홍명희, 이극로 씨 등 4인만이 참가하였을 뿐이다.

 

문: 김구, 김규식 양 씨가 잔류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평양에 잔류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최동오, 엄항섭, 조완구, 이극로 씨 등 남조선 측 요인과 북조선 측 요인 7씨는 금일(30일)부터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고 남조선 측의 5원칙 제안과 북조선 측 제안을 토의할 것인데 이 회의는 약 3, 4일간 계속할 것이므로 5월 4, 5일경에는 남하하게 될 것이다.

 

문: 남북협상축하대회의 광경은 어떠하였는가?

답: 질서 있게는 보였으나 어느 단체든지 앞에 스탈린 사진과 김일성장군 사진을 높이 들고 나오는 데는 불안을 느꼈다.

 

문: 북조선을 보고 그 시정(施政)에 대한 감상은 어떠하였는가?

답: 너무 지나친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는가 하는 감상이 있었다.

 

<동아일보>의 정치적 편향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기사다. 본문 중 “하등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국련총선거 반대를 위한 협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 것이 누구란 말인가? 자기네 주장을 마치 여운홍 등 귀환인사의 의견인 것처럼 꾸며놓았다. 그리고 인터뷰 상대가 3인인 것처럼 설명했는데, <자료대한민국사>에는 거의 같은 내용이 여운홍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으로 <서울신문>과 <조선일보>에는 보도되었다고 한다. 문답 내용 역시 같은 문답임이 분명한데도 <동아일보> 기사에는 자기네 주장을 뒷받침하는 쪽으로 손을 본 것 같다.

 

인터뷰 끄트머리에 나타난 ‘스탈린 숭배’에서는 중간파 참가자들이 문제를 많이 느낀 것 같다. 남북협상을 앞두고 김구를 ‘극우파쇼’로 욕하는 포스터를 길거리에서 서둘러 떼어냈다는 이야기가 있고, 연석회의에서도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회담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스탈린 사진까지 치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북조선 인상, 대표적인 양설(兩說)”

 

남북연석회의에 출석하였던 대표들이 방금 육속 귀환 중인바 대표들이 이구동성으로 언명하는 바에 의하면 북조선은 확실히 건설적이라는 점인데 금번 회담에 있어서 대표적인 양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A씨 담: “북조선은 확실히 건설적이며 질서정연하였다. 공장도 흥왕하였으며 통일정부를 세우려 하는 의욕이 왕성한 점에 경의를 표하였다.

 

* B씨 담: “시위 행렬에 김일성 씨의 사진을 들고 가는 것은 무방하였으나 스탈린 씨의 사진을 들고 가는 데는 수긍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금번 회담에 민족의 영도자 조만식 씨가 출석 못함도 유감이었다. 그리고 회의의 진행을 다수결의를 채택하는 것도 수긍할 수 없었다. 그것은 대표의 수를 여하한 방법으로 선출하였는가 하는 점에서이다.” (<자유신문> 1948년 5월 1일)

 

이 무렵 강용흘이 미국의 한 잡지에 기고한 글 중 조선 남북의 사정을 비교한 대목이 외신으로 전해졌다. <초당>(Grass Roof)의 작가이며 뉴욕대 교수인 강용흘은 1946년 8월부터 1년 반 동안 조선에 체류했는데, 이 글에서는 이북도 방문해서 관찰한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향이 함경도인 저명한 문인으로서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지. 그의 발언에는 정치적 편향성만이 아니라 미국식의 문화적 편향성도 보이지 않는다.

 

“소련지대에는 자유가 없고 식량이 부족하며 세금이 많고 공포심에 싸여 있다. 이는 매우 불호(不好)한 사태이다. 그러나 미국지대에도 동양(同樣)으로 사태는 불량하다. 미국정부는 초연한 태도로 불순 부정 반동적인 조선인 정부가 사실상의 독재권을 장악하도록 방임하고 있으며 이 정부는 인플레를 격화시키고 경찰국가적 수단으로 그의 의사를 강행하고 있다. 소련지대에는 공산당당원 또는 지지자만이 비교적 잘 살고 있으나 남방에서는 인민과 경제가 금전으로 살고 있어 거의 기아상태에 있고 거의 부정부패에 중독되고 있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05월 1일 [뉴욕 30일발 UP 조선])

 

다시 남북협상으로 돌아와서,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남북협상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그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단독선거 추진세력의 입장이 표출된 것이다.

 

연석회의만을 놓고 본다면 “총선거 반대를 위한 협상”이라는 <동아일보> 표현이 틀린 것이 아니다. 평양 측의 연석회의 기획 목적은 이남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자기네 건국노선으로 이남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여운홍의 지적대로, 수백 명이 모인 회의에서 세밀한 토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아예 발언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연석회의의 결과가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의 지도자회담에서는 더 이상 “하등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을까? 서중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948년 4월 연석회의와 요인회담의 두 가지로 열렸던 남북회담은 그 당시 남한의 미군정-극우가 매도하였듯이 또 후세의 여러 학자들이 평가한 것처럼, 북과 소련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속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 남과 북의 언론들이 당파적으로 보도하였고 심한 중상모략과 허위보도 등이 심하여 남과 북의 인민들이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요인회담보다 연석회의가 먼저 열린 데다가 결정서 등이 지나치게 일방적이었고, 그것과 김규식 등과의 관계가 부정확하게 보도되어서 그것이 미친 영향 또는 선입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부분에 대한 연구나 주장은 많은 경우 색안경을 쓰고 이루어져 객관성과 깊이 있는 분석이 약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 224쪽)

 

언론의 편파성은 남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운홍의 인터뷰 중 평양방송으로 전해진 김규식의 발언에 대해 “그런 말은 일체 한 일이 없다”며 그 방송의 모략이라고 했다. 회의기간 중 서울의 남북협상 보도는 거의 전적으로 평양방송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남의 인민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주최 측이 이남 기자들의 통신 여건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양방송에서 이남 요인들이 인사치레로 한 발언을 부풀려 이북 건국노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바람에 발언자들이 곤욕을 치르는 일이 속출했다.

 

대표적 사례가 4월 25일 연석회의 경축 군중대회에서 김규식의 발언이다. 4월 26일 평양방송을 통해 전해진 발언 내용에는 소련의 제의를 중시하고 이북의 상황을 찬양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남 극우파에게 ‘종북주의’로 몰릴 만한 내용이다. 서중석은 위 책 212-215쪽에서 이 발언의 실제 내용을 따졌는데, 따질 근거로 “레베데프 비망록” 제22회(<매일신문> 1995년 2월 23일)에 관계되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료의 형식으로는 평양방송 보도가 더 확실한 것이지만, “레베데프 비망록”은 레베데프가 상급자 스티코프에게 보고한 내용이기 때문에 윤색의 필요가 없는 자료라는 점에서 신뢰성을 가진 것이다.

 

지금이라도 김규식의 진의가 제대로 밝혀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협상파의 민족주의노선이 양쪽의 왜곡과 비방에 뒤덮여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전해지지 못했다. 이북 측은 민족주의노선에 부분적으로 공명하면서도 기존의 자기네 건국노선에 이용하려는 마음이 더 많았고, 이남 극우파는 중간파를 바보(좌익에 속아 넘어가는)나, 나쁜 놈(속으로는 빨갱이)이나 사기꾼(기회주의자)으로 몰아붙였다.

 

협상파는 사면초가의 형세였다. 오른쪽도 왼쪽도 믿을 수 없는 상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인민대중에게 뜻을 전할 길까지 막혀 있었다. 그래도 이남의 총선거 추진세력보다는 평양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노선에 동조해 주는 폭이 훨씬 컸기 때문에 남북협상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4김회담과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거쳐 4월 30일에 발표된 전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은 민족주의자들이 얻어낼 수 있었던 최대의 성과였지만 이 성명 내용은 이남의 언론에 제대로 소개되지도 못했다.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뒤이어 평양시에서 4월 30일에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의 협의가 진행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의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키는 문제와 함께 채택된 양국 군대 철퇴문제와 그 철퇴 실시 후에 당면하는 제 문제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이 협의회에서는 상정된 제 문제를 충분히 토의한 결과 지도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제 문제에 대하여 협의가 성립되었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 조성된 현하 정세 하에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이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 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민주조선의 통일을 원하는 일체 애국인사들은 반드시 양군 철병안을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일제가 우리 조국 강토에서 구축된 이후 우리 조선인민들은 자력으로 외국의 간섭이 없이 우리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도록 장성되었으며, 우리 조국에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간부들이 다수히 있다.

 

2.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인민의 지망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통일을 조성하려는 인민들의 불요불굴한 지망과 남-북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들 간에 성취된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수립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하기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과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4. 천만여 명 이상을 망라한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들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만큼 유권자 수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로 될 뿐이다. 현하 남조선 단독선거가 극히 가혹한 탄압과 테러의 환경 하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다.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정당 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이러한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 219-220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