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평양방송에서 이북 측의 남북회담 제안이 발표된 후 4월 19일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릴 때까지 이남 신문에서는 “남북협상”, “남북회담”, “지도자회의”, “남북 요인회담” 등 용어가 쓰이고 ‘연석회의’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4월 19일의 회의 개막을 보도한 4월 23일자 신문에서 이 말이 처음 나타난 것 같다.
“공산파 주도 하 남북협상 개회”
남북협상에 참석할 남조선 요인들의 북행은 21일까지 끝마쳤는데 21일의 평양방송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양 씨를 비롯한 남조선측의 한독, 민독, 민련 등 중간파 요인들이 참석치 않은 채 19일 모란봉 회장에서 김일성 장군의 사회로 제1차 남북요인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은 북조선 측 요인들과 남조선 민전 계열이 주로 참석하였다 한다.
즉 동 회의에 참석한 정당사회단체는 회의장 왼편에 남로당, 인민공화당, 노동인민당, 민주한독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민중동맹, 전국노동조합평의회, 전국농민총연맹, 민주애국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 문화단체총연맹, 건민회, 건국청년회, 기독교민주동맹, 민주총연맹 등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자리를 잡고 회의장 오른편에는 북조선노동당, 민주당, 청우당, 전평, 농맹, 여맹, 민청, 민애청, 공업기술연맹 등 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리고 연단에는 김일성 장군을 선두로 북로당 김두봉, 남로당 허헌 박헌영, 북조선민주당 최용건, 북조선청우당 김달현, 인민공화당 김원훈, 남조선노동인민당 백남운 등이 참석하여 있었다 한다. 김일성 장군의 개회선언이 있은 다음 이상 연단에 앉은 제 씨의 축사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구 김규식 양 씨가 평양에 도착치 않은 채 19일 회의를 개막한 것은 일반의 이목거리가 되어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3일)
이북 측에서는 이 연석회의를 남북협상의 본 무대로 만들려 했다. 많은 정당-단체들이 참석한다는 점에서 ‘밀실회의’의 느낌을 주는 소수 지도자의 회담보다 넓은 대표성과 큰 공식성을 가질 수 있는 회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합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군중대회 비슷한 이런 회의는 효율적 운영이 불가능하다. 21일의 참석자 자격심사 보고에 따르면 460개 정당-단체의 대표 545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날 때는 참가 대표가 695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김 박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초대소에서 쉬며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협상을 하러 온 것이지 연석회의를 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기는 했지만 나는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여 참석해보았다. 회의는 참석자가 많아 진행상의 필요에 의해 사전에 발언내용이나 순서를 정하고 이에 따라 각 당별로 발언자를 신청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발언을 할 사람은 미리 원고지에 10장 정도로 발언요지를 써서 읽는 형식을 취했다. 발언이 끝나면 박수를 쳤는데, 이렇게 발언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결정서 기초위원들이 최종적으로 결정서 문안을 작성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06쪽)
결정서 기초위원들이 작성한 결정서를 놓고 채택 여부를 회의 마지막에 결정하는 진행 방식이다. 물론 채택 과정에서 다수의 요구가 있을 경우 가감과 수정이 행해질 수도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규모가 큰 회의는 진행 측 의도가 관철되기 쉽다. 그러지 못할 경우 ‘깽판’이 나 버린다.
이북 측은 이남의 ‘가능지역 총선거’ 반대세력을 자기네가 추진해 온 건국노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연석회의를 준비했다. 이남의 총선거 반대세력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 볼 수 있다. 물론 대단히 엉성한 구분인데, 민전 계열을 좌익, 한독당과 민련 계열을 우익으로 보는 것이다. 좌익은 이북의 건국노선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고, 따라서 연석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김구와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우익은 연석회의를 회피했다.
21일의 2일차 회의 경과를 보도한 4월 24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545명의 대표가 “모든 점으로 봐서 남북조선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진정한 애국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자격심사 보고에 이어 오전에 김일성의 보고가 있었다. 오후에는 백남운과 박헌영의 보고에 이어 토의가 있었는데, “북조선의 현실과 남조선의 현실을 대조하고 전 조선 전체가 민주적 건설로 통일한 자주독립을 세워야겠다”는 주장과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파탄시키며 외국군대 동시철퇴하자는 소련군의 제안을 실현”시키기 위한 공동적 투쟁의 제안이 중요한 토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22일의 3일차 회의 경과를 보도한 4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오전과 오후에 모두 토의가 진행되었고 홍명희와 엄항섭을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했다고 한다. 토의 내용으로는 유엔위원단의 철퇴, 단정 반대와 양군 철퇴 등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오후 7시 10분에 토의 종결을 거수가결하였다고 한다. 결정문은 이튿날(23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이어 ‘3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이 채택되었다. 결정문 내용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208-209쪽에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남조선 반동분자들의 협조 하에서 미국 대표가 쏘미공동위원회 사업을 결렬시키고 조선통일을 파탄시킨 이후 미국정부는 조선인민의 대표도 참가시킴이 없이 또는 조선인민의 의사에도 배치되게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 총회에 상정하였던 것이다.
조선인민의 절대다수가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 자체를 단호 거부하고 그 활동을 절대 배격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유엔 소총회를 이용하여 남조선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괴뢰적인 소위 ‘전민족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우리 조국에서 남조선을 영원히 분리하여 미국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기도의 구현이다.
우리 조국에 가장 엄중한 위기가 임박한 이 시기에 남조선에서는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예속화하려는 미국의 반동정책을 지지하여 우리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들이 발호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족적(背族的) 망국노로 낙인함은 물론 그들에게 투항하여 그들과 타협하는 분자들도 단호히 단죄하며 배격한다. 그들의 배족적 망국적 책동으로써 남조선인민들은 초보적인 민주주의 자유까지도 박탈당하였으며, 생활을 향상시킬 아무런 희망과 조건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광범한 창발적 자유를 준 결과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자기가 수립한 인민위원회를 확고히 하여 민주개혁을 실시하며 만족자립경제 노선을 구축하며 문화를 부활시키며 우리 조국의 민족주의적 독립자유국가로 발전될 모든 토대를 공고히 함에 거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의 매국적 기도에 반대하며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의 기만적 선거를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조선인민의 반항을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조국의 절반인 남조선을 미제국주의자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을 용허치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는 자기의 역량을 총집결하여 단선분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남조선 단선 기도를 파탄시키고 조선인민의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협상’의 분위기를 조금도 풍기지 않는 단호한 내용이다. 맨 끝 문단에서 “소련의 제안”이라고 명기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인민의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얘기에 왜 꼭 소련이 나와야 하나? 이 결정문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소련 찬양이 자주독립국가 수립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한독당과 민련은 참가했고, 그 단체명은 결정문의 서명에 들어가 있었다. 왜 그들이 찬성하지 않는 결정문에 한독당과 민련이 서명했을까?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 209-210쪽에서 연석회의 결정문을 둘러싼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결정서초안작성위원회는 북조선로동당의 주영하 김책 고혁 기석복, 남로당의 허헌 박헌영 조일명 박승원, 근민당의 백남운, 사민당의 여운홍, 민련의 권태양, 민독당의 홍명희, 한독당의 엄항섭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초안 작성을 주도한 사람은 김일성 백남운 박헌영 등 보고자와 고혁, 기석복 등이었다. 여운홍 등은 미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에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였고 한독당 대표와 민련 대표 등도 반대의사를 표명하였으나, 같은 기초위원인 박헌영이 이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고 한다. (...) 김구는 왜 제 결정서가 통과되던 연석회의에 나오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당 대표가 서명한 만큼 결정서의 근본취지엔 나도 찬동한다”라고 답변하였다. 백범이 말한 근본취지란 남-북 단선-단정 반대, 외군철수, 자주독립국가의 실현으로 해석된다.
결정서를 읽었을 때 홍명희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벽초는 북행을 하기 전까지 소련과 미국을 동렬에 놓고 비판하였다. 그 점은 4월 21일에 있었던 그와 김두봉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명희: 당신들은 유엔에 조선사람들의 참여가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법이며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도 조선인의 참여가 없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신들은 모스크바회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왜 소련정부의 철군제안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미국에 비해 소련을 더 유리한 입장에 놓으려 하는가?
김두봉: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둔군 철수문제를 제의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다.
홍명희: 물론 그게 사실이다. 그러나 강조할 필요는 없다. (대화 내용은 <레베데프 비망록>에서)
민련이나 한독당의 대표가 서명한 것은 다음의 요인회담을 생각하였을 터이고 회의장의 분위기가 압박한 것이 요인일 수 있지만, 그것을 요식행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낭독한 사람은 서명과 같을 수 없다. 벽초는 이 결정서를 읽었을 때 어떠한 정신적 쇼크를 받지 않았을까? 23일 격문을 읽은 이극로도 남녘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필자는 종종 왜 홍명희가 돌아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는데, 이때 받은 정신적 ‘변화’ 또는 의식의 전이현상이 김일성 특유의 ‘극진한 대접’ 등과 함께 북에 남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5명의 작성위원 중 확고한 우익은 엄항섭 1인뿐이고, 백남운, 홍명희, 여운홍, 권태양 4인을 중간파로 볼 수 있다. (그중 권태양은 좌익의 프락치였다고 동료 송남헌이 회고했다.) 연석회의건 작성위원회건 남로당-민전의 지지를 받는 주최 측 의지가 관철되었고, 그에 대한 강경한 반대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 중간파와 우익은 ‘근본취지’에 반대하지 않는 결정문에 들러리를 서줌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지도자회의’의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그런데 서중석에게는 홍명희의 입장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홍명희는 결정문을 채택한 23일 회의에서 결정문 낭독을 맡았다. 서중석은 홍명희를 “허튼 소리 한번 안 하고 평생 자신이 한 말대로 살고자 했던 점에서 존경받던 선비 중의 선비”로 그리며(같은 책 210-211쪽) 그런 그가 나서서 결정문을 낭독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지 “정신적 쇼크”까지 들먹인다.
나 역시 잘 납득이 가지 않지만 정신적 쇼크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극로가 우리말사전 편찬의 목적을 위해 북으로 와달라는 김두봉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사정을 정재환이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펴냄) 47-61쪽에서 밝혀놓았는데,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문화정책 측면에서 이북의 전망이 이남보다 나았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다. 홍명희 역시 문화정책 수립과 시행에 공헌한다는 구체적 목적을 위해 이북에 정착할 결심을 연석회의 전에 굳혀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자회의의 대가로 연석회의 결정문에 반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북 정착의 대가로 결정문 낭독에 나설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결정문에서 미국 책임을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홍명희가 김두봉에게 말했다지만, 미국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홍명희의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23일 회의에서 홍명희와 이극로, 투철한 민족주의자이면서 이북에 눌러앉아 이북 문화정책에 큰 역할을 맡을 두 사람이 결정문과 격문 낭독에 나란히 나선 것이 그냥 우연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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