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북으로 떠난 김구의 뒤를 이어 김규식도 21일 평양으로 향했다. 지난 13일 경교장 회의 때 김규식이 북행 보류의 입장을 보인 것이(4월 15일 일기) 정말로 안 가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중석은 김규식의 속내를 이렇게 풀이했다.

 

우사가 4월 13일 북행을 보류한다고 밝힌 것은 계산 또는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미군정이나 북행 만류 인사들에 대한 ‘인사치레’일 수도 있었고, 극우에 대한 보호막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우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북행을 보류한다고 발표하고 곧 6개항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강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음날인 4월 14일 민련의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북과 교섭할 5개항을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사는 ‘특사’를 바로 보내지 않고 4월 18일 또는 4월 19일에야 보냈다. (...)

 

남북회담은 민족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것으로, 속이거나 이용당하는 차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회담은 민족자주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차려놓은 잔치상인 연석회의가 아니라, 요인회담을 통해서 5개항을 살리는 방향에서 가능하였다. 요인회담에서는 김규식의 ‘5원칙’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그 뒤에 어느 쪽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에 대한 매서운 준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병마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고, ‘무기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학자형’이라는 얘기를 들어온 우사는 북측과 소군의 의도를 넘어서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한울 펴냄) 197-198쪽)

 

평양 지도자들은 2월 중순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를 받은 뒤 두 사람을 평양으로 부르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바라볼 길이 남북협상 밖에 없었으니까. 자기네 좋을 대로 회의 방식과 내용을 다 정해 놓고 자기네 편리한 시점에서 초청장을 보낸 것도 그 까닭일 것이다.

 

예컨대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내는 김두봉과 김일성의 편지에서 유엔위원단을 당연히 거부해야 할 것처럼 주장했다. 자기네 건국 노선에 따라오라는 것이 담긴 주장이다. 유엔이 그 시점에서 결정해 놓고 있던 ‘가능지역 선거’에 대한 반대가 남북협상의 공통분모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유엔의 전면 거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유엔도 동의할 만한 통일건국의 길을 찾기를 그는 원했다. 그런데 이북 측은 가능지역 선거를 반대하려면 유엔을 전면 거부하는 자기네 입장에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북행의 ‘거부’가 아니라 ‘보류’라는 완곡한 표현을 쓰면서 이북 측의 요구에 무조건 따르지 않을 뜻을 밝힌 것이다. 가능지역 선거 반대라는 공통분모 외의 서로 다른 생각은 모두 서로 존중하며 협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북 측에서 일방적으로 참가 범위와 의제를 정해놓은 ‘연석회의’는 협상의 본 무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했다. 그는 북행 보류 의사표시와 함께 참여 조건 6개항을 내놓았다.

 

1. 북조선이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줄이기 위하여 스탈린의 초상화를 공공기관에서 제거할 것.

2. 평양회담을 예비회담으로 하고 첫 공식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회담에는 관심 있는 모든 정당이 참여할 것.

3. 북조선지역에서는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서 200인의 대표를 선출한 남한의 대표들과 회합할 것.

4. 북조선은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의 최소한 1인 정도를 선거 감독을 위해 초청할 것.

5. 평양 혹은 서울회담은 독립실현의 방법만을 토의하며, 헌법의 채택, 국가의 명칭, 국기의 선정 등이 토의되어서는 안 됨.

6. 미-소 양군의 공동철병에 관한 선전이 중지되어야 함. 군대철수의 조건에 관하여 미-소간에 회합을 갖도록 소련 측에 요구함.

 

제3항을 보면 남조선에서 200인의 의원 선출을 목표로 유엔위원단이 추진하고 있던 ‘가능지역 총선거’를 그대로 추진하게 하면서 그 의미를 ‘정부 수립’이 아니라 독립 실현 방법의 토의를 위한 남북회담 대표 선출로 후퇴시키자는 것이다. 유엔위원단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남북협상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뜻이다. 제4항에서 이북 대표를 뽑는 데 유엔위원단이 참여하게 한다는 것도 같은 뜻이다.

 

4월 14일 민련 정치-상무 연석회의는 이 6개항을 검토하고 4개항으로 수정했다. 김규식이 21일 출발에 앞서 발표한 ‘협상 5원칙’은 이 4개항에 끝의 한 조항을 보탠 것이었다.

 

“북행 앞서 김 박사 성명”

 

김규식 박사는 북행 당일인 21일 북행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 민족은 지금 불행히도 국토 양단과 동족 분열의 위기에 임박하였다. 우리의 힘으로써 얻는 해방만이 진정한 해방이요, 우리의 손으로써 이루는 통일만이 영원한 통일이라는 데서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북조선 동지들은 우리의 제안을 접수하였다. 그러한 견지에서 남북 정치협상에 대하여 과분의 기대도 조계(早計)이나 비관적 우려도 불필요한 것이다. 나는 오직 남북 정치지도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성의껏 협상 토의하는 것만이 통일단결의 기본공작이라는 신념에서 북행을 결정하였다. 남북협상은 연합국 간, 특히 미-소 양국의 협조 위에서 통일건국을 완수할 방안을 찾을 것이요, 친미반소 혹은 친소반미의 착오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 나는 5개 원칙을 주장하였다.”

 

“협상 5원칙”

 

우리는 안으로 민족의 통일을 성취시키고 밖으로 연합국의 협조를 통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함.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치 말 것.

5. 미-소 양군 조속 철퇴에 관하여서는 먼저 양국 당국이 철퇴 조건 및 기일 등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을 주장할 것. (<경향신문> 1948년 4월 22일)

 

애초 김규식이 제안한 6개항이나 민련 회의에서 수정한 4개항이나 기본 취지는 같은 것인데 표현에 있어서 ‘최대주의’와 ‘최소주의’의 차이를 가진 것이다. 애초의 6개항은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것이었다. 김규식은 6개항의 적극적 표현을 이미 내보낸 이상 공식적으로는 표현을 극도로 완화한 수정 4개항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둔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원래의 주장을 최종적인 ‘5원칙’에 끼워 넣었다.

 

4월 14일 개회로 애초에 제안되었던 연석회의는 4월 19일로 연기되어 열렸다. 이북 측에서는 이것이 남북협상의 주 무대로 기획된 것이었기 때문에 김구와 김규식의 도착을 더 기다릴 수 없었고, 따라서 이남 측에서는 거의 민전 계열 대표만이 참석했다. 김구가 19일 오후에야 출발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일성의 제안으로 20일은 휴회하고 21일에 제2일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17-18일에 김규식이 보낸 연락원(권태양과 배성룡)이 알려준 대로 ‘5원칙’을 수락한다는 뜻의 암호방송을 19일 밤 평양방송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김규식은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빨리 오시기 바랍니다.” 하는 이 방송을 듣고 나서 20일 민련 간부회의를 소집, 21일 출발 방침을 확정했다고 한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 200쪽)

 

이북 측은 김구의 참석을 종용하기 위해 20일 연석회의를 휴회까지 했다. 그러나 20일 오후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에야 회의장에 인사차 들르기만 했다. 서중석은 <레베데프 비망록>의 이 장면 서술을 위 책 204-205쪽에 인용해 놓았다.

 

김구: 나는 김일성과 단독회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김일성: 근본과업은 독립에 대한 위협이다. 당수는 회의에 꼭 참가해야 한다.

김구: 나는 주석단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런 곳에 참석하는 것은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 나는 단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 단독회담에서 우리가 당면한 긴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김규식이 제안한 전제조건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김규식이 한 것이다.

 

다음날(4월 21일) 김구는 김일성과 다시 얘기할 기회를 가졌다.

 

김일성: 만일 당신이 연석회의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김구: 나는 정치범 석방, 38선 철폐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 내가 어떻게 총선거를 실시하는 데 동의하는 서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 당은 비합법적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김구는 22일 연석회의장에 인사하러 들렀다가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와 함께 주석단에 추가로 선임되었다. 한편 22일 새벽 평양에 도착한 김규식은 연석회의가 끝날 때까지 회의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각과 스타일에 큰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 입장을 평양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데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보 방식이 어울려 효과적인 ‘콤비’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중경에서 몇 해 동안 주석과 부주석으로 어울리던 가닥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지난 1월 말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으로 나서자 그를 영수로 모시던 극우파가 극한적 비난으로 표변했다. 2월 1일부터 5일까지 5회에 걸쳐 ‘김희경’이란 이름으로 <동아일보>가 연재한 글 “김구 선생님에게 올리는 글월”이 대표적 사례다. 이 글에 김구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역사에 남은 비장한 글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2월 10일) 중에서 “xxxx는 xxx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고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1월 28일자와 2월 11일자 일기)

 

4월 19일 김구의 경교장 출발 때 학생들이 몰려들어 가로막은 장면에서도 학생들이 김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왔는데, 막상 그 장면에 대한 보도 내용을 찾아보니 김구를 존경하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분명했다. 지금까지 반탁운동에서 ‘극우’ 성향을 보여 온 세력 중 일부만이 이승만-한민당의 단독건국 추진 노선을 따라가고 일부는 김구를 따라 민족주의 입장을 지킨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청년층에서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4월 20일 노농학생총연맹의 남북협상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두드러진 것이 4월 23일 서북학생총연맹(서북학련)의 지지 성명이었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21일, <조선일보> 1948년 4월 25일)

 

서북학련은 서북청년회(서청)와 연계된 학생조직으로 ‘이북학련’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1947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서북학생총연맹 결성 기사가 실렸는데 제목이 “이북학련을 결성”으로 되어 있다. <8-15의 기억>(문제안 외 39명 지음, 한길사 펴냄) 350-359쪽의 채병률 회고 “왜 빨갱이가 사람 죽인 얘기는 안 합니까”가 서북학련 활동을 서술한 것이다. 애초에는 단체등록을 안한 채로 ‘서북학련’, 또는 ‘이북학련’으로 불리는 이북 출신 학생들의 조직이 있다가 이 시점에서 결성식을 갖고 등록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여름 이청천의 대동청년단으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서 서청은 합동파와 독립파로 갈라졌는데, 서북학련은 독립파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대동청년단은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을 발표할 때 이승만에게 줄을 섰다.

 

“이청천 장군 이 박사 방문 - 대청, 남조선 선거 지지”

 

대동청년단에서는 지난 27일 상오 11시부터 본회 회의실에서 27일의 유엔 소총회의 가결에 대하여 긴급 상무회의를 개최하고 신중히 토의한 결과 이청천 단장 이하 참석 전원이 소총회 결의안을 지지할 것을 표명하였다 하는데 앞으로 그 준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금 29일 다시 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선거 실시에 대한 구체안을 토의 결정하리라 한다.

 

그리고 작 28일 상오 11시 이청천 장군은 이화장으로 이승만 박사를 방문하고 유엔 소총회의 결의안대로 남조선 총선거 실시에 대하여 장시간 요담하였다 한다. 그런데 종래 동 청년단은 김구 씨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오던 것인데 금반 이러한 태도로 이청천 단장 이하 단원들이 김구 씨의 노선과 상위되는 취하게 된 것은 일반의 이목을 끌고 있는데 동단 부단장 이성주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종래 김구 선생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왔는데 현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남북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선거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29일)

 

이청천은 며칠 후 독촉국민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동아일보> 1948년 3월 4일) 다시 보름 후에는 부위원장으로 뽑혔다.(<동아일보> 1948년 3월 27일) 그리고 5-10 선거에서는 성동구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년 전 이승만의 귀국 길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면서부터 그의 진로는 결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한편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은 정치적 움직임을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단건국 노선은 아직 극우파를 석권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구의 지도력은 아직 살아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