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선거인등록과 함께 후보자등록도 시작되었다. 후보자등록은 4월 15일 마감이다.(실제로는 16일 마감으로 늦춰졌다.) 일사불란하던 선거 추진세력에서 후보자등록 시작과 함께 잡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난립 방지 대책 애련서 검토”

 

민족진영애국단체대표자 정기회의는 6일 오후 2시부터 이화장에서 소집하고 현재 총선거한 후보가 난립하고 있는 데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하는데 총선거를 반대하고 있던 중간파에서 선거방해공작으로 출마할 동향을 보이고 작금의 국내정세에 있어서 입후보 난립 방지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8일)

5월 10일 시행될 남조선총선거는 일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시키고 있거니와 경향을 막론하고 입후보 난립으로 상당한 혼전이 예상되고 있다.

 

즉 금반 선거를 지지하는 한민, 독촉계열에서는 입후보 난립 방지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왔으나 지금까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선거구에서 정치노선 및 소속당을 동일히 하는 인물이 4, 5인 이상 난립출마하게 되어 정당 수파의 통솔규범의 문란해지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는바 금반 입후보 난립을 계기로 당시(黨是)에 불만을 표시하는 인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거완료 후에는 탈당소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입후보등록 마감까지는 정원 200명에 대하여 평균 5배에 달하는 입후보등록이 예상되며 여전히 기성 지반을 가진 인물들이 유력할 것으로 정계 옵서버는 보고 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10일)

 

붕당론(朋黨論)은 의(義)로 뭉친 붕(朋)과 리(利)로 모인 당(黨)을 구분한다. 의로 뭉치면 물처럼 담담하나 화이부동(和而不同)이 되고 잇속으로 뭉치면 꿀처럼 달콤하나 동이불화(同而不和)에 빠진다고 했다. 총선거 추진세력이 단결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이익을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선거가 이뤄져 그 과실을 따먹게 되자 모두 제 입에 넣어야겠다고 날뛰는 상황이 바로 벌어진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총선거 추진세력을 망라해 구성한 애국단체연합회(애련)가 교통정리를 하러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입후보 난립에 애련(愛聯)서 공인후보제”

 

애국단체연합에서는 6일 하오 2시부터 이화장에서 정례 화요회를 열고 입후보 난립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내 15일 입후보등록이 완료된 후 애련으로서의 공인후보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9일)

 

회의 장소가 이화장인 것만 보더라도 애련에 대한 이승만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후보자 난립을 자기 영향력을 넓히는 기회로 이용하기 바빴던 모양이다.

 

“이 박사 추천 가칭하는 입후보자 허설에 속지 말라”

 

요즘 각 지역에서 출마하고 있는 일부 입후보자들이 이승만 박사의 찬의와 물질의 원조를 얻어 입후보를 하여야 한다는 등 구구한 풍설이 들리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하여 작 14일 이승만 비서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최근 경향 각 지역에서 입후보관계로 말미암아 허무한 풍설이 유포되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이 박사께서 자기를 추천했다든가 또는 물질적 원조를 하여준다는 등 갖은 선전을 하고 다니는 일부 인사가 있는 모양이나 이 같은 것은 사실 무근인 고로 앞으로 이 같은 허설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곧 비서실까지 연락하여 주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5일)

 

허설(虛說)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진설(眞說)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승만의 낙점을 받는 것이 당선의 첩경으로 총선거 추진세력 안에서는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물질적 원조’ 얘기까지 나온다.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이승만이 수천만 원의 정치자금을 움직인 사실을 밝히는 데 큰 노력을 들였다(제13장). 이 연구를 통해 이승만이 정치자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밝힌 것은 대단히 의미가 큰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최소 2천7백만 원, 최대 5천2백만 원”(606-609쪽)이라고 밝힌 것은 ‘최소한’의 의미로 이해해야겠다. 정치자금은 속성상 완전히 밝혀내기 어려운 것이고, 밝혀낸 자금원 목록을 보더라도 성공적으로 감춰진 것이 적지 않음이 분명하다. 5-10선거와 관계된 정치자금의 움직임이 별로 밝혀져 있지 않은데, 위 기사를 보면 상당액이 이승만을 통해 움직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은 애련뿐 아니라 독촉국민회를 통해서도 입후보 조정에 개입하고 나섰다. 개입의 명분은 중간파의 위협이었다.

 

“후보 난립 경고, 독촉 선전부 담화”

 

독촉국민회 선전부장 양우정 씨는 13일 입후보난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동일한 정강정책을 가진 정당이 난립한 것과 같이 한 당에 속한 인물이 2인 이상이 한 구역에서 출마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며 그들의 양심을 묻고 싶다. 그리고 총선거를 반대하는 중간파가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웃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라면 정치적 목표가 있어야 할 것인데 조선의 중간파는 기회주의로 민중을 위만(僞瞞)시키고 있으므로 민중은 이러한 독립을 방해하는 자에게 대하여서 투표를 보이콧하여 그들의 책동을 분쇄하여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4일)

 

“입후보 난립에 독촉국민회서 경고”

 

독촉국민회 선전부에서는 15일 입후보 난립을 경고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반 총선거 출마에 있어서 국민회 동지들은 1구에서 1인 이상 출마하지 말고 호상 양보하여 독립운동자로서의 진실한 정신을 일반에게 시범하여야 할 것이며 동지 상쟁을 말고 모리배 정치부로커 기타 조국을 송두리째 합리적으로 타국에 매도하려는 공산당 및 중간파의 모략출마자와 상대로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니 국민회 동지들은 우리가 여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만을 위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싸워온 우리의 투쟁역사를 회고하고 또 그 정신을 살려서 앞으로 닥쳐올 독립의 방해자와 더욱더 치열한 투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각오하고 동지간의 단결을 더욱더 도모하여 독립을 힐락질하는 방해자와 싸울 전투계획을 계속하여 준비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기회주의! 중간파를 매도하는 전가의 보도가 나오지 않을 리 없다. 선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후보로 출마하다니, 표리가 부동한 것 아니냐는 시비다. 이 비난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Wikipedia>에서 “opportunism”을 찾아보았다.

 

“원칙을 무시하면서,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결과를 살피지 않으면서 상황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의식적으로 취하는 태도와 행동”이라고 기본 정의가 되어 있다. 일관된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기회주의의 기본 요건인 셈이다.

 

중간파가 내세운 원칙은 민족주의다. 선거 반대는 민족주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선거를 반대하더라도, 그 반대에 불구하고 선거가 시행될 때는 선거 참여가 민족주의 실현을 위한 차선책이 될 수 있다. 선거 반대가 원칙인 것처럼 뒤집어씌워 중간파의 참여에 도덕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트집을 잡는 것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후보로 나서는 것이 개인적 이득의 추구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국회의원 되는 것을 개인적 이득으로 본다면 중간파 노릇 하는 것보다 이승만 꽁무니 따라다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가 몇이나 있었을까? “opportunism”에 대한 꽤 긴 설명을 훑어보니, 아무래도 중간파보다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중간파-한독당의 저명인사 중에는 아무리 ‘기회주의’ 딱지를 붙이려 해도 일반인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인물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딱지를 붙여보려고 들고 나온 것이 “선거 방해공작”이었다.

 

“한독당과 중간파, 무소속으로 입후보”

 

중간파와 좌익의 선거 방해공작을 목표로 한 선거 출마는 16일 입후보자 등록마감으로 보면 예측한 바와 같이 그들은 무소속이라는 가명을 쓰고 출마하여 후보 난립상태에 빠진 민족진영은 낙관을 불허하는 현상에 있다.

 

그런데 금반 총선거입후보에 특이한 현상은 과반 중집회의에서 선거에 참가하지 않기로 한 한독당이 중앙당원은 물론 각 지방도지부장이 무소속 내지 개인자격의 명칭 하에 출마한 것인데 당 결의를 준수하는 조건하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지 않고 당을 이탈하게 된다면 한독당 지방조직에는 장차 상당한 동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1일)

 

예나 지금이나 선거철은 언론의 계절이다. 동아일보는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뛴다. 4월 24일자 사설을 “호양 없이는 민족진영 자멸 - 단일후보 선출 시급 - 난립에 우익 공선제 실시”로 내보내 교통정리를 재촉하고, 수시로 ‘후보 단일화’를 찬양하고 나선다.

 

“중간파 입후보로 장흥 손 씨 기권”

 

전남 장흥군에서는 민족진영 측에서 고영완 손석두 양 씨가 입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그 난립을 이용하여 중간진영의 김중기 씨가 출마하여 중간파와 좌익의 협조를 얻어 민족진영의 당선이 우려되던 바 손석두 씨는 자진하여 자기의 투표 지반을 동지 고영완 씨에게 일체 양보하여 후보 난립 방지에 좋은 모범을 떨치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1일)

 

“일부 양심인사 입후보를 포기”

 

입후보 난립은 의사를 동일하게 하는 자파 진영의 자멸을 초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 3년간이나 조선 민주독립을 목표로 투쟁한 성과까지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는데 과반 애국단체연합회의에서 입후보 난립 방지책을 결정한 후 점차 양심적 입후보자는 자진하여 후보를 포기하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7일)

 

4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구체적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기사는 제목대로 내보내고 싶은데 팩트가 채워지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결국 4월 16일까지 200개 선거구에 936명이 등록했다.(4월 25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될 때까지 사퇴한 몇 사람을 제한 숫자임.) 정당-단체별로는 대한독립촉성회 239, 한국민주당 91, 한국독립당 7, 여자국민당 2, 대동청년단 88, 민족청년단 21, 대한노총 22, 무소속 412, 기독교 10, 불교 5, 유도회 4, 청우당 1, 기타 34명이었다.

 

독촉국민회 소속 후보만도 선거구 수보다 많고, 한민당-여자국민당-대청-족청-대한노총 등 우익 정당-단체를 모두 합치면 거의 절반인 463명이다. 무소속 412명 중에도 그쪽 경향 후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총선거 추진세력은 후보 난립을 막는 데 실패했다. 그 최고지도자 이승만부터 자기 영향력을 키우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니 총선거의 열매를 따먹으려는 각개약진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후보등록 과정에서 일어난 파문 하나를 소개한다.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있으면서 조병옥-장택상에게 대항하다가 1946년 12월 파면당했던 최능진이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하려다가 등록이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 옥신각신한 일이다. 5-10선거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므로 한 번 세밀히 살펴볼 일인데, 우선 그 발단만 소개해 둔다.

 

“최 씨 등록 연기 접수는 선거법 위반 아닌가 - 시(市)선위 조치에 비난 자자”

 

딘 군정장관이 직접 임명한 국회선거위원회에서 제정한 선거법에 의하면 16일까지 선거등록 마감을 하여야 할 것인데 동대문갑구에는 등록마감까지 이승만 1인이 등록하였을 뿐이었고 등록마감 직전에 최능진 씨가 소위 이 박사를 지지하는 청년들에게 추천서를 탈취당하였다고 하여 불충분한 추천서를 가지고 등록하려고 하였으나 동대문구 선위에서는 신성한 선거법을 준수하는 의미 하에서 동 씨의 등록접수를 거절하였던바 최 씨는 소위 자유분위기를 방해하였다는 조건하에서 당국과 교섭 중이던바 서울시 선위에서 동 씨의 등록을 21일 오후 7시까지 연기하여 동 씨는 20일 오후에 등록수속을 완료하였다는데 이에 대하여서 비난이 분분하다고 한다.

 

즉 동 씨는 이 박사를 지지하는 청년들에게 추천서를 탈취당하여 자유분위기를 방해하였다는 것은 하등의 근거와 증거가 없는 말이며 또 엄정하고 신성한 선거법을 최능진 일개인을 위하여 등록마감 후 116시간이나 연기한 서울시 선위의 조치는 자유분위기를 역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하여튼 자유분위기를 역용하려는 일개인 때문에 독립정부수립을 목표로 제정된 선거법을 위반한 데 대하여서 비난이 자못 크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2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