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8일 일기에서 ‘고쟁생(苦諍生)’이란 필명의 경향신문 논설을 소개했다. 2월 3일자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3영수 협의론”이었다. 유엔의 성격과 한계에 대한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 글이었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명석함과 논리의 정연함이 극우파의 선전 문서와는 다른 수준으로 보였다.

 

경향신문은 4월 7일에서 15일까지 7회에 걸쳐 다시 고쟁생의 논설 “총선거의 환경과 태세”를 연재했다. 제목과 달리 내용의 절반 이상이 남북협상 비판에 쏠려 있고 2월의 연재에 비해 필자의 정치적 입장이 견강부회의 느낌이 들 정도로 분명해졌다. 극우파 선전 문서에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다른 선전 문서보다 역시 수준이 높아 극우파의 남북협상 비판 논점을 살펴보는 데는 좋은 참고가 된다.

 

4월 7일자의 제1회 “총선거의 의의를 명패하자”의 요점을 담은 문단을 옮겨놓는다. 이번 총선거가 “우리 역사상 일찍 없었던 장거(壯擧)요 민족의 영예”라는 것이다.

 

“인민을 위한 정부를 인민의 손으로 인민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근세민주주의의 원칙이요 그러하기 위해서는 선거에 의하여 인민의 진정한 대표를 선정하고 이로써 국회를 구성하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 국가 형성의 필수적 조건이라는 것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미 공민적 상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내 5월 10일로 실시할 총선거는 40년간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의 자주권을 누리게 된다는 점이 더욱 중대하고 광영스러운 의의를 지녔다는 것을 명패(銘佩)하여야 할 것이다.”

 

4월 8일자의 제2회 “선량이란 어떤 것인가”에서는 선거의 의미에 대한 기술적 설명에 이어 “법률적 기술가나 경제적 시정배”보다 “민족정신과 문화의 전통에 통효한 대사가(大史家)”를 비롯한 학자들이 많이 뽑히기 바란다는 희망을 적었다. 아직도 ‘고쟁생’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런 대목을 보면 경륜을 지닌 학자를 자처하며 현실정치에 나서고 싶어 하던 안호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4월 10일자의 제3회 “남북협상이란 이북(以北) 독백(獨白)”에서부터 연재의 원 제목을 떠나 남북협상 비판에 뛰어든다. “상서롭지 못한 사례가 비일비재한바 자못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꺼낸 얘기가 중간파 비판에 이르면 궤변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한 이념의 진리성 보편성으로 보아서 1 이상이 될 수 없고 중간항을 개입시킬 여지도 없는 것이며 구합(苟合)과 타협도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규식 씨나 김구 씨는 일찍 통일 이념을 발표한 일이 있는가. 김일성 장군이나 김두봉 씨는 따로 발표한 것이 있단 말인가. 설혹 통일 이념은 남북협상에서 작성할 것으로 미루어 본다 할지라도 협상의 내용이라든가 토의할 문제를 언제 이남 동포에게 제시한 일이 있는가. 여론에 부쳐 본 일이 있는가. 그것도 정당이나 어떤 단체의 공리적 타산에서라면 구태여 물어볼 것도 없겠지마는 일이 민족의 장래 대계에 걸린 만큼 거사하는 편은 민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고 그것의 지지 여하를 결정할 민중은 그것을 주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필자의 요량 같아서는 양김 씨와 여외의 지지 명사들도 통일 이념, 협상 내용과 방안에 대해서 하등 성안(成案), 하등의 자신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이념의 순수성을 강변하는 데서 다시 안호상 생각이 난다. 그리고 ‘통일 이념’을 민중에게 발표한 일이 없다고 트집 잡는 것을 보면 고쟁생이 생각하는 ‘통일 이념’이란 민족주의 얘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절충과 합작은 “진리성과 보편성”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전제다.

 

4월 11일자의 제4회 “막부(莫府) 결정의 고집”에서는 이념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 영역으로 내려온다. 김구와 김규식 등 협상파가 협상에 나서는 순간 이남 대표 자격을 잃어버린다는 기발한 논리가 고쟁생의 현실 인식을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고쟁생에게는 해방 당시 임정 주석과 부주석이라는 상징성에 아무런 현실적 의미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초청을 받은 이남 인사는 하등의 선임방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이북 인민위원회의 독단으로 지정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으니 첫째 협상할 인민 구성방법부터가 협상적이 아니고 독단적이요, 더구나 지정받은 면면이 태반 좌익 측이요, 이여(爾餘)라 했자 중간적 회색파, 기회주의자, 180도적 전향자들뿐이니 언어도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지명받은 면면이 현재 이남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남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이곳 이남의 대표가 된다면 지명받은 그들이 이북으로 넘어가서 잠깐이라도 거주하더라도 이 사실만으로 그들을 이북인이라고 규정해야 합당할 것이 아닌가.”

 

4월 13일자의 제5회는 “통일의 길은 총선거뿐”이란 제목을 걸었는데 그 결론의 근거인즉 “이북 인민위원회의 초청 인사나 제시한 협상 내용 그대로의 회담이라면 이것은 남북협상이 아니라 이북 단독회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구 씨 김규식 씨가 유엔결정을 반대한 이상 벌써 이남의 대표 될 자격이 상실되었으므로 이북 대표로 쳐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 결정 반대면 이남의 대표 될 자격이 없다? 안호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파시스트 화법이다.

 

4월 14일자의 제6회 “협상 실패면 하면목(何面目)?”에서는 목전의 선거가 단독선거가 아니라 “가능한 지역에서만 실시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북이 먼저 “민주인민공화국”으로 단독정부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엔 주관의 총선거가 “현재에 부여된 유일한 독립노선”이며 이 총선거가 전 조선에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누구냐고 따진다.

 

4월 15일자의 마지막 회 “선거 반대는 방해”에서는 소피스트 논법까지 구사한다. 선거의 개인적 기권도 내란죄로 몰아붙일 수 있는 논법이다.

 

“남북협상파 그 명류(名流)가 이번 선거는 반대나 방해는 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나 일언이폐지하면 개념 유희에 불과하다. 반대가 소극적이라면 방해는 적극적이라 할 것이니 반대는 소극적 방해요, 방해는 적극적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는 하나 방해는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간휼한 농사(弄辭)요 무언(誣言)이다. 반대가 극하면 방해가 되는 것은 소-적이 원래 2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일호일흡(一呼一吸)이 2원 아닌 것과 일반이다.”

 

고쟁생의 논설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꾸민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회 마지막 문장에서 마각을 드러내고 만다.

 

“필승이 기대되는 이번의 선거가 만일에 실패하여 군정이 조금이라도 연장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반대한 협상파와 파괴하는 남로 계열 내지 이북 인민위원회의 책임이라는 것을 자타가 다 같이 명기하여야 할 것이다.”

 

누구의 필승이 기대된다는 말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좌익에 대한 우익의 필승, 아니면 선거 반대세력에 대한 추진세력의 필승. 2월 초순의 “3영수 협의론”과 달리 이번 연재에서 고쟁생은 총선거의 필승을 제창하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그의 면목을 드러냈다.

 

고쟁생의 논설을 통해 협상파에 대한 극우파 공격의 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당시의 협상파는 지뢰밭을 걸어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극우파는 정신없이 짖어대고 있었고, 미군정은 말리지 않겠다며 팔짱을 끼고 서서 넘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중에서 남로당은 좌우합작 때부터 중간파를 적대해 왔다. 희망을 걸 곳은 평양의 지도부뿐인데, 그마저도 마음 놓고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3월 하순 평양에서 온 메시지는 2월 중순에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단순한 화답이 아니었다. 오고간 편지 내용의 공개를 결정하는 데도 며칠의 시간이 걸려 3월 31일에야 협상파의 입장이 정리되고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의 ‘소감’이 발표되었다. ‘담화’도 ‘성명’도 아닌 ‘소감’이라는 데서 협상파의 입지가 궁색함을 새삼 느낀다.

 

“독설연(獨設宴)에 참례 격 ‘그러나 청했으니 가야지’ - 초청장 받은 양김 씨 감회”

 

남북정치회담에 대한 초청장을 받은 김구 씨와 김규식 박사는 31일 이에 대한 소감을 경교장에서 양김 씨 명의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제1차 회합을 평양으로 하자는 것이나 라디오방송 시에 남한에서 여하한 제의가 있었다는 것을 아니한 것을 보면 제1차 회담도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의아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회담 요구를 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 가는 데 있어서는 먼저 내왕수속 절차와 그 방면에 예정해 놓은 프로그램 여하와 남쪽대표의 신변보장 및 1차 회합에 성공치 못한다면 2차 3차 내지 10여 차까지도 기어이 남북통일을 쟁취할 의사 유무까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3. 북조선에서 지명한 15인 이외에도 누락된 정당이나 개인이 많이 있으니 어떤 정당 어떤 개인을 증가할 것을 접흡(接洽)할 것.

4. 이러므로 우리의 생각에는 먼저 그쪽에서 지명한 남쪽 인원끼리라든지 혹은 이에 찬동하는 정당 단체 개인만이라도 속히 집합하여 일체를 상의한 후 연락원 약간인을 택하여 일부 연락원은 38이남 내왕에 관하여 당국과 연락을 할 것.

5. 일부 연락원은 북조선에 가서 이상 일체를 접흡할 것.

아직은 이상만이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일)

 

평양 측의 일방적 회담 기획은 극우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있었을 뿐 아니라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협상파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위 소감 중 제1항에서 “다 준비한 잔치”라며 불만의 뜻을 표했고 제2, 제3항에서 기획 내용의 조정 희망을 비친 것이었다. 조정을 위해서는 연락원 파견이 필요했다. 4월 5일 여운홍이 하지 사령관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고 하지는 “일체 북행에 대한 편리는 원조하지 않으나 방해도 않겠다.”고 대답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7일)

 

김구와 김규식의 대리인 격인 연락원으로 안경근과 권태양이 4월 7일 서울을 떠나 8-9일 간에 김두봉과 김일성 등 평양 측 요인들을 만나고 10일에 돌아왔다. 민전과 근민당에서는 6일에 연락원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는데,(<조선일보> 1948년 4월 8일) 한독당과 민련은 미군정에 진행을 알리면서 공개적으로 연락원을 보낸 것이다.

 

“백지로 돌아가자 - 양김 씨, 북조선에 제안 내용”

 

남북협상 운동은 지난 10일 양김 씨가 파견한 북조선 연락원의 귀환으로 일층 활발한 동향을 보이게 되었다. 즉 양김 씨가 북조선 측에 제안한

 

(1) 4-14회담을 연기할 것,

(2) 참가 인원을 광범위로 할 것,

(3) 금반 예비회담에서는 백지로 환원하여 남북통일 문제에 한해서만 협의할 것

 

등 조건을 전적으로 수락하게 되어 쾌속도로 협상 공작은 진척중인바 정계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16,7일경에 양김 씨 측 인물이 북행하여 20일경에 예비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3일)

 

그런데 4월 13일 김규식이 북행을 보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연락원이 전한 평양 측 반응에 불만을 갖고 회담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남북회담에 암운(暗雲) 저미(低迷) - 김 박사 행동보류, 김구 씨 등만 북행 결정”

 

연일 경교장에서는 양김 씨를 비롯하여 홍명희 유림 이극로 엄항섭 등 제 씨가 회합하여 지난 10일 귀경한 안·권 양 연락원의 보고를 기초로 하여 남북협상에 대한 북조선의 진의를 파악하고저 부심하고 있는데 지난 13일에는 오후 4시경부터 동 장소에서 양김 씨를 중심으로 북행 여부를 토의한 결과 김구 씨는 북행을 결정하였으나 김규식 박사는 행동을 보류하고 추후로 떠나겠다고 언명하여 항간에는 구구한 풍설이 유포되고 있는데 가장 신빙할만한 정계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북협상의 전망과 김규식의 북행 보류에 대하여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1) 이번 남북협상을 통하여 북조선에서는 UN반대의 구체안을 짤 것을 제의하고 이를 주장할 것이나 김 박사의 본의는 민족적 입장에서 남북이 통일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자는 데 있다. 즉 전자는 좌익 본위 투쟁 위주의 자아 확집이요 후자는 민족적 입장에서 출발한 모든 외교절충까지 포함한 것이다.

 

(2) 10일 현재까지 동 회담에 참석차 북행한 남조선 좌익대표는 남조선민전 산하단체 대표만 65명이나 민련 산하단체에서는 불과 10명을 초과하지 못하고 한독당 대표 5명을 합하여 비율적으로 볼 때 회의 전도에 커다란 암영이 없지 않다는 것.

 

(3) 회의가 진행되면 반드시 남북주둔 미소 양군의 철퇴까지 상정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인데 양군 철퇴를 결의한다고 가정하면 진공상태의 치안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남북 현재의 군사단체 반 군사단체의 해체문제는 어떻게 귀결짓겠는가?

 

상기 3 중요 문제에 대한 확고한 결정을 짓지 못한 까닭에 김 박사는 북행을 보류한 것이라는데 오는 20일경 평양에서 열릴 남북요인회담의 전도는 벌써부터 비관시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3일)

 

바로 이튿날 김규식도 역시 평양에 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분위기가 개운치 않다. 민전에서는 남로당, 전평, 전농 등 산하단체 대표 70명이 4월 9일까지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고 12일에 발표했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14일) 머릿수만 갖고 결의를 도출하려는 회의라면 민련의 중간파는 들러리 서는 꼴밖에 안 된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동맹 상대인 김구마저 남북협상의 목적에 대해 김규식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민련 권고로 김 박사 북행?”

 

평양에서 개최될 남북요인회담에 김구 씨는 자신이 직접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김규식 박사는 참가를 보류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 있었는데 김규식 박사도 14일의 민련 정치-상무 연석회의의 결의와 측근자의 권고로 자신이 직접 참석키로 결정하였다 한다. 그런데 지난 13일 하오 1시부터 경교장에서 개최된 회합에서 김규식 박사는 금번의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본회의는 서울서 개최할 것과 유엔조위의 북조선입경을 허용하여 남북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토록 북조선 측과 교섭할 것 등 4개 조건을 제시하였던 바 김구 씨는 이에 반대하고 유엔조위와의 관계는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여 양김 씨 간에 약간의 의견대립이 있었다 하며 김 박사는 동 회합에서 불참할 것을 표명한 바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 박사는 참석 여부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어 앞으로 취할 동 박사의 태도가 또한 주목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6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