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8. 12:11

민들레출판사에서 메일이 왔다. <바보 만들기> 6쇄 인세를 송금했다고. 덧붙인 말에 쓴웃음이 떠오른다: "책이 죽지 않고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육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존 테일러 개토의 <Dumbing Us Down>은 생계를 위한 번역의 첫 책이었다. 대학을 떠난 후 번역을 생계의 유력한 대책으로 생각했다. 그 시절에도 번역계는 척박한 동네였지만, 독해력과 문장력을 갖춘 사람이 큰 욕심 없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일로는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일하는 시간의 절반을 들여 번역 일을 하면 나머지 절반 시간은 하고 싶은 공부와 일에 쓸 수 있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어쩔 수 없는지... 번역 작업에서도 지적 활동의 보람을 거두고 싶었다. 그래서 인세계약을 고집했다. 매절 가격보다 조금 약한 액수로 선인세를 받는 대신 몇 퍼센트라도 번역인세를 받기로 하는 식이다. 번역의 인세계약은 흔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챙겨받기 어려운 것이지만, 적어도 계약상으로는 인세를 정해놓는 것이 책임있는 번역을 위해 마땅한 틀로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인세계약을 해놓고도 발행부수나 판매고를 알려주지조차 않는 출판사들도 있고, 그걸 챙기러 내가 나선 일도 없지만, 민들레처럼 알아서 잘 챙겨주는 출판사도 있다. 함께 할 만한 일거리가 있으면 꼭 다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준다.

 

<바보 만들기> 번역한 후 신문사 일을(주로 칼럼 쓰기) 하게 되어 책 번역을 별로 않고 지내다가 2001년 신문사 일을 그만두면서 번역을 다시 시작했다. 그 동안 필명도 좀 알려지고 번역의 평판도 얻어서 역자로서는 일할 여건이 꽤 괜찮았다. 중국 체류기를 포함해 약 5년간 번역 일을 주로 하면서 하나의 공부 방법으로 활용했다. 세상과의 불화가 심하던 시기였다. 한국사회와의 거의 유일한 공식 접점이던 프레시안의 칼럼 연재마저 이 시기의 후반부에는 중단하고 지냈다. 편집진과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내 생각이 세상에 통할 길이 없으니 남의 생각을 옮겨주는 데 기능적 역할이나 맡는 것이 내 몫이라 생각하며 번역 일에 매달렸다.

 

<밖에서 본 한국사>는 그렇게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준비한 책이었다. 30여 년간 역사를 공부하며 지냈지만 역사에 관한 내 생각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자신감도 없었다. 그 내용이 파격적인 것이라며 놀라움을 표한 독자들이 있지만, 나로서는 기발한 얘기를 꺼내기 위해 자신있게 나선 것이 아니라 이런 정도 얘기는 안 할 수 없지 않냐 하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자세였다. 소극적인 만큼 절제가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돌이켜 생각한다.

 

2008년 봄 <밖에서...>가 나온 후는 칼럼으로, 책으로 내 글 쓰기가 바빠져서 번역 일을 많이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간간이 몇 권 번역하면서 재미도 보람도 쏠쏠하게 챙겼다. 아이필드에서 낸 <소설 장건>, 서해문집에서 낸 호슬러의 과학만화 두 권, 모두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번역 일을 얼마나 하게 될지 내다보기 어렵지만 최근 몇 해 동안보다는 번역에 노력을 더 들이며 지내고 싶다. 내 글을 쓰는 데 비해 번역에는 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더 넓은 범위의 독자들과 나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풍성한 지적 활동을 위해서는 번역활동과 저술활동의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 좋은데, 몇 해 동안은 저 쪽에 너무 쏠렸다가 또 몇 해 동안은 이 쪽에 너무 쏠린 채로 지냈다. 균형을 좀 더 생각해야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