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에 몇 차례 강연을 나가며 이 블로그에 '강연 계획' 카테고리까지 만들어놨다. 강연 다닐 일이 꽤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강연활동도 좀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웬만하면 사양하게 되었다. <해방일기> 연재와 관련 작업이 늘 빡빡해서다.

 

한 달 전 들어온 강연 요청을 덥썩 받아들인 것은 좀 색다른 성격 때문이었다. 국토해양인재개발원에서 시행하는 '국토해양부 소속기관장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중견 공무원들(내지 공무원 비슷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이라? 시민강좌나 대학생 강연과 다른 범주이고, 내게는 새로운 영역이다. 그래서 "역사인식과 국토인식"이란 주제를 결정했다. 그런데 준비한 원고를 '강연 계획' 카테고리에 올리며 보니 꼭 1년 만의 강연이다. 기껏 만들어놓은 카테고리가 1년 동안 놀고 있었던 거다.

 

오늘아침, 평소 같으면 눈 비비고 일어날 시간까지 논현동 건설회관에 가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막상 강연은 나도 편안하게 잘 했고, 듣는 이들도 예상 밖으로 초롱초롱,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내용을 새로운 이야기로 푸짐하게 준비한 탓도 있겠고, 공무원들이 통상 듣는 강연에 비해 아슬아슬한 내용이 많은 덕도 있었던 것 같다. 준비한 6개 절 중 두 개 절은 이야기에서 빼고, 나중에 틈 나면 원고를 읽어들 보시라 하고 넘어갔다. 주최 측에서 무척 만족스러워 하는 게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것 같다.

 

11시 좀 넘어 압구정역으로 걸어나와 일산 오는 지하철을 탈 때까지도 곧장 책상머리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는 길에 경복궁역이 있다. 작년에 자주 다니던 길담서원에 금년 초부터 발을 끊었는데, 발을 너무 독하게 끊은 것처럼 보일까, 좀 마음에 걸리던 참이다. 독한 인간 싫다는 얘기를 페리스코프에 막 올린 뒤라 그런지. 그래서 오랜만에 서원에 들렀다. 오랜만의 외출이다. 집밖에 나가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꼭 필요한 일만 보러 다니지, 안 다녀도 될 데를 다니는 만연한 외출은 진짜 오랜만이다.

 

서원지기 두 분이 다 계셔서 반갑게 인사하고, 소년님이 점심식사 함께 하지 않겠냐고 청한다. 몇 분과 약속이 되어 있는데 나도 끼면 다들 반가워할 거라고. 그건 사양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강연한 것만도 나 같은 은둔자에게 하루치가 아니라 한 달치 외도이니, 밥은 좀 조용히 편안하게 먹고 싶다고.

 

오랜만에 그 동네 온 길에 옛날 동네를 산책하고 싶어 청와대 앞으로 해서 삼청동으로 넘어오는데 두 차례나 검문검색을 당했다. 헝겊가방에 소설책 하나와 강연자료집만 들어 있었는데. 두 번째 가방을 뒤진 자가 "국토해양부 소속기관장교육"이란 제목의 자료집을 보고는 우리 편인 줄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듯이 "교육 받고 오시는 길인가 봐요." 하기에 "교육 하고 오는 길입니다." 대답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북촌을 좀 산책하다가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보니 2시반. 일전 사랑방 모임에 한의사 한 분이 새로 나왔는데 무척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그 동안 목디스크와 오십견을 정형외과 물리치료에 맡겨놓고 지냈는데, 한의 쪽은 어떨까 싶던 참이라 합정동의 전인한의원을 한 번 찾아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유능한 의사보다 사람 좋은 의사를 찾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래서 안국동 버스정류장으로 갔는데 합정동으로 바로 가는 노선이 없다. 한 번 갈아탈 생각으로 노선도를 연구했지만 뾰족한 수가 안 보인다. 그러고 보니 길바닥에 나온 지 너무 오래됐다. 그래서 바로 지하철 타고 집으로 왔다. 명색이 서울 출생이란 놈이 시골뜨기 다 됐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