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련군 2인자인 레베데프 정치사령관,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 연사로 나선 김일성은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인민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발전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참다운 인민정권” 건설을 제창했다. 그 방법으로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애국적 민주역량을 민족통일전선에 튼튼히 묶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영태, <북한 50년사 1>(들녘 펴냄) 46쪽)


9월 19일 입국한 김일성이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활동노선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귀국 전에 스탈린을 만나 한국 통치자로 낙점을 받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근거가 아직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괴뢰성’을 선전하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귀국 전 몇 해 동안 소련극동군 산하 88여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북 주둔군 간부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졌지만, 당시 소련 점령군은 조만식의 역할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찰스 암스트롱은 <북조선 탄생>(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에서 해방 당시 소련에게 북한 또는 한국을 공산국가로 만들 의지가 별로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미국 국무성이 주장한 것처럼 소련의 북한점령이 ‘접수를 위해 이미 짜여진 공식’이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는 것이다. (75쪽) 베트남과 중국의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미온적이었다는 사실과 연결해 보더라도 수긍이 가는 의견이다.


북한에서는 지방의 자치-보안 조직이 자발적으로 많이 이뤄졌고 소련군은 일본인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바로 넘겨주는 등 자발적 조직을 대체로 지원했다. 8월 말까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산하에 145개 지방 지부가 결성되었다고 하는데, 건준 중앙부의 역량 한계로 보아 하향식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지방조직이 스스로 건준에 연락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상당수는 물론 이북 지역에 있었을 것이고, 9월 들어서도 더 생겼을 것이다. 미군의 남한 진주에 따라 건준 중앙부와의 연락이 막히자 지방 조직들은 각 도의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가 10월 8일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리고 10월 28일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설치됨으로써 북한 지역의 지방행정 체계가 일단 완성되었다.


자발적 지방조직을 구성한 제일 큰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이었고(우익) 사회주의자들이(좌익) 그 다음이었다. 소련군은 좌익을 다소 북돋워줌으로써 양측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되 우익의 주도권을 용인했다. 우익의 조만식에게 큰 권위를 인정한 것이 그런 방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지들은 좌익의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우익과의 연합체제에 참여하는 길을 찾았다. 9월 중순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재건’되었지만 북한 지역에는 중앙당과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문제도 있고 박헌영 노선에 대한 불만도 있었기 때문에 북한 내 지도력의 별도 수립을 바라는 당원들이 많았고, 김일성 중심의 빨치산 집단은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소련군 점령 하의 이북에서 김일성은 여러 가지 리더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항일 투쟁 경력으로 민족주의자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점. 소련 극동군에 4년간 편성되어 있어서 점령군 간부들의 신뢰를 받은 점. 국내 무장투쟁이 없던 시절 보천보사건 등으로 큰 명성을 쌓아놓은 점. 그의 손발과 두뇌가 되어줄 정예집단을 보유한 점.


평양 시민대회에서 그의 연설은 스탈린 식 교조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그런 유연한 노선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리더십의 조건이 든든하기 때문이었다. ‘국내파’ 일부는 김일성이 대표한 ‘빨치산파’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이 “소부르주아적 우경투항주의”라고 공격했지만, 그들의 ‘인민전선’ 노선이 조선의 실정을 무시한 좌경이라는 빨치산파의 비판이 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임영태 앞의 책 65쪽)


김일성과 박헌영이 10월 8일에서 9일에 걸쳐 개성 인근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실에서 만났을 때 핵심 의제는 북한의 독자적 공산당 조직을 세우는 문제였다. 박헌영은 코민테른이 세웠던 1국1당 원칙에 입각해 이를 반대했으나 김일성이 제기하는 현실적 필요를 묵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는 절충안으로 마무리되었다.


바로 이튿날(10월 10일) ‘조선공산당 이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의 이름으로 북조선분국 창건을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고, 13일에 분국 설치 결정과 함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예비회의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의 8월테제와 다른 별도의 노선을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집행위원회에 빨치산파가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2천여 명 수준의 북한 지역 공산당원 속에서 빨치산파의 세력은 아직 미약했다. 그러나 독자적 조직인 북조선분국 설치는 김일성의 활동무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이 단계에서 큰 승리였다. 훗날 북조선노동당을 남조선노동당과 대등하게 따로 세울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10월 8일 개성에서 만날 때 박헌영은 조직력의 대표였고 김일성은 대중성의 대표였다. 조직력은 억압상태 하의 공산주의운동이 보인 특징이었다. 식민지시대의 불법 투쟁에서 비롯된 조직력 위주 운동이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박헌영의 지도력이 확고했던 것이다. 반면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개방적 노선이 유리한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 과정에서 가장 큰 고비가 소위 ‘장안파’의 경쟁을 따돌린 것이었다. 바로 해방의 날인 8월 15일 밤에 여러 계열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 모여 공산당을 결성하고 당 간판을 내걸었다. 이것을 ‘장안당’ 또는 ‘장안파’라 한다.


장안파 핵심인물들과 그 소속 계열들이 1930년대 말 이후 운동을 중단하고 있는 동안 박헌영이 속한 경성콤그룹만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콤그룹을 끌고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테제를 작성했다. 1928년 12월테제에 의해 해체된 조선공산당의 법통을 잇는다는 노선이었다. 김남식과 심지연은 <박헌영 노선비판>(세계 펴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이처럼 재건위가 발족되고 8월테제가 나오자 각 계보의 공산주의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장안파의 충격이 컸다. 일제하에서의 공산주의운동에서 기본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당의 분열과 파벌싸움이 해방 후에 또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재건위 중심으로 당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를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1945년 8월 24일 장안당은 중앙집행위를 개최하여 당의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 후 9월 8일에는 장안파의 중심인물들이 주체가 되어 재건파를 대표한 박헌영과 함께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고 박헌영 계의 재건준비위에 합세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박헌영은 9월 15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포하게 되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원래 개방성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그 이념을 가장 투철하게 추구하는 공산주의운동이 역설적으로 정통성을 중시하고 폐쇄적인 성향을 많이 띠게 된 데는 소련 볼셰비키혁명의 경험이 큰 작용을 했다. 혁명의 승리자들이 자기네 헤게모니투쟁의 경험을 혁명의 표준적 과정으로 인식하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정책노선에 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환영한 것은 식민지 상태에서 심화되고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는 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의 지식층 가운데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개 사회주의의 역할에 기대감을 가지는 정도 좌익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의 폐쇄성과 극단성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재건’ 시점의 공산당원 수가 수천 명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8월테제는 12월테제의 뒤를 이어 계급투쟁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운동은 지식층 좌익 속에 확산되기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잠재적 좌익이 공산주의운동에 흡수되었다. 미군정의 박해라는 악조건도 물론 작용한 결과이지만, 박헌영 일파의 편협한 극좌노선도 큰 요인이었다.


Posted by 문천

 

근래 미군 통역생에 대한 항간의 물의가 분분한 것 같다. 조선사정을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릇된 說問으로 한다느니 또는 어느 당파에 이용되어 그 당파에 관한 것은 좋게 이야기하고 다른 당파에 관한 것은 좋지 않게 이야기한다느니 □□□□□한다느니 하고 갖은 아름답지 않은 풍설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단순한 항간의 풍설이니 만치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통역을 담당할 만한 사람이면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요 이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각 방향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며 식견과 인격이 결코 이 같은 좋지 못한 행동을 하기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설이 들리는 것은 쓸 데 없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의 풍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지금 항간의 주목의 초점이 이를 미군 통역생에게 집중되어 있고 또 사실로 이들 통역생이 바른 통역으로 조선에 대한 정당한 해설을 갖게 하여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또는 타당하게 운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역생들은 어떠한 태도로 이에 대하여야 할 것인가 첫째로 통역생은 한국에 협력하는 가장 중대한 임무를 가진 것을 자각하여 일거일동을 한국□□의 □□로 하여야 할 것이다. 즉 불편불당의 어느 정당이나 당파에 가담함이 없이 공명정대한 입장에서 지금 조선과 조선민중이 직면하고 있는 생활현실과 사회현실 및 조선민중의 희망 이상 등을 바르게 정확하게 소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조선민중은 4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이다. 불행히 일본식민지가 되어 그 학정 밑에서 고난을 겪어 왔음으로 昔日의 면목이 없어졌지만 그 근본을 캔다면 어느 문화민족에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민족이다. 이 긍지를 굳게 갖고 엄연한 대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써 조선을 소개하는 통역의 任에 當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위에 말한 항간의 풍설에 다소라도 혐의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다. 통역생 제씨는 학식과 인격이 겸비된 지도적 인물이니 만치 우리가 이 같은 충고를 줄 필요가 없지만 다만 노파심에서 이같은 충고를 주는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3일


미군정은 남한에서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았다. 미군정의 점령통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이다. 미군 중에 아무리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한국인을 다스리는 정치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고 통역제도를 공식화해야 했다.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했기 때문에 통역제도는 공식화되지 못하고 개인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채용되는 부수적 요소가 되어 엄정한 운영기준이 세워지지 못했고, 그 결과 '통역정치'가 끝없는 추문의 원천이 되었다.


해방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중에는 두 개의 큰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공산주의자 포함)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한민당 당원이나 지지자였다. 사회주의자들 중에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과 영어를 통해 사상을 학습한 사람이 많았다. 좌익 지도자 박헌영도 러시아어를 못해서, 국제레닌대학에서도 영어반에서 공부했다.


미군정 담당자들이 두 그룹 중 한 쪽을 배척하는 태도는 9월 8일 상륙을 앞두고 인천 앞바다의 함상에서 시작되었다. 건준에서 파견한 여운홍, 백상규와 조한용은 사흘이나 쪽배를 타고 기다렸다가 미군 함대가 도착하자 기함 카톡틴 호에 올랐다. 하지 사령관은 그들의 접견을 거절했는데, 이듬해 4월의 한 기자회견에서 이 일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들이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건준이 일본인들의 괴뢰라는 주장은 한민당에서만 나온 것이니 9월 8일 당시 하지가 그런 생각을 했을 수가 없는 일이고, 서울 도착 후 한민당 인사들에게 세뇌당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민당 인사들이 10월 5일 구성된 군정장관 고문단을 채우면서 통역도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채용되었다. 서울 주재 미 국무성 고문관 윌리엄 랭던은 군정청 한국인 접촉의 편향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군정에서 부유층을 편애하고 인기있는 좌파를 제외시킴으로써, 우리는 시초부터 비율에 맞지 않는 정도로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 어떠한 인물이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채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과 그들의 친우들은 주로 돈 있는 계급 출신이며 그것은 영어가 한인들 사이에선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벌써부터 이것이 한국 사회구조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 구조의 사회적 기초를 신속히 확장시키고 있었다. (1945년 11월 26일 국무성에 보낸 서신.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 205쪽에서 재인용)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희귀한 미군 장교로서 하지의 보좌관으로 특채된 조지 윌리엄스는 선교사의 아들로 충남 공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조병옥 등 한민당 인사들을 군정청 요직에 임명하는 데 윌리엄스가 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0월 17일 한민당 당사를 방문했을 때 윌리엄스가 송진우와 조병옥 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다 알고 있듯이, 북한에서는 공산군이 조직됐습니다. 비록 공산주의 이론은 자명하고 반공사상이 (한국에서) 철저히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이것(반공)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정세에 대처할 애국자가 한국에 없다면, 이를 철저히 다루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 장군이 한국을 위하여 군정과 협조할 그런 애국자의 천거를 요청했으니, 여러분이 이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여 나에게 추천해 주기를 바랍니다. (커밍스 위 책 212쪽에서 재인용. 이 책 557쪽의 참고문헌 일부가 누락되어 있어서 원전은 파악하지 못했음.)


'반공 검사'로 악명을 떨칠 선우종원도 통역관들의 행태에는 분노를 터뜨렸다.


게다가 통역관들이 거짓 통역을 해서 죄가 되게끔 만들어버렸어요. ‘예스’라고 해야 되는 걸 ‘노’라 하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 유죄를 만들어서 형무소로 보내는 걸 우리가 봤어요. 그런데 검찰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일이거든. 우리 같은 젊은 검사들이 정의감에 불타 통역관을 잡아넣었어요. (...)

그렇게 하니까 구속된 놈들이 형무소에 가서 자기를 잡아놓은 검사가 공산주의자니 뭐니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녔어요. 아마 그때 내가 실언을 좀 했을 거예요. 나도 26살밖에 안 됐을 테니까, 이를테면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 자식아, 우리가 일본 놈한테 억눌려 산 것만 해도 분한데, 상전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미국 놈한테 붙어서 한국 사람을 괴롭히냐?” 그러니까 그걸 꼬투리 잡아서 ‘검사가 반미주의자다’ 떠들고 다니는 거죠. 재판 끝나면 선우 아무개 검사 구속한다, 몇 년 징역을 보내겠다, 그런 이야기까지 돌았어요. (<8-15의 기억: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한길사 펴냄) 116-117쪽)


권력을 끼고 도니 부패 또한 없을 수 없다.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동용하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무를 실어 나르는 허씨라는 업자가 있었어요. 내가 미군 중위하고 나무를 싣고 차를 열 대씩 가지고 왔다 갔다 하니까 하루는 이 미군 중위를 초대했어요. 어디에 초대를 했는가 하면 지금의 명동인데 그곳에 장춘각이라는 기생집이 있었어요. 거기로 데려가더라고요. 난 기생집이라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장가도 안 간 총각이었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죠. 허씨는 가방에 돈을 가득 넣어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 순 장사꾼이죠. 미국사람을 통해 어떻게 들여온 나무를 차를 통해 다른 곳으로 실어 나르고, 자세한 건 모르지만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위 책 113쪽)


일개 중위를 모시고 다니는 나이어린 통역관도 뜻하지 않은 돈벼락을 맞을 지경이니 영관급 장교들은 그야말로 황제가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베어드 대령이 ‘여간첩’ 이수임과 함께 살던 ‘옥인동 19번지’의 대궐 같은 집 얘기가 나오는데, <프레시안> 주소가 옥인동 19-29번지로 되어 있어서 물어보니 그 빌딩 터를 포함하는 넓은 대지 위의 엄청난 저택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체제로부터 많은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부패’에 관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한국인의 부패는 미국인에게 배운 것이 많다.


Posted by 문천

여기 건너와서 며칠 안 되었을 때 조광 선생에게 전화를 받았다. 8월 하순에 이곳에서 한-중 역사가포럼이 열리는데, 참석해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자 강평을 맡아달라고 했다. 뭘 어떻게 강평하라는 건지 몰라도, 그분 권하는 일은 뭐든지 하기로 마음먹고 사는 터인지라, 그러마고 했다.

 

응락을 해놓고 나서 가만 생각하니, 이미 여기 와 있는 나를 항공료, 호텔비도 들이지 않고 끌어들일 심산인데, 발표를 맡기기에는 너무 촉박하니 토론에 참여시키려는 모양이다.

 

학술회의에서 토론은 참여자의 노력 수준이 들쑥날쑥이다. 발표자들 못지않게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냥 나와서 하나마나한 소리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공동주최 기관의 하나인 국편 책임자가 추천한 토론자가 얼렁뚱땅할 수는 없는 입장 아닌가. 토론자로 참석해 본 중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아직 발표문들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든 걱정은 할 말이 너무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발표문이 너무 늦게 와서 읽을 시간이 충분치 못하거나 발표 내용이 너무 재미없어서 붙일 말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비상용으로 글 한 꼭지를 써놓았다. "한-중 역사가포럼"의 취지에 맞춰 할 만한 개괄적인 이야기로. http://orunkim.tistory.com/1738

 

그런데 발표문은 충분히 일찍 도착했고,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준비했던 글은 접어놓고 발표문에 매달렸는데, 이제 그것만으로도 할 말이 너무 많다. 토론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지? 내가 이야기할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지? 물어볼 데도 없으니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금요일(25일) 한국대표단 도착 후 연변대 주최 만찬 자리에서 토론 사회를 맡을 변주승 교수를 붙잡고 의논했다. 토론이 한 시간 남짓 되는데, 발표자 아닌 토론자가 나 하나니까 모두에 10분 가량 전반적 소감을 얘기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막상 이튿날 회의 때는 시간 형편이 괜찮아서 20분가량 발표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수박 겉만 핥은 느낌이다. 가장 흥미롭게 읽고 생각을 많이 한 순커즈(孫科志)의 발표에 관해서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 조용히 얘기를 하겠다"고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 그날 국편 주최 만찬에서는 헤드테이블의 자리를 사양하고 순 교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다.

 

이번 행사 중 익숙지 않은 "원로" 대접을 받으면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 내딴에 논쟁적인 이야기를 내놓아도 맞받아쳐 주는 사람 없이 다들 "네, 네"만 하니 뒷방 늙은이가 된 기분이다. 나는 학문이란 것을 problem-solving 보다 problem-raising 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문제 제기에만 주력해 왔는데, 이제 다른 화법도 모색해야 되겠다. 내 이야기에 토 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 주려는 이들을 위해.

 

조 선생의 이번 연길 방문에 학술회의와 별도로 내가 바란 일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국편의 '류연산 자료' 접수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열흘 전 일기에 적은 것처럼 나는 조 선생의 국편 취임이 '류연산 자료'의 활로를 찾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25일 만찬 후 류 선생 부인과 접견 약속을 잡아놓고 있었고, 접견에 배석한 박진희 선생이 앞으로 그 일을 추진해 나갈 출발점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바란 또 하나 일은 시시한 것이지만 반성하는 뜻에서 굳이 적어둔다. 홍석현의 책에 대한 최장집의 서평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을 얼마 전 적었는데, 홍 회장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국편 조 위원장님 앞으로 두 권을 보내달라고 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이곳의 우편서비스에 대해 나는 아주 나쁜 인상을 갖고 있다. 헌데 마침 조 선생이 곧 이리 올 참이니 책심부름 한 번 시켜먹자는 꾀를 내고, 조 선생도 흥미를 일으킬 책이니 두 권을 보내달라고 (심부름값 포함)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연길에 온 조 선생에게 "책은요?" 물으니 "무슨 책?" 한다. 그래서 "홍석현 회장 책 선생님한테 안 왔어요?" 하니, "그 책? 왔지요, 두 권씩이나. 왜 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어요. 그분 전화번호 좀 주세요. 고맙다고 인사하게."

 

집에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보니 메일 하나가 '임시보관함'에 걸려 있다. 어쩌다 발송을 깜빡하고 지나갔던 모양이다. 부끄러움을 깊이 새기기 위해 아래 붙여 놓는다.

 

"죄송"이란 말은​ 수십 년 전에 제 사전에서 지운 말인데 오늘 씁니다. 현실적으로 제가 빨리 보고 싶은 책을 안심하고 빨리 받아볼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게... 대부님께 심부름 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 십여 년 전 볼 때보다 코드가 잘 맞는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오늘 프레시안에 실린 최장집 교수 서평을 보며 상상 외로 내 생각과 가까운 게 많다는 것을 알고 빨리 책을 보내달라고 졸랐더니 보내주겠다네요. 정말 선생님도 재미있게 보실 책 같습니다.

​기도 올리는 습관이.. 잘 익혀지지 않네요. 선생님 연변 오시는 길에 합숙훈련이라도 해야 되는 건가? 사람 많은 식사자리라도 기도 열심히 올리시는 모습 뵙고 싶습니다. ​기도보다 고해가 제게는 큰 과제로 느껴집니다. "퇴각일기"에도 고해의 마음을 담고 싶은 건데... 쓰레기를 제대로 버려야 기도하는 자세를 제대로 세울 수 있겠죠?

​홍 회장에게도 강조해서 보여줬지만, "E H 카"라는 이름의 우상에 부딪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우상이 아직도 강건하기 때문에 부딪치는 맛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틈 나실 때 http://orunkim.tistory.com/1534 글도 한 번 살펴봐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레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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