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Saturday, Dec 31, 2016 12:23:59 AM
From: "316262" <dmsgml8@hanmail.net>
To: <mindle98@empas.com>
Subject: 바보만들기 번역을 더 매끄럽게 해주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광주에 근무하는 초등교사 김xx입니다.

 

먼저 바보만들기를 출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인상깊고 좋은 책입니다.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긴 처음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그럴까 생각하고 읽어주십시오.

 

저는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약 8년 전에 전국국어교사모임 연수에서 들었습니다. 강사님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지만(남한산초 김영주 선생님이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꼭 읽어야 할 책'이라 소개하셨습니다. 아마 그 강의를 들은 130여명의 전국 초등교사들 중 연수가 끝나고 

그 책을 산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함께 연수를 들은 제 동료교사들도 책을 샀지만 그 해에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내용이 불편한 게 아니라 읽기가 불편해서 무슨말인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성실한 번역이다 보니 우리말로 바꿨을 때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단 점 이해합니다.

보통 이런 성실한 번역은 교육과정 해설서나 철학자 책이 많은데 대학교재로 많이 보기때문에 시간을 들여서라도 봅니다.

그러나 교사가 된 후 시간을 투자해서 '우리말인데 해석해야 하는 책'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방학을 맞아 기어이 다 읽고보니 정말, 아주, 매우, 좋은 책이라서 안타까움이 큽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66쪽 마지막 문단

" 폴 굿먼이 30년 전에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아이들을 부자연스럽게 자라도록 강요하는 데에 우리 주위에 일상화되어 있는 비극의 중요한 이유가 있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학교제도에 조금이라도 개혁을 가하려 한다면 그 제도의 부자연스러운 면을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문단을 바꿔보겠습니다.

" 폴 굿먼은 30년 전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비극의 중요한 원인은 우리가 아이들을 부자연스럽게 자라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고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학교제도를 조금이라도 개혁하고 싶다면 제도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면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부분을 합하고 부정형을 단순화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좀 더 명확해지지 않았습니까?

정말 몇 번이나 덮을 뻔 했지만 소리내서 읽으며 다 읽었습니다.

개토는 어려운 책을 써서 저를 바보만들 사람은 아니니 이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많은 교사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의 내용을 봐서는 벌써 10쇄는 넘겼어야 할 책이 이번에 다시 샀는데(잃어버려서) 아직도 3쇄여서 안타깝습니다.

제가 좋은 책은 사서 선물하기 때문에 말씀드리지만 꿈의학교 헬레네랑에는 나온지 5년된 책이 진작 10쇄를 넘겼습니다.

그만큼 늘고 있는 혁신학교 교사들이 제도와 학교 개혁을 알고싶어합니다.

내년 동학년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읽기 힘든 책'을 준다는 오해를 할까 걱정입니다.

 

부디 힘드시겠지만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며칠 전 민들레출판사 현병호 씨에게 불쑥 전화를 받았다. 20여 년 전 내가 번역한 <바보만들기>의 번역을 바꿀 필요를 느껴서 새 번역자에게 맡기려 하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민들레에 대해서나 현병호 씨에 대해서나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서 알았다고, 잘 판단해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하니 잘 판단해서 하시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메일을 써 보냈다. "번역을 바꿀 필요"라 했는데, 새 번역자에게 맡겨야 할 필요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윤문을 새로 할 필요 정도를 넘어 어떤 필요가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랬더니 그 필요를 입증할 증거로 어느 독자에게 받았다는 위 메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메일 보낸 사람의 이름 외에는 그대로 옮겨놓았다.

 

<바보만들기> 번역을 잘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뜻을 잘 옮겼을 뿐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한 점이 놀랍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칭찬이 입에 발린 말씀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 번역 이후 출판계에서 특급 번역자로 인정받게 된 사실이 증명한다.

 

독자 중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는 줄 안다. 내 문체를 모든 사람이 좋아하리라는 환상 같은 건 내게 없다. 하지만 내 번역문이 어렵다고 역자의 죄를 성토하는 것은 좀 극단적인 사례 같다. 초등 교사라는데 아이들이 걱정된다.

 

그분이 가르치는 아이들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은 출판사 걱정이다. 20여 년간 개토의 뜻을 전달해 온 번역을 폐기하고 새 번역자에게 맡겨야겠다는 결정을 한 독자의 요구에만 따라 내렸을 리는 없다.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어주시기 바란다"는 그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기존 번역의 폐기와 새 번역의 위촉까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번역에 분명한 결함이 없다면 독자 취향에 맞추는 윤문은 출판사에서 하는 일 아닌가.

 

현병호 씨는 위 메일을 첨부한 답장에 이렇게도 썼다.

 

페리스코프에 실린 선생님 칼럼이나 <뉴라이트 비판> 같은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 글을 좋아하는 저로서도 
<바보 만들기>를 다시 읽어보니 번역이 많이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초창기 번역서여서 그런 면도 있지 싶습니다. 교열이나 윤문으로 보완 작업을 하기에는 
단행본 편집자가 따로 없는 현재로서는 여력이 없기도 하고 
마침 저희랑 오랫동안 작업해온 번역자가 시간이 날 때여서 얘기했더니 
아이 학교 문제로 고민하던 차여서 의욕을 보여 재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진행한 제 불찰을 용서해주시길 빕니다. 

 

<바보만들기>는 번역에 공력을 충분히 쏟은 책이다. 현 씨는 "번역이 많이 거칠다"고 하는데, 저자의 글이 원래 거칠다. 저자의 분노를 보여주는 그 거친 맛을 잘 살린 점을 애초에 번역을 맡겼던 편집자들이 각별히 치하해 주기도 했다. 현 씨가 원문을 읽어봤는지 모르겠다.

 

더 기막힌 것은 "단행본 편집자가 따로 없는" 형편인데 마침 맞춤한 번역자가 있어서 재번역을 맡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편집-교열을 외주 주지 않고 내부 인력만으로 처리하는 출판사가 대한민국에 몇 군데나 되는지 모르겠다.

 

민들레출판사는 대안교육 발전에 공헌하고자 애쓰는 출판사다.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서 내게 강연을 부탁할 때마다 강연료에 관계없이 응해 왔다. 그런데 뜻있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독선에 사로잡혀 ("내가 하는 일은 착한 뜻에서 나온 거니까 양해해 줄 거야.") 엉뚱한 행태를 보이는 일이 종종 있다. 

 

이번엔 너무했다. 번역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이고, '번역가'는 내 정체성의 큰 부분이다. 그런데 한 독자의 편지를 근거로 내 번역을 폐기하려 하다니, 홍준표가 서청원을 놓고 "함께 정치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심정이 이해된다.

 

현 씨의 답장을 받아본 뒤 이렇게 적어 보냈다.

 

​문체에 대한 독자들의 취향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죠. 나는 상당 범위 독자들의 취향에 맞출 수 있는 필자로 널리 평가받아 온 필자입니다. 문체를 조정해 달라는 귀사의 부탁을 받았다면 귀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어느 정도 조정할 여지도 있었겠죠. 그러나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시해 주신 독자 편지에서 요구하는 것도 (그 요구가 타당한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재번역이 아니라 윤문이라고 내게는 보입니다. 댠행본 편집자가 따로 없어서 교열이나 윤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번역을 맡기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은 황당합니다. 많은 출판사에서 편집 업무의 상당 부분을 외주로 처리하는 관행을 모르시는가요? 아니면 그런 관행에 반대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내 번역을 폐기하려는 귀사의 방침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견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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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 “방금 미국은 전 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 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1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돌아와 친일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行號施令)하기만 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出入于世)를 잘 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261쪽)


(2)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 336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131쪽에서 재인용)


같은 송진우가 했다는 말이다. (1)은 1944년 가을 안재홍이 찾아가 독립 준비를 위한 활동을 함께 하자고 권했을 때 한 말이고, 그저께도 인용했던 (2)는 1945년 12월 중순 임정과 한민당 사람들이 함께 한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송진우가 일제 말기에도 국내에서 가장 정보력이 뛰어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1)에서 임정의 위세를 부풀려 말한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 더구나 (2)에서 임정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과 전혀 맞지 않는다. (1)의 이야기는 활동 권유를 사절하기 위해 당시 흘러 다니던 불확실한 정보의 일부를 과장해서 말한 것 같다.


어쨌든 해방 후 송진우와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 입장에 부합하는 것은 (1)이다. (2)에서처럼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따지는 것은 ‘절대 지지’와 잘 맞지 않는다.


임정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비판이 (2)에 담겨 있다. (가) 임정은 국내에 발붙일 곳 없는 무력한 존재다. (나) 임정 요인들은 중국에서 아무거나 해먹고 살아온 부도덕한 존재다. 송진우의 꾸짖음에 반박도 못할 만큼 임정이 꿀리는 입장이었을까?


요즘 저질 언론의 ‘아님 말고’ 행태가 떠오른다. 송진우의 비판만 드러나 있고 임정 측 반론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후세의 우리는 (가)의 비판이 사실과 다른 주장임을 알고 있다. 임정은 국민의 큰 여망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한민당도 임정의 권위에 빌붙으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있었다. 점령군 외에 의지할 데가 없던 것은 한민당 사정이었다.


그러면 (나)는?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 중국에서 임정 요인들의 생활이 그렇게 순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더러 떠돈다. 어떤 여자랑 같이 살았다는둥, 아편 밀매에 종사했다는둥, 누구에게 떳떳치 못한 도움을 받았다는둥. 임정을 이용하고자 하는 한민당 사람들이 그런 흑색선전 자료를 모으는 데 부심했으리라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고, 지금까지 떠도는 말들도 그런 자료에서 퍼져 나온 것이 많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런 말들 중에는 사실인 것도 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임정 요인들이 모두 성인군자라야만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자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12월 6일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임정 지지 국민운동’을 결의했다. 결의 내용 중 “임시정부에 대한 건의”로 “독립완성을 방해하는 참칭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하여 즉시 해산명령을 발할 것”이 들어 있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07일자) 송진우는 그 이튿날 김구를 방문해 그 뜻을 직접 전하기까지 했다.


한민당의 임정 ‘절대 지지’가 어떤 속셈을 품은 것인지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인공은 그 중앙부가 극좌파에게 장악되어 독선적이고 편협한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하부조직은 인민의 독립 의지를 널리 수렴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대다수 인민은 임정과 인공을 함께 지지하고 있었다. 인공과 임정이 국내와 국외에서 각자 제약된 여건 속에서 자라온 사실을 생각하면 두 기관이 힘을 합치는 것이 독립의 의지와 역량을 최대화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한민당은 두 기관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사이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12월 9일 송진우의 기자회견에 한민당의 이 속셈이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韓國民主黨 수석총무 宋鎭禹와의 문답내용은 다음과 같다.

(問) 어떻게 통일되어야 할까요.

(答) 우리가 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함으로써 통일이 된다. 유일이요 또 최고인 임시정부를 전민중이 지지 협력하면 된다.

(問) 임시정부가 유일 최고한 정부가 되고 안 되는 것은 민중 전부가 결정지을 문제이다. 최고의 심판자는 민중이 아닐까요.

(答) 그러나 8·15 이전에 민중은 임시정부 하나만을 믿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부로서 활약하는 것은 임시정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인민공화국이 생기어 임시정부에 대한 역선전을 하였기 때문에 민중은 혼란에 빠졌다. 앞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깊어 감에 따라 전국민이 따라 올 것이다.

(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세력이 객관적으로 존재함으로 통일을 위하여 이와 협력 협조하여야 될 줄 아는데.

(答) 한 사람에 두 머리가 있을 수 없듯이 한 나라에 두 정부가 있을 수 없다. 27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며 싸운 우리의 정부가 엄존하는데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정부를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과오를 청산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면 협력할 수 있다. 인민공화국은 일본세력 밑에서 그의 후원으로 생긴 것이므로 정부가 될 수 없다.

(問) 인민공화국이 日本 軍力이 남아 있는 동안에 생겼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 성격은 반 일본적이었고 조선사람의 독립의욕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答) 인민공화국이 혁명세력으로써 日本軍力을 擧破하고 세워진 것이라면 그대로 승인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問) 洪震 (임정 의정원 의장) 말은 인민공화국의 발생 이유를 인정한다고 하는데.

(答) 여러 요인들 가운데는 혹 그런 의견을 가진 분이 있을지 모른다.

(問) 인민공화국의 객관적 실제적 세력이 있는데 그를 무시하고 통일이 될 수 있을까.

(答) 그 힘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다. 임시정부가 환국하였으므로 앞으로 민중은 이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따라 올 것이다.

(問) 인민공화국의 시정방침은 어떻게 생각하나

(答) 정책은 별문제다. 문제는 인민공화국의 구성체이다. 적색정권을 가지고는 우리는 독립할 수 없다. 객관적 정세를 보면 이 이유를 알 것이다. 우리는 먼저 민족국가를 만들어야겠다. 자주독립을 먼저 해놓고 볼 일이다. 그런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09일자)


연전에 뉴라이트 측에서 ‘광복절’보다 ‘건국절’의 의미를 더 크게 봐야 한다고 요란을 떨며 ‘민족’보다 ‘국가’를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편 일이 있다. 민족에는 민족의 의미가 있고 국가에는 국가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 하나를 내세워 다른 하나를 내치자는 억지는 해방 직후 임정을 내세워 인공을 내치려 한 한민당과 닮은꼴이다. 극우파의 ‘이간질 수법’을 나는 이렇게 봤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계급, 투기 세력에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국가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작전일 뿐이다. (<뉴라이트 비판> 35쪽)


 

Posted by 문천

 

최후로 한가지 얘기하랴는 것은 일을 하랴면 돈이 있어야 돼요. 돈 있는 부자들께 돈을 많이 내도록 합시다. 그러타고 빼앗지는 마시오, 우리들이 불한당이 될테니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경제적으로도 큰돈을 모와놓으면 저네들도 우리의 실력있다는 것을 알 것이요, 그리고 자주독립할 실력이 있구하면 모든 일이 다 일우워질 것이 아니오.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제1차 제2차 경과보고”,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81쪽에서 재인용)


11월 1일의 독촉 회의에서 이승만이 한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청년 시절 이후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공리주의 사고방식에 길든 그이기에 돈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가 ‘실력’을 숭상하는 자세는 그를 민족주의 지도자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일으켰을 것 같다.


‘우리’가 큰돈을 모아놓으면 저네들(미국과 군정청)이 우리 실력을 알아본다는 얘기, 뒤집어보면 부자들의 실력을 우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 아닌가. 35년 식민지시대를 거친 그 시점에서 부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식민지배에 협력하면서 실력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이제 식민지배 대신 ‘우리’에게 협력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이승만이 여기서 말한 ‘우리’는 민족주의 진영이 아니라 실력자를 존중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21세기의 뉴라이트 논객들에게 숭상받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실력자들. (김기협 <뉴라이트 비판> 55-57쪽) 그들 중 친일 경력이 너무 두드러져 한민당에조차 드러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승만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처든 단체의 하나가 대한경제보국회였다.


대한경제보국회의 공식 발족은 12월 12일이었지만, 실제 출범은 이승만의 초청으로 12월 3일 돈암장에서 열린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보국기금실행위원회 설립을 결정하고 이승만의 알선으로 군정청을 통해 조선은행에서 거액을 대부받을 방침을 의논했다.(계획된 대출액은 2억 원으로 당시 알려졌다.) 그러다가 비판적 여론이 일어나자 당시 민생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쌀 공급 문제에 공헌하겠다는 명분으로 나선 것이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80-584쪽)


이 무렵 이승만이 군정청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돈을 엮어보려는 시도는 여러 각도에서 펼쳐졌다.


산업인의 대동단결과 산업경제의 통일발전, 산업의 과학적 개혁, 대중적 산업기구의 신편성을 강령으로 국내 산업을 진흥코자 하는 建國産業聯盟本部는 韓鐸烈을 위원장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그 제1착수로 李承晩의 알선으로 군정청과 양해가 성립되어 38도 이남에 있는 日本軍官私團體가 소유하고 있던 가격 약 17억 원의 물자를 讓受하여 양심적인 40 지정 배급점을 통해서 소비자에게 배급 판매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필수물자가 민중에게 균점되며 고물가를 억압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또 현재 일본에 있는 현금 약 10억, 기계설비 자료 약 3억, 고정시설 약 9억, 도합 28억의 자본과 1만 7,000인의 기술인을 국내에 이전해 올 계획을 진행 중이어서 앞으로 활동이 기대되는 바 있다 한다.
또한 동 연맹에서는 기관지 ≪産業新聞≫을 준비 중이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9일)


건국산업연맹, 경제보국회, 참 좋은 이름들이다. 식민지체제에서는 2-3류 자본가였던 국내 ‘거부’들에게 이승만이 구세주로 보이지 않았을까? 일본인의 조선 내 재산의 몰수를 당연하게 여길 때였다. 아무리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식민지배 권력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재산권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를 조금만 연장하면 금광왕이건, 백화점왕이건, 대지주건, 몰수의 위협을 피할 수 없었다. 3-8선 이북에서는 널리 현실로 나타나고 있던 사태였다.


그런데 재산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인 재산에까지 손을 뻗쳐 1류 자본가로 도약할 기회를 이승만이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친일파’ 처단으로부터의 면죄부와 함께. 한민당의 득세에 생존의 유일한 희망을 걸고 있던 그들에게 이승만은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김학준의 <고하 송진우 평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12월 중순 어느 날 한민당 간부들이 임정 요인들을 국일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신익희가 친일파의 엄격한 숙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함에 장덕수가 “그러면 나는 숙청이 되겠군.” 하는 것을 신익희가 “설산(장덕수)뿐이겠는가.” 맞받을 때 곁에 있던 송진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해공(신익희),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130-131쪽에서 재인용)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이 늘어앉은 앞에서 정말 이런 말이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럴싸하기에 이 얘기가 전해져 송진우의 '평전'에 자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을 것 아니겠는가. 최창학 저택을 비롯해 임정의 경비와 요인들의 용돈까지 이승만-한민당-재산가 사이에 이미 형성된 극우 카르텔이 제공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서 임정을 “국내에 발붙일 데 없이” 된 존재로까지 당당히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이 국일관 연회에 앞서 임정에 대한 자금 제공을 놓고 한 차례 풍파가 있었다. 10월 20일 결성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에서 환국지사후원회로 이름을 바꾼 단체가 임정에 9백만 원을 제공했는데, 김구는 이 돈의 배경이 석연치 않다 하여 돌려보냈다. 그 과정에서 후원회의 장덕수가 임정의 누군가에게 따귀를 얻어맞는 소동까지 벌어졌는데, 송진우가 김구를 찾아가 “임시정부도 정부요, 정부가 받는 세금 가운데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법이오.” 운운 하여 사태를 무마했다고 한다. (강준만 위 책 129-130쪽, 김재명 <한국현대사의 비극> 201-203쪽)


12월 8일자 <자유신문>에 실린 물가 조사에 따르면 백미 소두 한 말에 70원이었다. 9백만 원이면 쌀값 기준으로 지금 돈 약 30억의 가치다. 경제 규모가 작던 당시에 그 실질적 가치는 그보다도 엄청나게 더 컸을 것이다. 정병준은 이승만이 1945~1947년간 거둬들인 정치자금이 최소한 2천7백만 원을 넘을 것으로 파악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606-609쪽)


장준하가 함께 돌아온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 국내 지대의 환영회를 받은 일이 있다. 장소는 최고급 요정인 명월관이었고, 산해진미는 물론, 손님 수에 못지않은 기녀들이 시중드는 자리였다. 귀환한 날부터 경교장을 경비했다는 것이 이 지대였을 텐데, 이런 잔치 벌일 능력을 가진 부대가 과연 임정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지대’였는지 의심스럽다.


비서진의 장준하까지 이런 잔치에 불려 다닐 정도였다면 임정 요인들에 대한 환대가 어떤 수준이었을까? 재산가들에게는 임정 요인들이 친일파의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통로로,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적 권위를 얻을 수 있는 합작의 대상으로 가치가 있었다. 알아주는 사람 없이 중경에 틀어박혀 있던 임정 요인들이 갑자기 온갖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