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개량한복을 한 벌 샀다. 모자도 하나 집어 왔다.

 

지난 일요일 최 선생 내외가 멀리까지 찾아와 줬다. 따님 길을 잘 찾아줬다고 인사가 깍듯하다. 옷을 지어 드리고 싶은데 번거롭지 않도록 봉투에 넣어 왔다며 두둑히 주기에 고맙게 챙겼다가, 틈 나는 대로 옷 사러 서울 나갔다. 질경이와 돌실나이가 괜찮은 가게라고 들었는데 그 날 마침 돌실나이는 문들 닫았고, 질경이에 가니 마음에 드는 물건이 얼마든지 있었다.

 

생각할수록 기묘한 일이다. 내 앞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 허물이 큰 사람이라 남의 일에 나설 생각 일체 않고 살아 왔는데... 공부의 길에서 소중한 사람인 이 선생과 친구 딸인 최 양을 맞춰준 것이... 사람 일이란 장담할 수 없는 것인데도, 무슨 신명이 뻗쳐서 그렇게 확고하게 권할 수 있었던 건지?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정도를 넘어, 만남을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는 자세까지 더욱 굳건해지는 모습에 놀라며 기뻐하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다. 최 선생 내외도 흐뭇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 선생 어른들은 그 사이 직접 연락이 없었지만 안 봐도 비데오다.

 

이웃들의 삶에 도움이 분명한 일을 모처럼 하고 보니,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좋은 점을 전보다 잘 보게 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가만 둘러보면 근년 들어 마주치는 이들의 훌륭한 점을 잘 알아보고 뜻밖의 좋은 관계를 풀어내는 일이 종종 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세상과 화해하는 느낌을 가진 일, 이제 퇴각로에 접어들었다는 인식으로 욕심을 줄이게 된 일, 공부를 더 늘릴 생각보다 쌓아놓은 공부를 풀어내는 데 주력할 마음을 먹은 일들이 다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을 바꾼 것 같다.

 

평소에 '비판능력 결핍증'이라고 놀리곤 하던 유연식 아우에게 메일을 썼다. "근묵자 흑"이라더니 자네에게 물이 들어 나도 흐리멍덩해지는 것 같다고. 감염에 감사한다고.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날 노인, 범 안 잡은 사람 없어"  (0) 2018.12.02
돌아왔습니다.  (0) 2018.10.19
"형님은 머리보다 몸이죠~"  (0) 2018.02.18
내 번역을 폐기하겠다는 출판사  (7) 2017.10.30
어느 날  (2) 2017.09.12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