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한독당의 진로가 큰 갈림길에 선 것 같습니다. 지난 2일 소위 국내파의 아래와 같은 성명에 선생님도 참여하셨지요.

 

“우리 한국독립당은 공식적인 국제투쟁의 형해를 단연 벗어버리고 만만한 투지를 내포한 국제협의의 전위적인 진지한 건설과업만이 참으로 해방과 독립완수의 대업을 신속히 쟁취하고서 조국 조분(爪分) 민족 파멸의 위난을 구급하는 것이다. 이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한 국제협의 때문에 미소공위에의 협의와 지지는 결정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되나니 전 민족 4천년래 총 수확이 반드시 오당 본래의 의도에 달하게 함을 요청하는 것인 까닭이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6월 3일)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한독당 국민당계에서는 지난 연초부터 반탁운동의 재개에 반대하고 미소공위 재개를 환영하는 입장이었지만 선생님 본인은 민정장관 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직접 나서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명서 참여를 보고 이제 선생님께서도 한독당에서 마음이 떠나신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재홍: 어떤 한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월 10일 당 대회 이후 대다수 당원들이 절망감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이들을 ‘국내파’라 부르는데 일리가 있어요. 국민당계, 신한민족당계만이 아니라 귀국한 임정과 김구 선생을 흠모해서 모여든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니까요. 사실 중경에서 돌아온 분들과 그 주변 사람들을 제외한 ‘전 당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임정 요인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요. 세상에서는 나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쳐주기도 하지만, 나는 그분들을 지도자로 모시는 자세로 작년 봄의 합당에 임했습니다.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앞장서 나아가는 것이 지도자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지금 귀를 막고 당원들이 원치 않는 길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정청 요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내 어떤 행동도 오해나 곡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업무 수행에 필요한 일 외에는 일체 나서거나 끼어들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절망에 빠진 당원 대중들과 함께하는 자세를 보일 필요 때문에 이번 성명에 참여했죠.

 

김기협: 지난 1월 3상회담 결정과 미소공위의 전면 지지를 독자적으로 발표한 권태석 씨가 5월 10일 전당대회에서 제명되었죠. 그 한 달 전인 4월 12일 중앙위에 김구 선생 등(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황학수) 임정 요인 다섯 분이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중앙위에서 권태석 씨에게 동조하는 움직임이 보이니까 몽니를 부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5월 9일의 당 창립기념식에도 불참하고 이튿날 전당대회에도 권태석 씨 제명이 결정된 뒤에야 입장하셨죠. 그리고는 사임 이유로 “소위 간부들이 임정요인들을 무시하는 행위”를 말씀하셨습니다. 귀국 후 공식석상에서 보여준 가장 옹졸한 언동이었습니다.

 

그 날 전당대회의 150인 중앙위원 선출에서도 권태석 지지자들은 제외되었고, 그들은 나가서 민주한독당을 차렸죠. 남은 사람들 중에도 반탁 일변도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구 선생이 미소공위 참가 반대를 주장하고 있으니 불만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안재홍: 3월 28일의 각파 연석회의가 고비였던 것 같습니다. 그 전날 독립노농당 유림 씨가 한독당 지도자들의 오류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죠. “그들의 오류가 체계적으로 발전됨을 따라 군중의 시청을 현혹시키며 독립운동에 지장을 줄 뿐”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1947년 3월 28일) 임정의 옛 동지로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연석회의에서는 3상회담 결정 전면 지지를 주장하는 권태석파와 전면 반탁을 주장하는 임정파 사이에서 국민당계가 미소공위에 일단 참여하고 신탁통치 문제는 나중에 다루자는 절충안을 냈습니다. 나는 그 정도 절충안은 받아들여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절충안까지도 반탁의 배신자로 매도하고 나를 그 배후로 지목하는 것을 보며 한독당의 민주적 운영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기협: 귀국 전의 한독당이란 말이 정당이지, 망명자 수십 명의 폐쇄된 집단에 불과한 것 아니었습니까? 귀국 후에도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이 합치기 전까지는 정당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죠. 선생님처럼 임정의 권위와 김구 선생의 영도력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모여 비로소 대중정당으로서의 한독당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합당 때 중앙위원 선출에서 옛 한독당 쪽에 실제 근거에 비해 많은 지분을 주었어도 역시 ‘국내파’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상무위원과 당직은 압도적으로 그쪽에서 많이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상무위원회에서는 ‘해외파’가 우세하고 중앙위원회에서는 ‘국내파’가 다수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 선생 이하 ‘지도자’들이 당원들의 요구를 조금이라도 들어주면서 이끌어나가면 좋을 텐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요. 권태석 씨처럼 못 참고 나서는 사람에게는 “임정 요원들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펄펄 뛰고요. 이런 비민주적 태도로는 당원의 지지를 키우기는커녕 지킬 수도 없습니다. 당원의 지지가 아니면 무엇을 믿고 정치를 하려는 것일까요?

 

안재홍: 독립투사로서 김구 선생에 대한 제 존경심은 변함없지만 정치가로서 그분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을 계속 보게 됩니다. 그분은 한독당 당원들보다 한민당을 주축으로 한 반탁세력을 더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작년 봄 한민당이 한독당과의 합당을 거부한 일, 지난 가을 토지개혁에 대한 태도를 뒤집은 일에서 한민당의 본색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가 없는데...

 

반탁운동에는 한민당이 잘 따라오죠. 한독당원들보다 훨씬 더 잘 따라오죠. 그게 다 자기네 속셈이 있어서 따라오는 건데, 이승만 박사를 따라 분단건국을 바라보는 그들 속셈을 선생께서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인지... 반탁운동으로부터 ‘임정 추대’를 끌어내려 했지만 이 박사가 귀국해서 한 마디 하니까 쑥 들어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민정장관 직 수락할 때도 이미 그분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미리 의논드리지 않고 결심한 뒤에 가서 알려드린 것입니다. 지금도 반탁을 앞세워 미소공위 협의를 거부하자고 하면서 이 박사가 같은 입장이라고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이 박사는 자기 자신은 미소공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한민당과 독촉국민회 등 자기 지지세력이 들어가서 실속을 챙기게 하고 있는데. 미소공위 거부는 한독당이 따라가서는 안 될 노선입니다. 그래서 중앙위 소집을 요구하는 ‘국내파’ 성명서에 나도 참여한 것입니다.

 

김기협: 6월 4일 상무위원회에서는 국내파(이제는 언론에서 ‘혁신파’라 부르더군요.)의 중앙위 소집을 거부하고(<서울신문>, <동아일보> 1947년 6월 5일), 오늘(6월 6일) 다시 회의를 열어 “혁신파 55명에 대하여 제명 처분할 것을 전제로 감찰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의결했다는군요. (<조선일보> 1947년 6월 8일) 미소공위 참여 주장 세력을 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제명 여부에 관계없이, 한독당이 미소공위 참여를 거부한다면 선생님도 더 이상 한독당에 남아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이미 쫓겨난 권태석 씨 쪽에서는 민주한독당을 만들고 있는데 그쪽에 합류하실 건가요, 아니면 국민당을 다시 만드실 건가요? 지금 ‘혁신파’에는 국민당 출신뿐 아니라 신한민족당 출신 등 국내파가 널리 포함되어 있는데, 진로 설정을 위해 선생님을 모두 쳐다보고 있습니다.

 

안재홍: 국민당을 확장한 정당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민정장관 직에 있는 한 정당 활동을 나서서 할 수 없는 입장인 만큼 권태석 씨 쪽과 합쳐도 좋겠다는 생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더 큰 틀로 따로 만들 것을 주장하는군요. 합치더라도 그쪽에서 쫓아와 합쳐야 한다고.

 

국민당을 만들 때부터 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당장 위원장을 맡지만 내게는 지도자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 일단 국민당으로 모여 있다가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나타날 때 함께 받들기를 바란다고.

 

그래서 임정 귀국 후 국민당의 이름으로 임정 봉대(奉戴)를 외치다가 작년 초 민주의원 출범을 앞두고 임정 비주류가 이탈한 후에는 김구 선생을 받들기 위해 한독당으로 들어갔습니다. 함께 한독당에 들어간 국민당 동지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한독당을 떠나게 되었는데, 우리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김구 선생께서 우리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