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앞두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최근 3-1절까지 군중행사 때마다 좌우충돌로 불상사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4월 29일 수도경찰청의 담화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담화가 나왔다.

 

“시위행진 같은 가두행진은 어떠한 사정이 있든지 간에 절대로 금지하며 자동차를 타고가든 걸어가든 프랑카드나 그 밖의 깃발의 식장 이외 장소의 사용을 엄금한다. 그리고 중도에서 딴 단체의 간섭이나 폭행이 있을 때에는 이에 대항치 말고 경관에게 급고하고 급고를 받은 경관이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고 태만할 때에는 반드시 그 흉장번호를 기억하였다가 수도청에 보고할 것이다. 이상 주의사항에 위반할 때에는 경찰이 간섭할 것이며 특히 충돌내지 유혈극이 발생하였을 때는 경찰은 치안상 부득이 무력을 단호 행사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29일자)

 

장택상 청장 담: “메이데이 당일에 경관은 무장도 시키지 않을 방침이며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주의 사항만 지켜주면 노동자들이 자기네 명절을 순조롭고 유쾌히 보낼 수 있도록 경찰에서 책임지고 그 신상을 보장하겠다. 더욱이 용산 영등포 양서 관내는 지금까지의 불상사가 많으므로 이번에는 테러 같은 불상사가 발생되지 않도록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경관으로 순찰반을 조직하고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두 경찰서장에게 이미 시달한 바 있으니 용산이나 영등포 지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절대 안심하기 바란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4월 30일자)

 

경찰청 담화에서 경관의 직무태만이 있을 경우 보고해 달라고 한 것, 그리고 장택상 담화에서 경찰이 무장하기 않겠다고 한 것은 경찰의 편파성에 대한 의심이 쌓여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중행사 때마다 경찰이 편파적 행동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해온 것을 이번에는 미군정에서도 좌시하지 않고 엄격한 감시에 나서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 입법의원 의장과 안재홍 민정장관 등 중간파의 의지가 관철된 것으로 이해된다.

 

덕분에 메이데이 행사가 적어도 서울에서는 큰 불상사 없이 진행되었다. 5월 3일의 경무부 발표에 따르면 민-경 충돌로 인명 피해가 일어난 사건은 경주 강동면의 한 건 외에는 모두 전라남도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메이데이를 전후하여 부분적 충돌로 말미암아 사망자 경관 2명, 군중 21명을 낸 동시에 부상자 경관 3명, 군중 39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3일 경무부에서 발표한 각 관구별 치안상황은 다음과 같다.

 

제5관구: 1일 경주서 관하 강동면 폭도 약 6백 명이 강동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 2명을 살해하고 장총탄약을 약탈하므로 발포한 바 폭도 중 사망자 2명을 내었다.

 

제8관구: 1일 광양서 관하 옥곡지서를 폭도 약 천 명이 포위하고 해산 명령에 불응할 뿐 아니라 극히 험악화하고 또 광양 읍내에도 동일한 사태가 유하였으므로 부득이 발포한 바 사망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1일 장흥서 관하 장흥 읍내 군중 수천 명이 죽창 등을 휴대하고 시위행렬을 감행하여 해산 명령에 불응할 뿐 아니라 관공서 습격의 태세를 취하여 극히 험악화하였으므로 부득이 발포한 바 사망자 9명 부상자 13명을 내었다.

1일 담양서 관하 담양읍 급 남면 군중 수천 명이 시위행렬을 감행하고 해산 명령에 불응할 뿐 아니라 반항 태도를 취하며 또는 경찰관의 무기를 탈취하려 하는 등 극히 험악화하였으므로 부득이 발포한 바 사망자 7명 부상자 12명을 내었다.

1일 순천서 관하 송광지서 관내 군중 약 천명이 동 지서를 습격 방화 전멸하고 경찰관을 난타하여 경찰관 3명을 중상케 하였다.

1일 광산서 관하 군중 수백 명이 지서를 목표로 시위행렬을 감행하고 해산 명령에 불응할 뿐 아니라 극히 험악화하였으므로 부득이 발포한 바 부상자 3명을 내었다.

1일 나주서 관하 왕곡지서를 군중 약 3백 명이 포위하고 해산 명령에 불응할 뿐 아니라 극히 험악화하였으므로 부득이 발포한 바 경상자 1명을 내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5월 4일자)

 

사건 내용을 보면 군중행사의 우발적 폭력화보다 전 해 가을의 10월 사태 이래의 ‘민중항쟁’ 성격이 더 많이 보인다. 각지의 소요사태가 12월 중순까지 진압이 완료되기는 했지만 직접 원인이 되었던 경찰의 폭압성 등 사태의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데이라는 계기를 만나 또 한 차례 터져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남로당의 조직적 선동활동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적지 않은 유혈사태가 벌어진 데 반해 서울의 행사가 평화로웠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경찰의 태도가 사태의 주요 변수였음을 알려준다. 조병옥과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국가경찰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중간파의 작용으로 인해 경찰의 행동방식이 제약을 받은 것이 폭력사태를 막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메이데이 행사는 대한노총과 전평 양쪽에서 따로 열렸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노총 행사에서는 이승만의 연설과 조소앙, 신익희의 축사가 있었는데, 미국노동조합연맹(AFL,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회장 그린으로부터 온 서한 낭독이 이채로웠다.

 

세계노련(WFTU) 조사단이 1947년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조선을 다녀간 일을 3월 26일자 일기에 적었다. 그 때 대한노총 측은 조사단의 활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폈다. 대한노총은 전평보다 훨씬 늦게 결성되어 미군정의 비호 하에 전평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노동운동의 세계 최대 국제조직인 WFTU가 전평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노동조직으로서 자기네 위신에 불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사단에 참여했던 WFTU 서기장은 남조선의 노동조합운동 환경을 부정적으로 본 견해를 밝혔다.

 

“남조선의 노동조합운동, 자유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없다.”

[파리 18일 발 AFP 합동] 극동지구의 노동조합 시찰하고 당지에 귀환한 세계노련 서기장 루이 사이앙 씨는 신문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시찰할 때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일본에 있어서는 자유스럽고 민주주의적인 노조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북조선에서도 이러한 말만은 부합되었었다. 그러나 남조선에서는 그렇다고는 볼 수 없었다.” (<자유신문> 1947년 4월 20일자)

 

WFTU 조사단은 전평을 진정한 노동조합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6월에 프라하에서 열릴 WFTU 총회에 초청했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0일자) 대한노총은 남조선에서 노조운동의 환경을 망치는 어용 노조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한노총은 자기네도 국제적 배경을 확보하겠다고 붙잡은 것이 AFL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붙잡을 데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미국의 국가노조인 AFL을 배경으로 삼겠다고 나설 수 있었을까? 대한노총 지도자들은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1886년 창립된 AFL은 미국 노동운동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조직이다. 그러나 지나친 보수성 때문에 진보세력이 1935년 산업조직총회(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로 떨어져나간 후 노동운동으로서는 비정상적 수준으로 보수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1955년 CIO와 재통합해 AFL-CIO로 재편되면서 이 문제가 완화되기에 이른다.

 

또 하나 대한노총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그 결의문이다. 14개항의 결의 중 정치적 항목으로 (8) 일체 독재와 파괴를 배격하자, (9) 봉건적 착취의 탐관오리를 숙청하자, (10) 매국적 찬탁분자를 배격하자, 세 가지가 있는데, 찬탁분자를 배격하자는 말만 있고 친일파를 배격하자는 말이 없다는 점이 대한노총의 정치적 배경을 말해준다.

 

오전 11시부터 남산공원에서 열린 전평 행사는 4시경 끝났다. 이튿날 장택상의 기자회견을 봐도 정말 평화스럽게 끝난 모양이다.

 

수도청장 장택상은 2일 기자단과 회견하고 메이데이행사가 원만히 끝난 것은 다행이라고 말한 다음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문) 남산회장에서 행사가 끝난 후 학생 약 3백 명이 검거되었다는데?

(답) 검거가 아니다. 이날 밤 학생들이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상부의 연락이 있어 통행금지 시간까지 경찰서에 데려다 둔 것이며 오후11시 지나 내보냈는데 나에게 들어온 보고에는 70명 정도다.

 

(문) 남산회장에서 학생 외에 전평 조맹규 외 노동자 등 약간 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이유는?

(답) 그럴 리 없다. 검거하였으면 나에게 보고가 있을 것인데 아무 보고도 못 들었다. 이 날에 한해서는 좀 불온한 언사가 있어서도 검거치 말라고 지시하여 두었다. (<경향신문> 1947년 5월 3일자)

 

그런데 이렇게 평화로운 행사에 참석하고도 곤경을 겪은 학생들이 있었다.

 

시내 배화여자중학교에서는 지난 메이데이날 남산공원행사에 나아간 등교생 150명에 대하여 2일 학부형 동반 등교를 명하고 이를 실행치 않은 생도들에게는 수업을 거절하고 교실에서 축출하였다 한다. 그리고 다시 5일에는 직원회를 개최하고 전기 150명 중에서 7명을 주모자라고 지목하여 퇴학처분을 하기로 결정하고 6일 이를 전교생에게 발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생도 및 학부형 간에 물의가 분분하다. 이에 대하여 교장, 학부형과 퇴학처분을 받은 생도는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강래 교장 담: 생도들이 메이데이 당일 남산공원 행사에 각각 자의로 갔다면 그것은 문제 안하겠다. 단체행동을 취한 점이 문제이다. 그래서 그중 주동자라고 인정한 7명을 퇴학 처분키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처단은 교칙 중에 있는 교육상 필요가 있으면 처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적용한 것이다. 또 이와 동시에 학련에 가입한 관계로 2명이 1주일 정학처분을 받았고 선생에게 반항한 생도 3명에게 3일간 근신처분을 하였다.

 

◊ 모 학부형 담: 5월 1일 남산으로 나간 생도들은 경찰에 불려갔다가 시말서까지 써 내놓았는데 이러한 경찰의 간섭이 없도록 알선하여 준 학교까지도 있다. 이에 비추어 금번 학교당국의 이러한 처분은 학부형으로서는 대단히 부당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상사를 일으킨 학교장의 사직을 요구한다.

 

◊ 퇴학처분 받은 1 생도 담: 그날 남산공원에는 개인으로 나갔다. 여하간 퇴학처분은 너무도 억울하다.

 

◊ 문교부장 담화

메이데이기념행사에 참가한 학생에 대한 검거선풍과 퇴학처분 등 각 학교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날로 확대되고 있어 문교당국의 단호한 대책이 요망되고 있는데 문교부장은 이에 대하여 7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상이라든가 노동문제를 학구의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행동으로 나올 때에는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니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이 많은 학생을 검거한 것은 경찰당국이 응당 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문교당국으로서는 사전에 기관을 통하여 구두로 학생의 참가를 만류한 일은 있으나 검거 퇴학처분 등에 관하여 특별 조치를 한 일은 없다.”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5월 8일자)

 

시내 안국동 덕성여자중학교에서는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했던 생도 24명을 8일 돌연 무기정학 처분을 하였다 한다. (<서울신문> 1947년 5월 11일)

 

배화학교 징계사태가 물의를 빚고 있는 데 대해 학무국장과 미국인 고문의 견해가 <경향신문> 5월 9일자에 보도되었다.

 

◊ 학무국장 이덕봉 담: 메이데이날을 기하여 각 학교에서 동맹휴학을 단행한다는 정보가 있어 3차에 걸쳐 학교장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엄중경계와 메이데이 참가학생의 조사를 명하였다. 그날 메이데이행사에 참가한 중학생수는 현재까지 들어온 보고를 보면 남산에 약 8백 명이고 서울운동장에는 10명가량으로 되어 있다. 퇴학처분은 각 학교장이 하는 것이고 학무국으로서는 간섭치 않는다. 상당히 이유가 있어서 퇴학처분을 하였을 것이다. 여하간 더 조사해 보겠으며 경찰간섭은 학무국에서 요구한 일은 없고 경찰에서 후에 통고가 있어서 알았다.

 

◊ 학무국 미인 고문 마틴 담: 배화학교 퇴학학생들의 말을 들은 후 경찰간섭에 대하여 수도청장 장택상 씨를 만났는데 그는 그런 사실을 전연 모른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미국에서는 이런 행사에 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은 자기네 행동만 잘 가진다면 자유로 할 수 있다.

 

수도청장 장택상은 이 시점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개인으로 식에 참가한다는 것은 모르나 일부 학생이 무단히 교기를 들고 행사에 참가한 것은 학무당국의 요청도 있고 하여 경찰이 취체한 것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학생은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9일)

 

장택상이 경찰이 학교에 들어가 학생을 체포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을 5월 8일에 내렸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그런 행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도청장 장택상은 8일 경찰은 학원에 침입 못한다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관하 각서에 시달하였다고 한다. “경찰은 학교내부에 침입하여 학도의 체포를 금지함”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5월 9일자)

 

메이데이 참가 학생 처벌 사태에서 서울시 학무국 마틴 고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5월 10일 그의 언명은 미군정 3년을 통해 미군정 당국자의 발언 중 가장 당당한 것이었다.

 

메이데이 참가 문제로 시내 배화, 덕성, 경기 각 여자중등교에서는 참가학생을 퇴학 혹은 정학 처분하여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서울시 학무국 고문 마틴은 10일 동 사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메이데이는 노는 날은 아니나 학교당국으로서 학생의 자유스러운 참가를 금지할 권한은 없다. 참가한 학생이 정당한 행동만 한다면 무관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경찰 측과 학무당국 측에게 잘못이 있으니 경찰의 잘못은 학무당국의 허가도 없이 학원에 무단히 침입하여 학생을 검거했다는 것이고 학무국 측은 평화적인 축하행사에 학생을 못 가게 한 것과 교장이 당국의 승인도 없이 경찰을 학원에 불러들이고 당일 결석했던 학생 성명을 가르쳐 주며 경찰에 넘긴 것이다.

이러한 교육법은 중세기적 교육방침이며 아직도 학원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탓이다. 나는 이상의 잘못을 지적하여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의 무조건 복교를 명령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견해를 이해 못하는 교육자가 현 학무행정기관에 있다는 것은 심히 불행한 일이다. 학생을 메이데이에 참가했다고 퇴학을 시킨 것은 확실히 교장의 잘못이다.

학생의 훈육은 도덕적으로 해야 되며 또 이 훈육의 책임은 학교당국에 있는 것이지 경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5월 1일전에 경찰 측에서 참가학생이 잘못(데모와 파괴행동)이 있을 경우에 현장에서 검거할 수 있다는 것만을 용인하였을 뿐이지 그날이 지난 후 학원에 침입하여 검거하라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 검거된 학생 전부의 석방을 요구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경찰의 학원침입은 낡은 교육방침이라는 것을 강조하겠다. 경찰의 간섭이 있을 경우에는 다만 교외(校外)에서 발생한 사건에만 권한이 있을 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학무당국과 경찰의 잘못을 지적하고 복교와 석방을 명령했고 이 같은 취지를 각 학교에 통첩을 띄워 앞으로 이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주의시키겠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5월 11일자)

 

마틴은 이번 일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다. 이 사태를 처리할 아주 구체적인 지시문을 5월 14일 시내 각 학교로 보냈다. 너무나 당연한 내용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지시문의 각 항목이 보여준다.

 

메이데이 참가를 계기로 각 학교에서 일어난 퇴학처분 경찰간섭 문제에 대한 총결산적인 시 학무국고문 마틴의 장문의 지시문이 14일 각 중학교 교장에게 발송되었는데 이 지시문에 의하여 각 학교에서는 이번 문제를 처리할 것과 앞으로의 학원운영의 방침을 천명하였다. 지시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각 학교장은 학무국 직접 관할 하에 학교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것.

2) 각 학교장은 모든 문제의 불평을 문교부가 아니고 시 학무국에 직접 말할 것.

3) 경찰은 5월 1일 후에 구류된 전학생을 즉시 석방할 것.

4) 5월 1일에 학교를 결석하고 있다는 이유로만 퇴학시켜서는 안된다.

5) 5월 1일 전에 그릇된 일을 한 학생은 그 때에 퇴학시켰어야 할 것이다.

6) 메이데이를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죄가 드러난 학생들은 엄격한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7) 메이데이 참가가 그 학생의 유죄 또는 무죄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8) 어느 직원이라도 그들 자신이 해결할 문제를 경찰의 힘을 빌어서는 안 된다.

9) 경찰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학무국의 허가 없이 학교침입을 금한다.

10) 특별비상시에 한하여 경찰원조를 구할 것이나 반드시 학무국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경향신문> 1947년 5월 15일자)

 

같은 5월 14일 김형민 서울시장의 기자회견에서 오간 문답에서 마틴 같은 사람이 나서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창피하다.

 

(문) 메이데이 참가문제로 각 학교에 상당한 퇴학처분 학생이 나오고 있다는데 시 당국의 견해는 어떤가?

(답) 당국으로서는 학교운영이 수업충실에 있으므로 맹휴와 맹휴를 선동한 학도 등에 관하여는 학교운영상 용허할 수 없다는 취지 아래 맹휴발생 사태와 그 주모자를 항상 단속하라는 지시를 수차 발송하였다. 그러므로 메이데이든지 기타라도 생도로서 학교 방침에 반하여 학교운영에 지장을 일으키는 자는 당해 교장에게 일임하여 그 개전 여하에 따라 적당히 처치하도록 하였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5월 15일자)

 

[<자유신문> 1947년 5월 16일자에 흥미로운 관련 기사가 있어 덧붙입니다.]

 

"희생된 진명여중생들, 무조건 복교키로 결정"

메-데 기념행사에 학생 참가 문제로 제일 많은 희생자를 낸 진명여중에서는 교직원회의 결정으로 퇴학 정학한 생도 32명에게 즉시 복교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학교당국이 복교의 결정에 이른 데는 시 학무고문 마-틴 씨의 학교 처사의 부당성을 지적한 누차의 언명과 일반사회의 물의가 자못 고조된 데 기인한 것이다.

일방 동교의 처분을 당한 학부형 40여 명은 13일부터 학교 처사에 항의하여 농성을 시작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매 14일 하오 3시에는 교직원회의를 열고 8시간 동안 토의한 결과 전원 32명에 대하여 무조건 복교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농성한 부형들은 이에 안심하고 새벽에야 귀가하였는데 동교 교유 모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태의 진전에 따라 모략과 독단의 결과라는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직원의 총의로 이를 시정하였다. 이 기회로서 학원에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여 명랑한 민주학원 건설도 머지 않을 것을 믿는다."

 

"배화여중서는 50명이 수업거부"

메-데 참가 문제로 정학 퇴학 등의 처분을 한 남녀중학교 중에서 진명여중을 위시하여 다른 학교에서도 복교 기운이 보이고 있는데 배화여중에서는 퇴학 7명 정학 3명 근신 4명에 처해 있는 학생의 즉시 복교를 요구조건으로 하여 전교생 중 50여 명 학생은 방금 수업을 거부하고 있다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