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 미 국무장관이 4월 8일 보낸 미소공위 재개에 관한 편지는 소련만이 아니라 영국과 중국 외무장관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파리에서 미-영-불-소 4국 외상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에 편지라는 형식을 취한 것은 공식적 입장을 최대한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4월 19일 몰로토프 소련 외상이 미-영-중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역시 지극히 공식적인 것이었다.

 

이에 비해 5월 2일 마셜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는 개인 명의였다. 앞서의 편지가 소-영-중 3국 정부를 상대로 했던 것과 달리 이것은 소련 외상을 상대로 쓴 편지를 영국과 중국에도 참조하라고 보낸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공식 외교문서이기는 하지만 4월 8일의 편지에 비하면 보완적이고 부수적인 것이었다.

 

4월 19일자 몰로토프의 답신으로 중요한 합의는 충분히 이뤄졌음을 전제로 다음 단계의 세부적 사항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4월 19일 몰로토프 편지에서 재개 일자를 5월 20일로 명시한 것은 날짜까지도 양국 간에 합의가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4월 11일자 일기에 인용한 4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5월 30일”로 되어 있었던 것은 <자료대한민국사>의 착오다. pdf 파일로 찾아본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기사에 모두 “5월 20일”로 되어 있다.)

 

[워싱턴 3일발 AP 합동] 마샬 미 국무장관은 공위재개에 관한 몰로토프소련외상 서한에 대하여 개인적 명의로 3일 야 회한을 전달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공위 재개 전에 조선 문제에 대한 미소 양측의 대립을 해결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인 바, 마샬 미 국무장관은 장차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 외상에게 그 서한에 사용될 언구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요구하는 동시에 마 미 국무장관은 이에 대한 미 측의 해석을 부하였다 한다. 동시에 마 미 국무장관은 공위재개에 있어서 미소 양국이 상호적 합의를 보았다는 사실을 모 소 외상이 가급적 속히 확인 회답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미 측은 만약 이 회답이 없거나 또는 양측 대립이 공위 재개 전에 해결되지 않으면 미 측은 공위 재개에 찬동치 않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금반 마 미 국무장관의 서한 내용은 여좌하다. (...) (<동아일보> 1947년 5월 4일)

 

5월 20일의 미소공위 재개는 이미 4월 19일 몰로토프 서한으로 분명해져 있었는데, 5월 2일 마셜의 답신으로 완전히 확정되었다. 조선 정치계도 이제 이 일정을 전제로 활동 방향을 잡게 되었다.

 

이북 정치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는지는 재개된 미소공위에 대한 참여 방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재개 후 협의에 참여한 단체는 이남에서 425개였는데 이북에서는 38개뿐이었다. 그리고 이 38개 단체는 세워질 국가의 형태와 정책에 관한 미소공위의 질문서에 단 하나의 공동 답변서를 제출했다.

 

건국 방향에 대한 이북 주민들의 민의가 단 하나의 통로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이 통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전혀 없었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하나의 통로만이 나타난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민 대다수가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뤄진 결과이기도 할 것이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억압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억압과 합의가 각각 어떤 비중이었는지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이남에 비하면 권력의 억압이 적었던 것이 분명하다. 소련군의 역할이 미군에 비해 작았고, 이남과 같은 거대한 국가경찰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남에 비해 정치적 합의가 훨씬 잘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남 정계의 반응이다. 이남 정계에서는 통일국가 건설보다 미국에 의존하는 국가를 세우기를 원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미소공위의 성공을 꼭 바라지 않는 세력이었다. 조금 다른 입장이지만 김구 세력도 좌익이나 중간파처럼 미소공위를 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좌익과 중간파는 미소공위 성공을 함께 바라는 입장이면서도 원하는 결과에 대한 폭넓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남의 여러 정파는 미소공위에서의 발언권을 늘리기 위해 온갖 단체를 만들어 참가를 신청했다. 일차 참가한 435개 단체 중 허위단체로 판명되어 먼저 탈락한 3개를 뺀 432개 단체가 각각 대표한다고 주장한 회원 수를 합산하면 64,810,400명, 이남 인구의 3배에 달했다. 제2차 미소공위의 실패 원인 하나는 허위단체를 철저히 규명해서 배제하자는 소련 측 주장을 둘러싼 것이었다.

 

이런 혼란상이 회담에서 미국 측에게 불리한 점이었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의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주민의 의견 수렴 절차가 있었던 반면 비슷한 시기 이남의 입법의원 선거에는 그만한 의미가 없었다. 민선 절반 관선 절반의 입법의원의 권위는 미군정 스스로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남 주민의 민의는 조정되지 않은 채로 수많은 단체를 통해 제각각 미소공위에 고개를 들이미는 형편이었다.

 

4월 19일자 몰로토프 서한에서는 미소공위가 7, 8월 중에 회담 결과를 미-소 양국 정부에 보고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5월 20일 재개한 회의가 늦어도 7월 중에는 마무리될 일정이다. 미군정 당국자들은 그 전에 남조선의 보통선거를 통해 남조선 민의를 미소공위에 강력하게 제기할 수 있기 바랐다. 그래서 선거법 제정을 서둘렀다.

 

러치가 3월 14일 입법의원에 보낸 선거법 제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3월 28일자 일기에서 소개했다. 그 편지 끝에서 러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관선 반 민선 반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못됩니다. 과도입법의원의 제일목적은 총 민선에 의한 입법의원이 설립되도록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으니 다른 모든 것을 보류하고 총선거법을 제정하기 바랍니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18일)

 

미소공위 속개 일정이 잡히고 보니 러치는 더욱 다급해졌다. 그는 5월 8일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조속한 기간 내에 선거법을 제정 실시키 위하여 본관은 이미 입의에 초안까지 작성 제출한 바 있다. 입의로서는 속히 이 법안을 통과시킬 것을 희망한다. 일부 인사들은 보선법을 제정하기 전에 우선 헌법 부일협력자법안부터 제정하려고 하는데 나는 이에 반대한다. 이들 법안은 장시일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선법을 통과시킨 후에 해야 될 줄로 안다. 정치가들이 내 의견에 반대가 많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보선법이다. 본관은 이미 수차나 6월 30일까지 보선법을 제정치 못하는 경우에는 군정법으로서 발표하겠다고 언명한 일이 있다.

입의에서는 6월 30일 이전에 동 법안을 통과시킬 것을 희망한다. 얼마 전에 미 국회는 희토(希土, 그리스와 터키) 원조안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그때에 어떤 의원은 희토 원조에 있어서 6개 조건을 제출한 사실이 있는데 그중 한 조건은 그리스 정부의 요직은 선거에 의하여 결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희토 문제가 일단락되면 조선 문제가 미 국회에 상정될 것이다. 속히 조선에도 선거법이 제정되어 선거가 실시된다면 미 국회에서 조선 문제를 토의할 때에 유리할 것이다.

현재 입의는 반이 민선인데 전원이 선거에 의한 의원이라야 되겠으니 속히 보선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미소공위가 재개될 것을 희망하는 바이며 조선정부의 행정주석이 선거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공위 재개 시에서도 조선 문제가 유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서 본관은 보선법 제정이 다른 문제 때문에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7년 5월 9일)

 

때마침 미국의 대 조선 원조에 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워싱턴 9일발 AP합동] 대 희토 원조안을 심의 중이던 미 하원은 8일 최후적 표결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와 동시에 대 남조선 7천5백만 불 원조안도 8일 국회에 상정되었다 한다.

 

이 기사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자료대한민국사>에는 이 기사가 <동아일보> 1947년 5월 8일자로 표시되어 있는데 사실은 5월 10일자에 “금년 원조 7천5백만 불, 미 국회에 정식 상정”이라고 나온 기사다. 그리고 위 내용은 기사 본문이 아니라 제목 밑에 큰 활자로 뽑아놓은 요약문인데, 본문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없다.(사진 참조)

 

미국의 남조선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 이야기는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 발표 이후 나온 것으로, 소련과의 협조에 구애되지 않겠다는 공세적 노선의 일환이다. 따라서 미소공위가 성공할 경우 일방적 원조정책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었다. 4월 19일 몰로토프 회신 직후 미 국무부 대변인의 이런 논평이 있었다.

 

[워싱턴 25일발 AP 합동]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대한 몰로토프 소 외상의 제안에 관련하여 미 국무성 대변인은 여좌히 관측하고 있다. 즉 남조선 재건에 대한 미 측 원조안은 금반 소련 측 제안으로 말미암아 수정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모 소 외상은 그 제안에 있어서 미소 양국은 조선을 민주주의적 독립국가로 회복시키고 조선의 경제문화를 향상시킴으로써 조선인민에게 원조를 부여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만약 이것이 소련 측의 조선에 대한 미소 양국 공동원조의 암시라고 한다면 현재 미 측이 고려하고 있는 대 남조선 원조안은 변경되어야 할 것이며 또 만약 소 측도 조선에 대하여 원조를 부여한다면 미 측의 조선에 대한 원조의 필요성도 삭감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상해에서 미의 대남조선원조액은 6억불에 달할 것이라는 트루만 미 대통령의 언약이 있다고 발표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상원의원 버드는 상원에서 만약 이러한 사실이 트 대통령으로부터 언약되었다면 미 국회는 이 사실에 대하여 통지를 받아야 할 것이고 만약 이 박사 언약이 정확치 않았다면 이것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언명한 바 있었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6일)

 

남조선 원조 정책이 공위 재개에 따라 보류될 것이라는 국무성 대변인의 논평은 5월 중순에 다시 전해진다.

 

[워싱턴 15일발 AP합동] 미 국무성 대변인은 공위 재개와 대 남조선 원조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소 양국이 공위재개를 결정하였다는 것은 미국이 남조선을 경제적으로 자립시키기 위하여 고려되고 있는 7,500만불 원조부여안이 연기 보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남조선 재건안은 국회가 휴회하기 전에 공위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당분간 보류될 것이다. 한편 현재 국회는 7월 31일 휴회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데 국회 휴회 후에는 남조선 원조안은 국회가 재개될 때까지 가결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5월 16일)

 

트루먼독트린에 의거한 미국의 공세적 정책에서 ‘원조’ 형태의 돈이 중요한 무기였다. 소련이 이 시점에서 미소공위 재개에 적극적으로 나온 이유도 미국의 원조 공세에 대한 대응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러치가 선거법 제정을 재촉하면서 ‘원조’를 들먹인 것도 무기로서 돈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입법의원에서는 김규식 의장을 위시한 중간파가 선거법보다 친일파 특별법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버티고 있었다. 5월 들어서도 여러 차례 회의가 특별법안 수정을 둘러싸고 공전되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러치는 5월 13일 다시 서한을 보냈다. 5월 8일 담화문과 대략 같은 내용이었다.

 

친일파 특별법 없이 선거법이 제정되기를 바라던 세력에서는 신이 나서 러치의 재촉에 편승하고 나섰다. 이승만이 그 날로 발표한 성명 중 뒷부분을 옮겨놓는다. 선거법 제정을 늦춘다는 이유로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민족분자로 몰아붙이는 논리는 반공을 기준으로 민족주의자들을 단죄하는 틀로 이어지게 된다.

 

“과도입법의원의 책임은 정식입법의원을 성립하는 데 있거늘 그 직책을 버리고 딴 문제로 세월을 허비한다면 세인이목에 한인들이 민주정치를 진행할 능력이 없다는 조소를 면치 못하리니 입법의원은 하루바삐 그 직책을 실행해야만 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독립을 지연하는 죄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방들의 협의로 총선거권을 행하기로 작정되어 각국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우리가 이것을 못해서 군정발령으로 선거를 행하게 된다면 이는 한인들의 명예나 권리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이 있을 것을 누구나 생각하여 볼 것이다.

 

이런 정세 하에서 종시도 각 정당이나 개인관계로 총선거법안을 통과치 못하면 우리는 좌우익을 물론하고 입법의원 제씨가 국권회복을 방해하는 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일반 동포는 이분들에게 방임치 말고 무슨 방법으로든지 하루바삐 보선법안 통과하기로만을 결심하고 매진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14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