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미국을 떠난 이승만은 도쿄와 중국에 들러 맥아더와 장개석을 만나고 4월 21일 귀국했다. 장개석의 전용기에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지청천)을 대동한 당당한 위세였다. 트루먼독트린의 발표와 미국의 대규모 경제원조 논의가 그 위세를 더욱 당당하게 했다. 이승만은 귀국 이틀 후인 4월 23일에 대 국민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동안에 국내동포들이 전국적으로 후원하신 결과로 우리의 해외활동이 많은 도움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미국에 가서 가장 역설한 바는 해방 후 1년 반이 지나도록 한인의 독립정부가 없이 군정청 관리 하에서 민생 곤란과 국제상 중요문제의 해결책이 없이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니 하루바삐 자치자주하는 정부수립이 필요하며 따라서 동서양 모든 점령국이 다 총선거를 행하여 정부를 조직하였고 심지어 전패국인 일본까지 총선거로써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군정 관리를 받게 됨은 사실상으로도 불공평함이니 우리 민족 전체는 무슨 방식으로서든지 더 기다리지 않을 결심이란 것을 선언한 바 미국의 당국과 모든 공론이 다 우리의 주장을 옳게 시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

지나간 1년 동안을 두고 정부수립에 노력하여 인내하여 왔으나 하나도 성공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완화 정책으로 인하여 실패된 것인데 지금은 이 정책이 변경한 결과로 우리 총선거에 의하여 정부를 수립할 계획에 모든 장애가 다 빙소설해(氷消雪解)하게 된 것입니다.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에 민주정체 건설을 절대지지하며 국무성당국 모씨는 한국에 총선거로 독립정부를 수립함에 찬성이고 중국은 장 주석 이하 정부당국과 민중여론이 다 동일히 만강열정을 표하며 맥아더 장군은 나와 2시간 동안 담화에 한인들이 자치자주할 능력 있는 것과 권리사용의 필요는 누구나 인정치 않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워싱턴에서 하지 중장과 나와 협의된 것이 더욱 충분하여 입법의원을 통하여 총선거제도 통과의 필요를 역설하므로 나의 회환이 심히 긴급함을 나는 느낀 것입니다. (...)

과도정부 수립에 대하여 다소 문제점이 있었으나 우리의 주장하는 바는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위선 남조선에서 내치외교상 문제를 해결하며 남북통일을 미소 양국과 연합 각국으로 교섭 개방할 계획이니 서북동포들도 이것을 절대 지지하는 것이 하루바삐 38이북을 해방하는 첩경이라 합니다. (...)”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4월 26일자)

 

넉 달 전 미국으로 떠날 때 이승만은 불리한 입장에 몰려 있었다. 하지를 비롯한 미군정 당국자들의 신뢰를 잃은 것이 제일 심각한 문제였다. 1945년 10월 중순 이승만 귀국 때는 그를 깍듯이 받들던 하지가 1946년 6월 단독정부 구상을 밝힌 ‘정읍 발언’ 이후로는 중도파를 앞세운 좌우합작에 치중하며 그에게는 주변적 역할밖에 맡기지 않을 기색이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지지 없이 힘을 쓰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하지보다 더 윗선을 잡으려고 미국에 간 것이다.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맥아더에게 매달려봤지만 잘 만나주려 하지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2시간”이나 담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위 성명서에서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트루먼독트린으로 인해 맥아더도 새로 이야기 나눌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는 길의 면담 상황은 이랬다.

 

이승만은 12월 4일 동경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시간이 없다며 이승만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지만, 이승만은 동경에서 하루를 더 묵어 ‘눈총을 받아가면서’ 맥아더를 몇분간 만날 수 있었다. 하지의 지적처럼, 이승만은 맥아더를 잠시 만났다는 사실을 과대포장해서 맥아더와 주한미군정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나아가 한국인들에게 주한미군정 즉 하지와 그의 정책이 본국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맥아더와의 짧은 면담을 이용했던 것이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636쪽)

 

이승만은 도쿄에서 출발을 하루 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맥아더가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만남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 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와의 만남 자체에 1차적 의미를 부여했고, 어찌 보면 면담 내용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맥아더를 만났을 때 하지의 중간파 지원을 용공정책이라며 이를 철회시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후 자신의 주장을 맥아더의 의견인 양 왜곡해서 선전함으로써 이때의 면담을 하지 공격의 재료로 사용했고, 맥아더의 자신에 대한 지지를 과장했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202쪽)

 

맥아더에게서도 지지를 얻지 못한 채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하지와 미군정 비난에 열을 올렸다. 공화당의 극우파의 지지를 얻는 데 노력을 집중한 것이다. 그 성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대 조선 정책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의 불신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의 미국인 보좌관 올리버가 몇 달 후 그가 미국 정책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촉구하던 일을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 131쪽에 이렇게 적었다.

 

7월 21일 나는 다음과 같은 회신을 (이승만에게서)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변명이나 굴복으로 느끼도록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바라던 바의 대강을 성취시킨 내용이었다.

 

“우리는 과거에도 언제나 그러했듯이 지금도 한국 분단의 종식과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을 위해 한-미 협력관계를 지지함. 하지 장군과 기타 인사들도 총선거 실시에 동의하였음. 따라서 우리는 그 일을 준비 중임. 미소공동위원회 결과가 만족스럽게 되면 우리의 계획은 포기하겠음. 신탁통치가 발표되었을 때 데모는 시작된 것이고 때때로 반복되었음. 우리는 미국이 우리에게 신탁통치를 떠맡기려고 한다고 믿지 않음. 아무도 우리가 미국을 반대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임.”

 

이 전문은 워싱턴에 번지고 있던 리 박사에 대한 노여움을 풀어주게 되리라 믿어졌고 사실상 누그러뜨리는 어떤 효과가 있을 듯싶었다. 여기에 언급된 선거라 함은 하지 장군의 승인을 얻어 과도입법위원이 의결한 하나의 계획으로서 남한에서 제한된 자치권을 행사할 과도적인 한국정부 선거를 목적으로 남한에서 가을 어느 시기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요구한 내용의 건이다.

 

2월 중순 미국으로 건너갔던 하지는 이승만과 거의 같은 때 미국을 떠나 4월 5일 서울에 귀임했다. 두 사람이 함께 워싱턴에 있는 동안 직접 충돌은 없었고, 상황과 전망에 대해 상당한 인식을 공유한 것처럼 나타났지만, 하지 마음속의 이승만에 대한 앙금은 쉽게 지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동안 이승만을 겪어 보며 그 사람됨을 웬만큼 파악해 놓기는 했어도 막상 자신을 용공분자로 몰아붙이고 해임 운동을 벌이는 데는 진짜 황당했을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하지의 행동에 작용했을 가능성을 정병준은 지적한다.

 

좀 더 정확히 하지가 이승만에게 분노하기 시작한 시점을 찾는다면 이승만이 12월 중순에 맥아더-국무부를 상대로 관선 입법의원 문제, 민주의원 해산 문제로 하지를 공격했을 때부터였다. 1947년 1월의 반탁 시위를 막는 데 성공한 하지는 즉각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미군정의 정책 방향을 조정하는 문제였으며, 둘째는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 복수의 문제였다. 1947년에 미군정이 김규식과 서재필을 남한 최고 지도자로 내세우려 시도했던 데는, 1947년 초반 하지가 느낀 개인적 배신감이 큰 작용을 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50쪽)

 

정용욱의 관점도 정병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행 직전 이승만의 입지가 위축되어 있었음을 설명한 뒤 미국행의 동기를, 그리고 그 성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상태에서 국내에서 이승만이 자신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향한 그의 선전활동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이 임영신, 굿펠로 등 워싱턴에 있는 그의 로비스트들이 그의 방미를 만류하고 국내 활동에 집중해 줄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국행을 결심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즉 이승만 방미의 배경에는 단정안을 본격적으로 선전할 기회를 마련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든지 미국의 대한정책, 구체적으로는 그 집행자인 하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으로 보다 상위의 선을 찾아 나섬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11월 5일의 미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가 이승만의 도미 의지를 고무하였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나의 미국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은 공화당원이다. 하지는 민주당원이다. (...) 그러나 이제 공화당이 정권을 장악했다.”며 공화당의 승리를 환영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195-196쪽)

 

이승만은 그를 지원해 주던 미국 내 극우 반공 언론의 대소 강경 태도와 반공 선전에 편승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선전의 효과를 얻었다. 어떤 반공활동이라도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극우 보수 계열 신문들이 이승만과 임영신의 선전활동을 도왔다. 특히 맥코믹-패터슨사와 하워드사, 허스트사의 주요 인사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 <타임>지의 헨리 루스는 임영신을 위해 록펠러센터에 사무실까지 내주었다. 이승만은 미국 극우 반공적 언론사의 기자들을 항상 주위에 둠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외교활동과 선전에 적절히 이용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허스트사의 레이 리처드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미국 정부 내 대한정책 관련자들을 향한 로비활동에서 구체적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국무부는 그의 주장을 무시하였고, 그의 접견 요청에 응하지조차 않았다. 국무부 관리의 논평에 의하면 “이승만은 한국에서는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세력을 유지할 새로운 수단을 궁리 중이다. 국무부의 희미한 고개짓은 어떤 것이든 부여잡고 이용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205-206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