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자 일기에 적은 것처럼 미소공위 재개에 관한 마셜 미 국무장관의 편지에 대한 몰로토프 소 외상의 답신 내용이 4월 23일 밝혀졌다. 미소공위 공전의 책임을 여전히 미국 측에 미루고 있기는 했지만 5월 11일로(당시 기사 중에는 5월 20일로 인용된 것도 있음.) 재개 날짜를 명시한 것, 그리고 7, 8월경 양국 정부에 결과를 보고하게 한다는 것을 보면 재개 의지가 분명하다. 마셜의 4월 8일부 편지에서는 재개 날짜로 5월 30일을 제시했었다.

 

몰로토프의 답신이 알려지자 미소공위 재개를 환영하는 중도파의 담화가 줄을 이었다.

 

◊ 안(재홍) 민정장관 담: “조선의 독립이 미소양국의 협조에서 성취되리라는 것이 나의 국제정세에 대한 굳은 견해였는데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양국 중앙정부사이에 좋은 원조가 있어서 된 것을 기뻐하며 구체적인 발표는 상보가 있은 후에 말하겠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4월 24일자)

 

◊ 근로인민당 여운형 담: “5월 20일에 재개하자는 소 측 제안을 미 측이 수락함으로써 속개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삼상결정 발표 직후에는 국제정세에 어두워서 그 내용도 잘 검토도 해보지 않고 찬성하는가 하면 또 이를 반대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흥분을 하지 말고 좌우지도자들이 공위가 성공되도록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또 전번에는 조선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 손님들이 주인의 말은 듣지도 않고 싸우다가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우리는 조선민족의 주체성을 견지하고 오는 손님들에 대해서 주인노릇을 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4월 24일자)

 

◊ 좌우합작위원회 박건웅 담: “우리 민족이 기대하던 미소공위는 이제 미소양국의 세계평화수립을 위한 우호협조로 인하여 기어이 재재하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 민족은 모름지기 민족내부의 통일단결을 강화하여 미소양국의 공간이 되어 공위가 성공되도록 필사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5일자)

 

좌익 측 담화 역시 미국과 우익에 대한 공격을 품고 있기는 해도 기조는 환영이었다.

 

◊ 민주주의민족전선 담화 : “이것은 사상회의의 부차적 성과로서 우리 민전의 옳은 노선과 실천의 정당성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며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반동음모의 정체를 여지없이 폭로 분쇄하였다. 몰로토프 외상의 지당한 주장을 전적으로 환영지지하는 바이며 동시에 이 원칙에 입각하여 공위의 재개와 더불어 민주통일정부가 수립되는 날까지 민주역량을 다하여 더욱 과감한 투쟁을 전개할 결의를 굳게 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5일자)

 

◊ 남로당 성명: “이번 몰로토프 외상의 서한과 지난번 마샬 국무장관의 삼상결정 준수 서한은 소미공위의 급속한 재개가 확실시되고 있음을 다시금 우리 민족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 당은 조선의 민주독립을 원조할 연합국이 의사표시 자유의 원칙을 반 연합국적 반 삼상결정적인 군국주의 일본의 잔당들에게까지 지나치게 적용하여 모처럼 다시 열릴 공위의 사업이 방해되지 않도록 신중히 고려하며 따라서 삼상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 실천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광범위로 협의의 대상으로 참가시키기를 절망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5일자)

 

이에 비해 우익 측 담화는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미소공위 재개를 마지못해 환영하는 시늉은 하면서도 조건을 붙이고 토를 달았다. 이승만의 측근으로 미국에 있던 임병직은 특히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밝혔는데, 국외에 있기 때문에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워싱턴 23일 UP발 조선] 당지 한인위원장 임병직은 몰로토프 소련외상이 조선의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망하였다는 보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련 측은 상금 공산주의자만이 조선정부 조직에 발언권을 가질 것을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몰로토프 씨의 제안이 수리된다면 조선은 모스크바에 의하여 지배되는 공산주의자의 괴뢰국가가 될 것이다. 남조선에 자유선거를 거행하는 것을 지연시켜서는 아니될 것이다. 몰로토프 씨는 남조선에 민주주의정부를 수립치 않은 것을 미국의 책임이라고 말하였다. 여차한 비난은 행동으로 대항하여야 한다. 남조선에 민주주의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전조선의 통일 급 완전독립을 향하여 취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조치이다.” (<동아일보 1947년 4월 24일자)

 

◊ 민족통일총본부 선전부 담: “첫째 의사표시의 자유를 보장할 것 둘째 조선을 포함한 4대국의 협의로서 조선 문제를 해결지을 것 이러한 조건 하에 공위재개를 찬성한다. 그러나 미소간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공위는 성과를 이루지 못할 것을 부언한다.”

 

◊ 민주의원 선전부 담: “미소공위 재개를 찬성함에는 반드시 조선의 즉시 자주독립과 UN참가를 조건으로 하여야 한다. 또한 몰로토프 외상은 동 회담 결렬의 책임을 미 측에 전가하고 있으나 이는 부당하다고 본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5일자)

 

◊ 한민당 함상훈 담: “몰로토프 소련외상의 서한을 보면 미소공위 결렬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소 측에 있다. 작년 정월에 열렸던 미소공위서 38선 철폐에 관하여 미 소 양측대표가 서로 합의를 보았던 것인데 북조선주둔군사령관은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에 반대하여 하등 결말을 짓지 못하게 하였으며 작년 3월에 열렸던 공위에서는 소 측은 의사표시의 자유를 유린하여 반탁을 주장하는 정당 급 사회단체의 임정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조선 대다수의 의사를 무시하여 미소공위는 드디어 5월에 결렬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금반 마샬 서한에는 조선을 UN의 일원이 되게 하자고 명기되어 있는데 몰로토프 서한에는 이 점에는 추호도 언급하지 않고 다못 모스크바협정을 정확히 이행한다는 근거 밑에 공위를 재개하자고 하였으니 작년 5월 결렬시와 기 정세에 있어 조금도 변함은 없으나 5월 20일에 속개하자는 것과 7·8월에 임정조직에 관해서 상의하는 동시 과거의 사업을 재검토하자 하였으니 공위는 속개될 것으로 관측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4월 24일자)

 

이상 한민당-이승만계는 친미-반소의 입장을 기조로 하는데, 임정-한독당계의 반응은 이와 차이를 보인다. 반탁운동에서 보조를 함께 해 온 두 세력이 건국 방안을 놓고 입장이 갈라지기 시작하는데, 이번 미소공위 재개에 대한 반응에서 처음으로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조소앙의 담화에서 “책임전가 문제나 민주정당의 해석 문제”를 짚어 한민당-이승만계를 반박한 점이 눈에 띤다.

 

◊ 국민의회 의장 조소앙 담: “책임전가 문제나 민주정당의 해석 문제는 고만두고 미소 양방의 합치점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요구점에 합치되어야 할 것이다. 즉 미 영 소 3방면의 평등적 합리적인 일치점은 반드시 선 독립 후 원조의 방침을 사용하는 데 있고 선 탁치 후 원조에 구할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5일자

 

◊ 한국독립당 엄(항섭) 선전부장 담: “한국의 민주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미소공위 재개를 제안한 소련외상의 회한은 반가운 일이다.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선택하는 권리를 존중한다. 국제헌장과 자기의사발표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주장함과 동시에 만났다가 물러가는 공위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7년 04월 24일자)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 두어 달 후 귀국한 이래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한 살 아래인 김구가(1876년생) 이승만을 ‘형님’으로 모시는 모양새였고, 반탁운동이 협력관계의 기본 틀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탁’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있었다. 김구는 미-소의 영향력을 모두 물리칠 것을 주장하며 “즉시 독립”을 외친 것이므로 그의 반탁은 액면 그대로의 반탁이었다. 반면 이승만의 반탁은 모스크바협정에 따른 연합국 공조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미국의 영향 아래 밀어 넣기 위한 계략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를 이용하는 데 자신이 있었던 이승만은 조선을 미국의 영향 하에 두는 것이 자기가 권력을 쥘 수 있는 길로 보았다.

 

이 차이가 통일건국의 길과 분단건국의 길로 갈라진다. 1946년 초의 제1차 반탁운동 때는 이승만의 분단건국 노선이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6월 ‘정읍 발언’ 이후 이승만은 분단건국 노선을 명백히 드러내고 추진해 왔다.

 

김구가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은 1948년 1월 중도파의 남북협상론에 가담할 때의 일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는 이 결별이 왜 그렇게 늦었냐는 것이다. 1947년 4월 이승만의 귀국 때까지도 이승만의 분단건국 노선이 되돌릴 수 없는 길이 되어버린 사실을 김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김구는 자신이 이승만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승만의 방미 중 반탁운동을 빌미로 독촉국민회, 민통 등 이승만 휘하의 극우조직을 국민의회에 통합하려 시도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이승만처럼 외길에 매달리는 사람은 적을 많이 만들 것이므로 언제든지 자기가 나서기만 하면 이승만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을 여우로, 자신을 호랑이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책략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김구도 이승만과 ‘오십보백보’로 봐야 할 것이 아닐까? 김구의 책략이 이승만처럼 악착스럽지 않았다는 점, 김구가 민족주의자로서 투철했다는 점, 그리고 역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동정한다. 그러나 1946년에서 1947년에 걸쳐 민족 지도자로서 그가 맡은 역할에는 냉철하게 살펴볼 점이 많다.

 

1947년 2월 이후 임정 출신의 김구 세력은 국민의회를 내세워 우익을 ‘임정 봉대(奉戴)’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비상국민회의를 모체로 민통과 독촉국민회를 통합하고자 발의된 국민의회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다고 하지만 지도부가 임정 요인들로 구성되었다. 실제 지도력은 김구가 장악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지난 1일 전국국민대표자대회에서 대한임정을 봉대하는 동시에 국민의회로 하여금 대한임정을 확대 강화하라는 건의문을 받은 국민의회에서는 3일 하오1시부터 시내 운현궁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긴급대의원대회를 비공개로 소집하고 대한임정 확대 강화에 대하여 신중히 토의한 결과 우선 대한임시정부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는 동시에 국무의원에 장건상 김붕준 차이석 김원봉 김성숙 성주식등 6씨 대신에 오세창 김창숙 박렬 이청천 조만식 이을규 등 6씨를 보선하였다 한다. 그리고 각 부장의 개선은 주석 부주석에게 일임하고 곧 그 인선을 결정하여 국무위원회의를 통과시켜 발표하게 되리라 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3월 5일자)

 

4월 24일 이승만의 담화 중 중경 임정에 대한 언급은 이 움직임에 대한 견제로 보인다.

 

“중경으로부터 들어온 임정이 조선 정부가 아니라는 것은 벌써 김구 씨도 서명하고 이것은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으니 응당 소멸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기구로써 독립운동을 위한 협의체로는 할 수 있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4월 24일자)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 이래 임정과의 관계를 자기 위상 확보에 활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임정에 매이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가 미국에 있는 동안 김구 세력이 재편하고 설정한 조직과 노선을 거부한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국민의회 측에서는 이승만의 국민의회 주석 위치를 확인하고자 했다.

 

국민의회에서는 26일 하오1시 동 회의실에서 긴급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이박사의 발표한 임정성격문제에 관하여 토의하고 이박사의 주석취임을 촉구하고자 교섭위원으로 조소앙 김승학 박윤진 등이 28일 상오9시 이 박사를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바 그 귀추는 주목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7년 4월 27일자)

 

양측은 4월 29일에 마주쳤다.

 

지난 3월 3일 국민의회에서는 주석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임정의 강화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이 박사는 귀국 후 임정 문제를 보류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어 국민의회에서는 29일 오후1시 이 박사 출석 하에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동 회의에서 이 박사는 주석취임을 정식 거절하였다 하며 조완구 조경한 황학수 등 제씨는 임정적극추진을 주장하였다 하는데 결국 국민의회의 기구만은 독립운동의 조직체로 지속하기로 되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30일자)

 

이승만은 29일 오후 중 민주의원 회의에 참석하여 체미 중의 경과보고와 금후 노선에 관한 설명이 있었는데 동 연설 중에서 이 박사는 우리가 미국과 합작하여 조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현 미 정책은 우리에게 호전되고 있으니 임정봉대 문제는 보류하고 우선 미군과 합작하여 속히 보선법을 제정하고 총선거에 의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과 이 정부로 하여금 UN에 참가케 하여 남북을 통일시키고 자주독립을 촉진시킬 것 그리고 동 정부의 UN참가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현재 미국에서 임영신 여사가 활약 중이라는 것 등의 발언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국민의회에서도 동 하오1시반부터 이 박사를 위시하여 오세창 조소앙 조완구 등 동 국무위원 13인 상임위원 16인 급 독촉국민회 대표 12인 참석 하에 회의를 개최하고 이 박사의 외교보고와 태도표명이 있었다는데 임정봉대 운동의 주동력이 되어오던 국민의회가 앞으로 이러한 이박사의 노선에 추종해갈는지 또는 임정봉대를 고집하여 독자적 입장을 취해갈는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7년 4월 30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