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 때 하지는 이승만을 대단히 깍듯하게 모셨다. 맥아더가 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도쿄까지 날아가 이승만을 영접한 셈이다. 이승만의 입국 다음날인 17일에는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을 ‘배석’하는 자세를 취했고, 20일의 연합군 환영대회에서는 이승만을 주인공처럼 내세우고 그의 연설 동안 부동자세로 ‘시립’하기까지 했다. (1945년 10월 15일자 일기)

 

맥아더가 이승만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가 간절히 바라는 미-소 관계 악화에 필요한 사람이 이승만 같은 반공-반소주의자였다. 맥아더의 역할과 성향을 파악한 이승만은 일본 항복 직전부터 맥아더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이승만 귀국에 결정적 도움을 제공한 인물은 맥아더였다. 맥아더 문서철에서 찾을 수 있는 양자의 첫 번째 접촉은 1945년 7월 말이었다. 이승만은 1945년 7월 27일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한인들이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소련의 방해를 받아 참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이승만은 당시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에게 필리핀의 로물로 장군이 자신의 마닐라행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해줄 것이며, 자신은 마닐라에서 한국인을 향해 방송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반소 태도는 ‘아시아 우선주의자’로 반소-반공과 대소 봉쇄 정책, 나아가 반격 정책을 신봉했던 맥아더의 주목을 받았다. 맥아더는 7월 30일자로 이승만의 “숭고한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답전을 보냈다. 이후 맥아더에게 보낸 8월 27일자 전문에서 이승만은 보다 강력한 반소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28-429쪽)

 

도쿄에 막 부임해 아직 가용자원을 충분히 점검하지 못한 시점의 맥아더에게는 이승만과 같은 반소 전선 지원자가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에게도 상관인 맥아더의 신임을 받는 조선인 지도자의 존재가 반가웠을 것이다. 이승만 덕분에 자기 임무가 쉬워질 것이라고 하지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신념에 의한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책략을 위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점에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이승만은 어떤 원칙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의 책략 때문에 미군정의 입장이 어려워지는 일이 갈수록 늘어났다. 하지는 점차 이승만의 역할을 주변적인 것으로 제한하려 했고, 1946년 말 이승만의 미국행을 권한 것도 이승만이 현장에서 빠져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의 태도 변화에 이승만은 물론 불만이었고, 미국으로 갈 때는 하지와의 결별을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하지는 이승만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포고(1947년 1월 25일)한 직후 굿펠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늙은 개자식(the old s.o.b.)이 나에게 한 배신행위는 삭이기 힘들고 비통한 경험”이었다고 쓸 정도로 이승만에게 격분해 있었다. 하지는 자신이 이승만의 도미를 주선했는데, 떠나고 난 뒤에야 이승만의 주된 도미 목적이 자신에 대한 신임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남한 단정을 수립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고 분해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49-650쪽)

 

하지의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이 김규식과 서재필을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미군정의 시도로 이어졌다고 정병준은 보았다. 그러나 김규식과 서재필 두 사람의 경우는 서로 크게 다른 것이었다. 김규식의 경우는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중간파(중도파)를 둘러싼 미군정의 정책노선이 걸려 있는 사안인 반면, 서재필의 경우는 이승만 한 사람을 서재필 한 사람으로 대치하는 개인의 문제였다. 오늘은 서재필의 귀국에 관해 생각해 본다.

 

서재필(1864-1951)이 역사에 이름을 처음 드러낸 것은 스무 살 때의 갑신정변에서였다. 그는 정변 전 해에(1883) 일본으로 건너가 하사관 양성학교에 다니다가 정변 5개월 전인 7월에 귀국했고, 정변 때는 생도 복장으로 행동대를 이끌며 반대파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일본으로 도망간 후 부모, 형제, 아내 등 온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에서 몇 달 지낸 후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의학대학을 다니던 중 미국 시민권 획득.(1890) 1895년 12월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받고 이듬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고문을 맡음으로써 다시 한국근대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로는 미국인으로 살았다. 1920년을 전후해 독립운동에 다소 관여했으나 1922년 2월 손을 떼고 사업에 전념할 것을 선언했다. (서재필의 경력은 <서재필이 꿈꾼 나라>(최기영 엮음, 푸른역사 펴냄) 수록 “서재필 연보”에서 요약.)

 

나는 갑신정변을 ‘기회주의자들의 난동’ 정도로 보고 독립협회를 ‘외세 줄서기의 무대’ 정도로 본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170-171, 208-212쪽) 그러니 ‘민족 지도자’로서 서재필의 자격도 매우 의심스럽게 본다. 그러나 최고 원로로 행세하던 김구와 이승만의 윗세대 ‘혁명운동가’로서 그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의 대항마로서는 아주 적합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1898년 정치활동을 시작한 독립협회의 최고 지도자 중 하나가 서재필이었다. 그리고 미국을 잘 안다는 것이 이승만의 가장 큰 자랑이었는데, 그보다 미국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서재필이었다. 하지가 서재필을 발견했을 때, 이제 이승만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1947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하지는 2월 중순 미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서재필 영입을 추진했고, 미국에 가자마자 서재필을 만나 귀국을 종용한 모양이다.

 

민주의원에서는 이미 수삭 전에 하지 중장 요청에 의하여 서재필의 귀국교섭을 동 박사에게 해왔었는데 27일 하지 중장으로부터 입의에 전달된 소식에 의하면 박사는 하지중장 급 군정 최고고문으로 하지중장과 함께 3월 중순경에 귀국하리라 한다.

 

그러나 4월 5일 하지의 귀임 때 서재필은 예정대로 동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4월 18일에 건강 문제로 귀국 계획이 중단되었다는 군정청의 발표가 있었다.

 

18일 군정청 공보부 발표에 의하면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요청에 의하여 조선정부의 최고의정관의 자격으로 지난 3일 조선에 귀국할 예정이었던 서재필은 노쇠로 취임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서 박사의 건강상태를 듣고 하지중장은 재차 취임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진단결과 서 박사의 건강은 조선까지 여행할 수 없을 만한 상태이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19일자)

 

서재필의 귀국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시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대적 환영준비위원회까지 결성되었다. (<조선일보> 1947년 3월 13일자) 그런데 서재필의 귀국에 관한 이승만의 논평을 <자료대한민국사>에서 전연 찾아볼 수 없었다. 서재필이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오더라도 별 역할을 맡지 못하기를 그가 바라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의 측근인 로버트 올리버의 회고에서 이승만의 마음속을 살펴볼 수 있다.

 

1947년 7월 1일 하지 장군은 자기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고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한국의 원로 지도자 한 사람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이요 대표적 인물로 리 박사 대신 서재필 박사를 앉히려는 하지 장군의 노력은 자주 독립운동을 좌지우지하려는 그의 노력의 비실제성을 여지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는 군정청 고문으로 취임한 한국계 미국인 정치학 교수 임창영의 설득과 ‘중간’파의 찬성에 따라 서재필이 좌우합작 정책을 지지할 것이고 한국 국민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이라고 믿었다.

 

1947년 5월 6일경 리 박사는 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서재필 박사가 이미 미국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샌프란시스코까지 왔다가 건강상태 때문에 되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놀랐소. 한 신문이 오늘아침 말하기를 그 사람이 자기 건강은 괜찮은데 국방성에서 못 가게 말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것이오. 어떤 단체가 그를 환영하려고 준비를 갖추었었는데 이제 그들은 실망하였소. 일반적인 공기는 그의 방한이 한 집단을 돕게 되기는 하겠지만 전반적인 정세에 혼란을 가져오리라는 것이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124-125쪽)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서재필의 성명서 기사는 이것이었다.

 

[워싱턴 5일발 AP합동]조선미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최고고문으로 조선에 귀국할 예정이었다가 노환을 이유로 여행이 중지된 서재필은 AP기자 모리스·하리스에게 서한을 전달하고 여행 중지와 조선 문제에 관하여 여좌히 말하였다.

 

(1) 나는 조선에 있는 친구와 진실을 위하여 다음의 사실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즉 나의 건강상태는 발표된 바와 같이 위급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2) 조선미군정청은 나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미 육군성으로부터 입수한 것이 명백한데 나는 미 육군성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다.

 

(3) 하여간 나는 매일 10시간 또는 그 이상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하등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4) 만약 조선인이 조선인 자체에 의한 정부에 고무되어 조선인민문제를 위하여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조선의 생활수준은 향상될 것이다.

 

(5) 조선인이 만약 결핍과 압제로부터 해방된다면 조선인은 협조적으로 단결하여 일할 수 있을 것이다.

 

(6) 조선인 간에는 결코 해결 못 된다는 대립은 없는 것이며 현재 조선인 간에 존재하고 있는 표면상 불통일은 주로 조선인구 90%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곤란에 기인되고 있는 것이다.

 

(7) 조선인이 체험한 바와 같이 일 민족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을 시에는 대개 사세(些細)한 문제에도 상호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8) 나는 여사한 사태를 조선에서 제거하는 데 있어서 미국은 원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즉 미국은 조선을 현 수준으로부터 자족할 수 있는 민주주의국가로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부력, 지식, 관용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에 있어서는 미국은 이러한 조선의 변환으로 인하여 이득을 획득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6일자)

 

(1)~(3)에서 자신의 건강에 큰 문제가 없음을 강조한 것은 조선행의 중단이 타의에 의해 강제된 사실에 대한 불평이다. (2)에서 미 육군성의 조치에 “비판을 가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 것은 비판할 점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서재필은 선편을 이용해서 7월 1일 조선에 입국하게 되는데, 그가 배에 탈 무렵 군정청 발표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하지 중장의 알선으로 서재필 박사는 내주 조선에 도착할 예정인데 박사는 조선독립에 진력하여 조선인사간에 인망이 높은 분으로 금주 초에 내조(來朝)할 예정이 있었으나 건강상태로 불가능하게 되었든 것이다. 조선인들이 서 박사의 내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으므로 하지 중장은 본국정부에 대하여 정부선박으로 국외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종래의 신체검사를 철폐하도록 진정한 바 있었다. 그리고 서 박사의 건강상태를 위하여 제반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서 박사는 조미 양국인에 대한 특별의정관에 취임할 예정인데 사무소는 본청 내에 둘 것이다. 그러나 박사는 남조선과도정부내의 여하한 행정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6월 21일자)

 

여행자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신체검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가 신체검사의 철폐를 특별히 진정함으로써 서재필의 여행이 가능하게 된 모양인데, 그렇다면 4월에는 이 신체검사 때문에 여행이 취소되었던 것인가? 미 육군성에 대한 서재필의 불평을 보며 OSS(CIA의 전신) 2인자였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의 존재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