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 ‘Korea’란 나라 이름이 모처럼 긍정적 의미로 널리 알려진 일이었고, 국제 경쟁에서 조선인이 해방 후 처음으로 자부심을 느끼게 한 쾌거였다.

 

더욱이 조선인에게는 손기정(1912-2002)의 기억이 있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군국주의 탄압이 심화되고 있던 조선의 인민을 열광시켰다. 이번 보스턴대회에서 손기정은 조선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대회에 나가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1912-2001) 역시 코치로 따라갔다가 35세의 나이에 선수로도 뛰어 12위에 올랐다.

 

손기정의 우승은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을 불러왔다. 경기 보름 후인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막 입수된 큰 사진이 게재되었는데 선수복 가슴의 일본 국기를 지워서 내보낸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로 인해 무기정간에 처해졌다가 9개월 만에야 복간되었고, 지금까지 ‘민족지’로 자임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다. <인촌 김성수 전>(인촌기념회 펴냄, 387-389쪽)에서 이에 관한 기록을 뽑아 본다.

 

이 히노마루 말소의 경위는 이러했다. 편집국의 운동 담당기자 이길용이 미술 담당기자 이상범을 구내전화로 불러, “손기정의 가슴의 히노마루 그거 지워버릴 수 없나?” 했다. 이상범은 “알았어. 내가 어떻게 지워보지.” 하고 즉석에서 응답했다. 긴 말도 필요없는 이심전심이었다. 잠시 후 여사환이 가져온 사진의 히노마루를 이상범은 화이트로 지워버리고, 사진제판의 기술원 백운선에게 넘겨 동판이 되어 나왔다.

 

보전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 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험악해져 가는 시국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해도 무기정간이 내릴 것은 틀림없었다. (...)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인촌은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순간의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오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

 

산란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던 인촌은 도중에 문제의 신문을 구해서 그 사진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민족의 정기가 위축되어만 가고 변절하는 유명무명의 군상이 늘어가는 세태로 볼 때, 히노마루의 말소는 잠자려는 민족의식을 흔들어 놓는 경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탄압은 민족 대표지로서 쾌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

 

고하(송진우 사장)는 이렇게 계속했다. “새로 부임해 오는 南次郞이 폐간과 같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군벌은 미친개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그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高樓巨閣)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면서 흥분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인촌은 더 말이 없었다.

 

<동아일보> 측은 해방 후 이 사건이 신문사 지도자들의 민족정신의 발로였던 것처럼 선전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길용, 이상범 두 기자의 범행(?)이었고, 김성수와 송진우는 그들에게 “노여움과 개탄”을 퍼부었다. 꼬리를 자르기 위해 일본 관헌에게 둘러댄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한 감정이었다. 김성수 전기에는 신문사로 오는 길에 ‘민족정기’를 떠올리며 다른 마음이 든 것처럼 적혀 있지만, 그것은 전기 출판 시점의 정치적 상황에 맞춰 윤색한 것으로 보인다.

 

윤색을 하면서도 송진우의 “고루거각” 운운 발언은 감추지 못했다. 당시 인구에 너무나 회자되고 후세까지 전해진 발언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소위 ‘민족지(民族紙)’의 성격에 대한 통념에는 허술한 데가 있다. ‘민족’과 ‘반민족’의 흑백론에 쏠려 ‘민족’을 내세우기만 하면 아무 분석 없이 민족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친일활동에 여러 층위가 있었던 것처럼 민족운동에도 다양한 내용이 있었다.

 

1920년대의 소위 ‘문화정책’이 민족운동의 분화를 촉진했다. 서중석은 문화정책을 ‘민족분열정책’으로 규정한다. “항일독립운동 세력은 철저히 탄압하고, 민족의 상층부를 회유 포섭하는 한편, 민중을 억압하고 상층부와 민중 사이의 갈등 분열을 유도하여 식민통치를 영속시키려는”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 131-137쪽)

 

신문 발간의 허가는 회사 설립의 허가와 함께 조선인 부르주아지의 활동 영역을 넓혀주면서 통치체제에 포섭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 정책이 1930년대 들어 군국주의 노선에 밀려나는 바람에 바람직한 성과를 많이 거두지 못했지만, ‘민족분열정책’으로만 규정하는 데는 다소 불만을 느낀다. 일본 식민통치에 의한 근대화정책 중에서는 비교적 건전한 정책으로 평가할 측면도 있었다는 생각이다.

 

1920-30년대의 신문에서 이 양면성을 느낀다. 신문의 사주와 경영자들은 일본 지배자들의 회유와 포섭에 넘어가는 경향을 많이 보였지만, 기자 등 종사자들은 신문사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위한 공간을 많이 얻었다. 간부들 중에도 ‘협력’과 ‘타협’의 기준에서 큰 편차가 있었다. 식민지시대의 신문사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그리고 식민지배 협력자가 서로 맞서기도 하고 돕기도 하며 어울리던 공생(共生)의 공간이었다.

 

같은 시기 민족운동 전체에 이런 양면성이 있었다. 1920년대 문화정책 아래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식민지배에 협력적인 인사들도 민족개조운동, 문화운동, 실력양성운동, 자치운동 등 민족운동을 표방하고 나설 수 있었다. 이들 영역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흔히 ‘개량주의자’라 통칭하는데, 그중에는 민족주의자와 식민지배 협력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각자의 의식 속에서도 ‘민족’과 ‘협력’이 혼재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최남선과 이광수 같은 경우를 예로 들자면 최남선에게는 비교적 ‘민족’ 쪽에, 이광수에게는 ‘협력’ 쪽에 비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명확히 판별하기 힘든 경우도 많이 있었다.

 

1930년대 들어 식민통치가 군국주의 노선으로 넘어가면서 이 양면성이 용납되지 않고 양자택일이 요구되었다.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그 압력이 늘어나는 데 따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변절’이 무더기로 일어나는데, 그중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전향’과 ‘변절’이라기보다 이미 잠재해 있던 성향이 상황 변화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 많았다. 식민지지주제에 힘의 근거를 두고 있던 김성수 집단의 경우 같으면 협력의 기조를 내내 지킨 것으로 이해되는데, 1920년대보다 1930년대에 그 기조가 더 분명히 드러난 것은 상황 변화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해방을 맞았을 때 ‘민족주의 진영’은 1920년대 민족운동을 기준으로 규정되었다. 1930년대 이후의 변절자들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 포용 분위기는 선의에서 우러난 면도 있었지만 좌우대립 때문에 정략적으로 강화된 측면도 있었다. 좌익에서 친일 협력자의 엄격한 처단을 요구한 데는 우익 세력의 약화를 노린 면이 있었고, 그에 대항하여 우익에는 온건한 처리를 원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4월 16일자) 일기에서 미군정이 친일파를 ‘재활용’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재활용’은 조선 민족주의자들도 원한 것이었다. 원세훈과 김병로 같은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 한민당에 참여한 까닭이 무엇이었겠는가? 김성수 집단의 보수성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해방을 계기로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보수적 집단도 긍정적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있고, 그들과 보조를 함께 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1946년 10월 토지개혁에 대한 한민당 주류의 반대 입장을 확인하고 한민당을 떠났다. 협력자 집단이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겸손한 태도로 새 상황에 임하기 바라던 희망을 포기한 것이다. 그들이 희망을 버리기에 이르도록 만든 것이 누구였나?

 

미군정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바란 협력자 집단 재활용은 철저한 정비를 거쳐 보조적인 역할을 맡기는 것임에 반해 미군정이 바란 재활용은 아무 정비 없이 그대로, 그것도 주동적인 역할을 맡기는 것이었다. 미군정에게는 해방된 조선을 ‘민족국가’로 만들 의도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식민지시대의 질서를 최대한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과거의 협력자 집단에게 맡길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맡기는 것이 제일 편리한 길로 그들에게는 생각되었다.

 

보수주의자는 일반적으로 기회주의 속성을 가진다.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과거 협력자 집단이 해방 후 반민족적 노선으로 나아가게 된 데는 미군정의 책임이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나는 본다. 민족국가 건설을 확고한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상황이었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데 공헌하러 나설 만한 기회주의 속성을 가진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