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4월 18일 입법의원에서는 ‘과도약헌안(過渡約憲案)’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18일 하오2시반 이후의 제54차 본회는 남조선 과도약헌안과 임시헌법기초위원회에서 기초한 임시민주헌법안이 있으나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처리문제에 관하여 토의하여 41대 10표로 가결되자 이 표결에 대한 불만으로 김호 박건웅 양 의원은 퇴석하였다. 그리하여 헌법기초위원회가 있었는데 “서상일 의원 등이 약헌을 제안한 것은 위법이니 다수거수로 가결하는 것으로만 능사가 아니다”라는 등의 박건웅 의원의 발언이 문제되어 백남채 의원의 박 의원을 징계위원회에 부치자는 동의와 3청까지 있었으나 동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 6시에 폐회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4월 20일자)

 

한민당 중심의 우파의 과도약헌 제정 추진에 중도파가 저항하고 있는 장면이다. 분단점령 상황에서 남북 각각의 국가기능 형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한 대의기구를 지방 차원에서라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분단건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은 피해야 할 상황이었고, 헌법 제정이 그런 예였다.

 

합작위원회 선전부장(지금의 대변인)을 맡고 있던 박건웅(1906~ ? )은 김원봉(김약산)과 함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의열단에 참여했고 해방 때까지 임정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고전 연구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료 의원의 토론 내용에 대한 정파적 입장의 징계 동의까지 나오는 데서 당시 입법의원 분위기의 한 모퉁이를 알아볼 수 있다.

 

같은 날 한민당 선전부가 낸 담화문에는 보통선거법 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 있었다.

 

“보선법을 실시하고 주석 부주석을 선거하여 과도정부를 수립함은 초미의 급무인데 보선법 제정을 지연함은 정부수립을 지연시키며 독립을 방해하는 것이다. 6월 이내로 보선이 끝나고 8월 15일 이내로 주석 부주석의 선거가 종료되게 하라.” (<동아일보> 1947년 4월 19일자)

 

일본 항복 2주년인 1947년 8월 15일까지 조선 과도정부를 세울 일정을 미국이 갖고 있다는 소문을 이승만이 퍼뜨리고 있었다. 단독정부 추진세력은 입법의원 선거에서의 우세에서 자신감을 얻고 과도정부 수립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주재 AP특파원 로버트 제공 합동] 중앙신문지 보도에 의하면 현재 상해에 체재중인 이승만은 중국신문기자에게 맥 장군과 하지 중장의 합의에 의하여 조선독립정부가 3개월 내에 수립되리라고 언명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기자는 하지 중장의 견해 천명을 요청하였던 바 동 중장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할 것을 거부하였다 한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4월 16일자)

 

선거법 제정을 서두르는 데는 한민당과 미군정이 죽이 맞았다. 입법의원에 선거법 제정을 재촉하는 러치 군정장관의 3월 14일자 편지를 3월 28일자 일기에 소개했는데, 편지 중 “총선거법 제정을 등한시하고 중요치 않은 것을 가지고 시간을 허비”해 왔다는 대목이 있다. 시간을 허비한 대상이란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초안”을 말하는 것이다. 한민당 담화문에서 “보선법 제정을 지연함”이라고 비난한 것 역시 친일파 특별법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좌익에서는 해방을 민족혁명과 함께 사회혁명의 계기로 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친일파의 범위를 넓게 잡고 그 응징을 철저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민족반역’이라는 범죄의 처벌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특권계급을 철저히 타파하려는 의지가 겹쳐진 것이었다. 이북에서는 이 의지가 1946년 3월의 토지개혁을 통해 관철되었다.

 

우익은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민족혁명을 앞세움으로써 혼란을 줄이고자 했다. 기득권층의 특권을 줄이되 계급 조정은 건국 후에 서서히 진행되기를 바란 것이다. 친일파 처리는 사회혁명의 완급과도 연계된 문제였다.

 

좌우 양측이 합의하는 것은 민족혁명의 당위성이었고, 그 핵심 요소가 친일파 제재였다. 친일파 처리의 거부는 민족혁명의 부정이었다. 친일파 처리를 외면한 한민당-이승만 세력은 이 점에서 정상적 정치세력이라 할 수 없다. ‘극우파’란 이름도 과분하다.

 

그러나 그들도 친일파 제재를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못했다. 지연시키기 위해 온갖 꾀를 쓸 뿐이었다. 선거법 제정의 시급함을 빙자하는 것도 그런 꾀의 하나였다.

 

그런데 민족혁명의 뜻을 살리는 대의기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법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친일파 처리 특별법이었다. 그 필요성은 입법의원 선거에서도 확인되었다. 친일파 배제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재력과 학력이 우월한 친일파가 선거에서 우세를 보였고, 그들이 득세한 입법의원에서 개원 후 이 문제를 처리할 길이 없었다.

 

곡절 끝에 친일파 처단 특별법이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을 통과했다. 반탁운동에서 한민당-이승만 세력에 동조하던 한독당 측이 이 문제에서는 중도파에 협력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군정장관은 인준을 거부했다. 거부 이유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다가 러치의 후임으로 10월 말 군정장관에 부임한 윌리엄 딘 소장의 부임 얼마 후 발언에서 미군정의 입장을 알아볼 수 있다. 전쟁 때 포로가 되는 그 딘이다.

 

군정이 폐지된 후에 조선사람 자신이 친일파를 처벌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나, 그렇게 되면 서로 많은 피를 흘려야 될 것이다. 점령 당시에 진주 목적의 하나로서 일제잔재를 소탕하겠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군국주의적인 일본식 제도를 민주주의화하겠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지, 친일파 운운한 것은 아니다. (<독립신문> 1947년 11월 14일자. 서중석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한울 펴냄) 35쪽에서 재인용)

 

인적 청산 아닌 제도 청산만이 미군정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의회를 만들면 됐지, 그 의회를 누가 채우는지는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한 약간의 사람들에게 피선거권을 제한한다는 것이 어떻게 “많은 피”를 흘릴 일이 되겠는가? 친일파 청산을 지나치게 철저히 했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북에서도 심한 유혈사태는 없었다.

 

군정장관 대리 헬믹 준장은 입법의원에서 보통선거법안을 심의하고 있을 때도 친일 경찰관의 피선거권을 규제하는 것이 “미군정을 충성스럽고 능률 있게 섬겨온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공복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며 재고를 요청했다고 한다. (위 책 34-35쪽) 미군정과 친일파의 밀착관계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것이다.

 

1947년 11월 28일 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처단 특별법에 대한 군정장관의 인준 거부 서한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을 때 원세훈의 발언은 문제의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의장선생 이하 여러 동인(同人)이 이 자리에 나와서 헬믹 준장에게 질문한다는 형식으로 나와 소개되는 순간에 원세훈 자신으로서는 심히 부끄럽고 원통해서 나올 수 없는 자리에 나왔다고 깊이 느낍니다. 무슨 소리냐. 원세훈은 분명 조선사람입니다. 조선사람인 원세훈이가 조선사람 일을 가지고 아메리카 친구 헬믹 장군에게 질문하게 되는 것을 조선사람인 원세훈으로서는 심히 부끄럽고 통분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

 

그리고 한참 내려가서 (그 서한에) “반역자는 통일된 인민의 요청으로써 처벌되어야 하고 그 처벌은 조선 전국을 통하여 같은 표준을 규정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서한대로 보면 남북통일이 되어서 전국적 인민의 요청이라는 글자가 전국적 총선거가 되어서 거기에서 임시정부가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법률을 만들어 가지고 처리하라는 이 말씀인데, 이렇게 된다면 좋은 말씀이라고 봐요.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 전에는 반역자나 부일협력자가 정권을 잡아도 좋다는 말씀인지요. 만약에 그렇다면은 민족반역자나 부일협력자가 정권을 잡고서 과거에 배일하던 -애국하던- 자를 모든 모략과 압박을 가지고 내쫓으면 그때에 가서는 진정히 이 땅은 말하자면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의 천하가 되고 (...) 미군정은 이 땅을 이렇게 만들려고 생각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그 말씀 그대로 인정하면 이 결과가 무엇을 초래하겠느냐 하는 것을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모르실 리가 만무하시다면 반드시 미국의 군정의 의도는 이 땅에 소위 배일운동자를 씨도 없이 다 추방을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 4, 1947년 11월 28일. 서중석 위 책 38-39쪽에서 재인용.)

 

원세훈(1887~1959)은 1927년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시베리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고, 1930년 출옥한 후에는 국내에서 비타협 태도를 지켰다. 해방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해 총무(지금의 최고위원)를 맡고 좌우합작에 진력하다가 1946년 10월 한민당이 합작위의 7원칙에 반대하자 탈당했다. 중도파 정치노선을 지키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전쟁 중 납북당했다.

 

‘전쟁 중 납북’에 관해 한 마디 짚어둔다. 중도파 지도자들이 전쟁 중에 무더기로 납북당했다. 역사학자 김성칠은 피난 간 동네 의사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우리 마을에서 진즉 가족을 데리고 남하한 분은 아마 김 의사 한 분뿐일 것이다. 들리는 말에 한민당은 서울이 점령되기 전에 일찍 손을 써서 당원들을 모두 피란케 하였다더니, 그럼 김 선생은 한민당원이었다는 풍설이 사실이었을까? 5-30 선거 때 조병옥 박사의 편을 들어서 맹활약하신 사실은 알고 있지만, 평소에 보면 그 책상머리에 항상 김구 선생의 사진을 꽂아두었기에 기연가미연가 했더니.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1950년 9월 14일자)

 

김성칠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전쟁 당시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을 맡고 있던 명제세(1885-1956)와 교분이 있었다. 명제세가 정치보위부에 잡혀간 후 그 아들이 찾아왔을 때 고관으로 있던 분이 왜 피난을 못 갔는가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도 욱권해보았지만 어디 들으셔야지요. (...) 이렇게 허망하게 서울을 버리는 정부가 어디는 부지할 수 있을라고. 결국은 바다를 건너서 망명하고야 말리니 내 이제 이러한 행색을 해가지고 육십 평생을 그를 상대로 싸우던 원수의 땅으로 가서 녹록한 생을 줍느니보다는 차라리 동포의 손에 죽어서 이 땅에 묻히고 싶다 하시고 영 움직이시지 않는 걸요. 그도 이 박사께서 차라도 돌려주시고 (...) 하여 내려가실 수 있도록 서둘러주셨다면 또 모르지만, 정부는 부통령도 내버리고 외국 사신들에게까지 충분한 연락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판이니 그러할 마음의 여유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어떡합니까.” (<역사 앞에서> 1950년 8월 6일자)

 

한민당 사람들은 전쟁 발발 후 어떻게 움직였나? 피난에 관한 조병옥의 회고는 이렇다.

 

그날(6월 25일) 밤 마침 이기붕, 이철원 양씨가 있어 가지고, 이 대통령 자신만이라도 안전한 장소로 옮기셔야 된다고 호소하는 꼬락서니를 내 눈으로 보았을 때, 국민은 어찌되었던 간에 우선 자기들만이라도 살고 보자는 심사가 역력히 눈에 보였던 것이다. 과연 6월 25일 밤늦게 이 대통령은 측근자를 대동하고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

(6월 27일 아침 미국 대사 무초를 만나러 갔다가) 나는 무초 대사와 회견하는 것을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대세는 다 기울어졌다고 단정하고, 나의 자가용 자동차에 가족 전원을 태우고 바로 수원으로 달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의복 전부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며, 더욱이 내가 지금도 가장 아깝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서재에 쌓아 놓았던 양서, 한서, 일본서적, 우리 국문서적 등 약 5천 권에 가까운 서적을 잃어버린 일이다. 그리고 더욱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각급학교의 졸업장이 없어진 사실이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249-250쪽)

 

피난가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곡경을 치른 수십만 시민, 그리고 납북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옷이 아깝다, 책이 아깝다, 졸업장이 아깝다 하는 소리가 어찌 나올 수 있는지. 막 국회부의장에 취임했던 장택상의 회고는 이렇다.

 

(6월 27일 새벽 국방부에 들어가서) 국방부 복도에서 이형근이를 만나 물으니, “방금 미아리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수도 서울의 방위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덜컥하는 가슴을 누르며 행여나 하고 장관실에 들어갔더니 신성모 씨가 이렇게 말했다. “고향 선배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빨리 뜨십시오.”

 

나는 그 길로 국회로 돌아와 보고했다. 정식 개회를 본 새벽의 국회는 서울 시민과 함께 수도를 사수하자는 주장과 정부를 따라 남하하자는 주장이 엇갈려서 논란을 벌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도 서울을 사수하자는 주장이 단연 우세하여 새벽 2시 반에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결의를 했으나 전세는 시시각각으로 험악해 갈 뿐이었다. 결국 국회 의장단은 국회의원 각자가 개인행동을 취하라고 통지했다. 그 후 노량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족의 뒤를 따라 시흥에 있는 내 별장으로 가 보니 국회 사무총장 가족도 와 있었고 그 날 오후 4시에는 당시의 외무장관 임병직 씨도 나타났다. 다음날 정부를 따라서 대전에 집결한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할 것을 의결했다.

 

이에 해공(신익희)과 죽산(조봉암)과 내가 도지사 관저로 이 박사를 찾아가 그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간곡히 청했으나, “내가 당(唐) 덕종(德宗)이야?” 하고 한 마디로 거절했다. 백성을 난에 휩쓸리게 한 것을 자기 잘못으로 알고 사과문을 발표한 당의 덕종(779-805 재위)이냐는 반문이었다. (<창랑 장택상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90-91쪽)

 

요즘도 북한에 대해 극단적 적대감을 표하지 않는 이들에게 “북한 가서 살라”고 하는 이들이 있거니와, 당시에도 한민당과 이승만은 자기네 반공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북한으로 끌려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