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은 경쟁이 생명현상의 원리라고 가르친다. 개체의 생존과 종의 번식을 위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하는 가운데 진화의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말이 진화론을 요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것은 다윈이 한 말이 아니다. 19세기 말 진화론을 사회학에 도입해 사회진화론을 제창한 허버트 스펜서가 쓴 말이다.

 

문명을 가진 인류는 다른 생물들보다 더 격렬한 경쟁의 모습을 보인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행복한 생활’이 경쟁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은 외부자원의 획득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확보에도 달려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에게는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 보일 싸움을 인간은 벌인다. 인류는 같은 종 안에서 가장 심한 싸움질을 벌이는 동물이라 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일세를 풍미한 것은 인간의 격렬한 경쟁양상을 명쾌하게 설명한 때문이었다.

 

인간의 싸움은 목표만이 아니라 방법도 다른 동물과 다르다. 물론 일 대 일의 몸싸움은 다른 동물들과 같이 힘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관계를 가진 동물이고 연장을 쓰는 동물이다. 대개의 싸움은 누가 힘이 세냐보다 편을 어떻게 맺느냐, 어떤 연장을 쓰느냐에 따라 결판난다. 그래서 정보가 중요하게 된다.

 

정보가 전쟁의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은 손자병볍(孫子兵法)에 간첩작전의 종류가 체계적으로 적혀 있는 데서부터 알아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냉전에서는 첩보활동이 경쟁의 핵심이 되기까지 했다. 냉전종식 후 경제전쟁의 시대에 첩보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안기부의 부훈이 ‘정보는 국력’으로 바뀐 것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

 

그런데 안기부가 우리나라의 경쟁상대인 다른 나라에 관한 정보획득이 아니라 도청을 통한 국내정보 수집에만 몰두한다면 새 부훈이 무색해진다.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기보다 정부에 대한 내부비판을 봉쇄하는 데 안기부의 존재의의를 둔다면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의 암묵적 부훈 ‘정보는 권력’에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공산권의 붕괴가 정보부족 때문에 일어났던가. 소련의 KGB, 동독의 슈타시를 비롯해 공산국의 비밀경찰이 국력의 상당부분을 내부사찰에 쏟아붓는 동안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정보가 만들어주는 권력은 권력의 껍데기일 뿐이다. 참된 권력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