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13일 군정청 문교부의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치 계획) 발표 이후 하반기 내내 격렬한 반대운동이 계속되었고,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채로 겨울방학에 들어갔었다. 2월 초 개학과 함께 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재개되었고, 그 주요 수단은 동맹휴학(맹휴)이었다. 맹휴 운동은 중학교까지 퍼져 나갔다. 1947년 2월 8-9일자 신문에 이런 기사들이 실렸다.


국립대학교안 반대 동맹휴학은 3일을 계기로 하여 속속 일어나고 있는데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맹휴 참가교 인원수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5일까지 17교에 1만3천명이 참가하고 있는데 학교 별 수효는 다음과 같다.

3일: 상대 1,200명 문리대(예) 1,200명 공대 1,500명 법대 650명 문대 732명 도상 1,100명

4일: 사대 1,200명 약대 420명 경중 1,100명

5일: 휘중 950명 도상 400명 한공 800명 의대 275명 의대(예) 66명 치대 92명 한대 700명 (<서울신문> 1947년 2월 8일자)


해방 이후 한 번도 맹휴가 없었던 것을 자랑하던 연희대학에서도 6일부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즉 동교에서는 1천2백 명 학생이 6일 밤 늦도록까지 각 학부 학생회를 열고 맹휴단행을 가결하였는데 성명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 (<경향신문> 1947년 2월 8일자)


(...) 8일 오전10시반경에 국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에서는 문리대의 이경호 상대의 김용덕 등 맹휴 각 대학의 대표 7명이 직접 문교부장을 방문하여 약 50분간 회견하고 국대안 즉시 철폐요구의 정당성을 강경히 주장하였는데 문교당국으로써의 이 문제에 대한 수습대책에 대하여 문교부장 유억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생들이 맹휴를 하고 있으나 그것이 정당한 요구라면 얼마든지 듣겠다. 학생은 학생답게 교칙을 지키고 그 중에 불평이 있어 말한다면 얼마든지 듣겠다. 그리고 만일 학생들이 끝끝내 국대안을 반대하여 출석을 거부하고 맹휴를 계속한다면 교문을 닫고 다시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을 모집하겠다. 하여간 절대로 국대안을 철폐할 수는 없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9일자)


서울시학무국 방침: 국대안을 싸돌고 일어난 학원의 동요는 이미 각 대학의 동맹휴학으로 표면화되었으며 한편 맹휴선풍은 각 중학교에까지 파급되어 7일 현재 경복중학 휘문중학 경기상업 덕수상업이 각각 맹휴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경기고녀와 선린상업이 동요하는 중에 있어 앞으로의 사태는 우려되는 바가 있는데 맹휴사건에 대하여 서울시학무국장 이덕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중등학교에도 맹휴선풍이 불고 있는데 학무당국의 태도로서는 맹휴를 하며 요구조건을 제출하면 이에 절대로 응하지 않을 것이며 수업을 계속하면서 정당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 고려할 방침이다. 이것은 문교부장의 방침이며 또 학무국의 방침이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8일자)


학생대표단 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뿐입니다. 문교부장은 우리들의 요구를 진정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일부의 모략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9일자)


상과대학교수단은 7일 행정 인격 양면에 있어서 적임이 아니므로 현 교장 박용하가 사임하지 않는 한 강의를 계속할 수 없으니 문교당국과 현 교장은 반성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9일자)


구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 일동은 7일 국대안으로 인하여 우리 광전은 희생되고 말아 이 방면의 교육은 정돈되었다. 종래 국대에 협력하던 교수들까지도 국대안의 재검토를 요청하여 사임하였다. 우리는 국대안 철회를 다시 강조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8일자)


국대안 반대운동에 대한 우익세력의 조직적 대항 움직임이 이 무렵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립대학안 철회를 요구하고 맹휴를 단행한 국립대학에 동정하여 각 사립대학 중등학교까지 동정맹휴를 단행하고 있어 교육계의 불상사를 일으키고 있음에 감하여 8일 오후2시부터 시내 모처에서 국립 9개 대학의 맹휴 반대파 측 학생대표가 회합하여 금번 맹휴는 배후에 정치적 모략이 있으니 이를 분쇄하고 합법적으로 투쟁하고자 결의하는 동시에 건설학생연합회를 조직하고 적극적 투쟁을 전개하기로 되었다 한다.

◊ 學聯에서 경고: 전국학생총연맹 맹휴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7일 맹휴사건에 관련하여 정치적 모략을 배제하고 학원 건설을 위하여 학원을 사수하자는 요지의 경고문을 발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9일자)


건국학생연맹 맹휴반대투쟁위원회에서는 조선청년당 중앙학생부 공동명의로 2월 9일 “국대안 반대도 좋으나 이 문제보다 좀 더 큰 과제가 있다. 맹휴를 핑계로 백주에 오락장을 출입하는 학도여 반성하라. 맹휴는 오락장으로 몰아넣기 위한 맹휴는 아니다. 진정한 배움의 마당을 찾자는 양심적인 학도여 학원을 사수하자.”라는 의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11일자)


건국학생총연맹에서는 각 학교에 파급된 맹휴에 대하여 맹휴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학원을 급속히 건설하라고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1) 애교·애족·애국·양심적인 학생들은 민족의 흥망지추 독립이냐 노예의 관두에서 민생은 도탄에 빠진 비참한 현상을 명심코 매국적인 학원파괴를 방지하자.

2) 모당 매국노들의 지령 하에서 신성한 학원에서 독립방해를 기도하고 끊임없는 파괴와 전술로 순진한 학도를 꾀이며 자당파의 세력 부식하는 것을 양심적인 애국학도와 부형은 유의하고 독립 건국도상의 학원을 학도는 사수하라.

3) 우리 동포들은 정당한 합법적인 투쟁을 하고 정치적인 맹휴를 반대하는 각 학교에 구성되어 있는 애교건설동지회의 학생들을 격려하고 전적 지지하여야 한다. 각 학교는 12일까지 총 맹휴 돌입하라는 모당의 지령을 우리는 분쇄할 것이다.

모 당파에서 맹휴를 선동하며 방금 전교생이 여전히 등교하는 학교를 맹휴돌입이란 동일한 벽신문을 첨부하는 모략에 친애하는 학도 부형은 속지 말고 학원을 급속히 건설하라. (<조선일보> 1947년 2월 11일자)


여러 학교에서 국대안 반대운동과 이를 분쇄하려는 책동이 충돌하면서 좌우 대립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애초의 국대안 반대운동은 좌익의 정치적 동기에만 따른 것이 아니었다. 폐합되는 각 학교의 전통을 지키려는 마음도 있었고, 통폐합의 효과를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 지원 대책 없는 탁상공론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미군 대위를 총장으로 앉히고 군정청이 임명하는 이사회에게 대학을 장악시키는 반민족적 조치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반대운동의 정치색이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군정청은 자기네 방침에 대한 반대라 하여 무조건 적군 취급을 했다. 겨울방학 전까지 군정청의 대책이란 등록하지 않는 학생은 제적하고 맹휴를 풀지 않는 학교는 폐교한다는 강경한 것뿐이었다. 좌익의 개입은 확인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다. 9월 총파업도 10월 민중항쟁도 봉쇄된 상황에서 미군정에 대한 저항운동을 위해 이런 호재가 어디 있겠는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하고 동조하는 자발적 운동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국대안 사태는 해방공간 좌우 대립의 축도와 같은 것이었다.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민심의 반발에 편승하는 것이 좌익에게는 손쉬운 전략이었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정책의 잘못을 바로잡는 시늉이라도 해서 선동자들을 최대한 고립시킬 것이다. 그런데 국대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책에서 미군정은 정책에 대한 검토 능력도 정치적 판단력도 모자라는 모습을 보였다.


미군정의 대응을 잘못 이끄는 데 극우세력이 한 몫 했다는 사실을 국대안 사태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극우’라는 말을 쓸 때마다 그 기준이 조심스러운데, 나는 해방공간의 ‘극우’를 정치이념이 아니라 정략적 행태로써 규정한다. 정상적 우파라면 정책경쟁을 통해 민심을 끌어들임으로써 좌파에 대한 우위를 추구해야 할 텐데, 당시 조선에는 민심은 아랑곳 않고 대립 격화에만 골몰한 세력이 있었다.


민심을 무시하고 역행하는 세력이 부귀와 권력을 누린 것은 식민지시대의 전통이다. 주권국가라면 설령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더라도 민심에 역행하는 세력이 장기간 특권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심을 등지고 식민통치에 협조한 매판집단이 식민지시대에 특권층을 이뤘는데, 이제 미군정이 식민통치자 역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매판집단은 대립 격화를 지향한다. 그들은 통치자가 부여하는 특권의 독점을 원하기 때문에 자기네 외의 모든 집단을 통치자가 적대세력으로 인식하기 바라는 것이다. 미군정 지도부가 소련과 공산주의에 경계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들은 ‘반공’의 깃발을 들고 나서서 자기네 외의 모든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국대안 반대운동에도 정치적 색깔을 입히는 공작이 시작되었다. 2월 15일자 일기에서 소련군 교육문제주임장교 쿠즈노프 소령이 남로당 허헌 위원장에게 보냈다는 ‘지령’ 이야기를 했다. 곧이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 외에는 도저히 곧이들을 수 없는 진짜 어설픈 공작이다. 이 공작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당시 전국학련을 이끌던 이철승의 회고에 보인다.


그래서 국대안 반대사태가 1년 만에 수습되었는데, 수습되는 계기가 된 것이 ‘맹휴 진상 폭로대회’에서 김두한이 소련군의 교육담당 니콜라이 구지노프의 맹휴 지령문을 폭로한 것입니다. 당시 김두한은 유진산 선생이 이끄는 청총의 감찰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하고는 거의 매일 연락을 하고 지냈습니다.

1947년 2월 13일 서울 예배당에서 우리 학련 멤버와 일반인 1천여 명이 모여서 건설학련 총회를 할 때 김두한이 나한테 찾아왔습니다. “자, 이북에서 북로당의 소련군 교육담당 니콜라이 구지노프가 허헌의 집에 지령문을 보냈는데 그것을 가져왔다. 이것을 폭로하면 놈들이 꼼짝 못할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폭로 수법을 쓰기로 합의하고, 내가 먼저 대회장에 나갔습니다. 어느 정도 회의가 진행될 무렵, 김두한이 청년 단원을 거느리고 장내에 들어와 사회석으로 올라갔어요.

(...) 김두한이 “내가 소 군정 당국이 보낸 국대안 반대의 비밀 지령문을 입수했소. 엊저녁 남로당 허헌의 집을 습격하여 뒤졌더니 이런 것이 나옵디다.” 하면서 소련 군정의 비밀 지령문을 높이 쳐들어 보여주었어요.

또 “이 지령문은 러시아어와 한글로 씌어 있는데, 소련 사람의 사인이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원본이요” 하면서 “국대안 반대를 위해 남조선에 있는 모든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투쟁을 맹렬히 전개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의 제1단계로 합법적인 맹휴에 돌입해야 합니다” 하는 내용을 폴로하자, 삽시간에 소련 규탄대회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예상대로 효과는 1백% 적중했습니다. 나로서는 그 내용의 진부를 확실히 가릴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소위 국대안 반대 저지투쟁을 하는 우리들에게 백만의 원군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이철승, 박갑동 지음, 계명사 펴냄), 285-286쪽)


2월 13일 폭로대회를 보도한 2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김두한이 그 대회에서 ‘쿠즈노프 지령’을 폭로한 것 같지는 않다. ‘쿠즈노프 지령’이 신문에 처음 나타난 것은 “[워싱턴 14일발 AP 합동]”의 바이라인이 붙은 2월 15일자 <서울신문>과 <동아일보> 기사로 보도된 이승만의 성명에서 “소련군관이 쓴 서한은 남조선에 혁명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망하고 있다.”고 한 대목이고, 그 다음이 “[재 서울AP특파원 로버트 제공 15日 합동]”의 바이라인으로 나온 2월 16일자 여러 신문 기사였다.


2월 13일 폭로대회에서 김두한이 그 편지를 꺼냈다고 하는 이철승의 회고에 착오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 며칠 후의 다른 대회에서 꺼낸 것을 착각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정확한 회고일 가능성도 있다. 유진산-김두한 차원에서 ‘폭로대회용’으로 만들어 쓰던 물건이 뒤늦게 언론에 노출된 것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2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1947년 1월 22일

북조선주둔적군사령부 교육관 니코라이 그즈노푸 소좌

남조선노동당위원장 허헌 귀하

1) 세계 최대강국인 쏘비에트연방의 외무인민위원 동지 모로도프와 영·불·미 등 세계 4대강국의 외상들은 장차 쏘비에트연방의 수도 막사과에서 전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에 막사과에서 개최되었던 삼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의 민주수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삼상결정을 남조선에 있어서 친일파 파씨스트 민족반역자의 두목 김구 이승만의 반동 테러단들이 맹렬히 반대하고 또 이것을 남조선의 반동 미군정이 선동 조장하고 있는 때문에 마침내 소미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입수된 신용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래 3월 10일부터 막사과에서 개최되는 4대강국 외상들의 회의에서 조선을 해방하여 줄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반동 미군정의 입법의원을 반대하고 남조선의 건설을 파괴하는 투쟁과 연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1946년 10월에 있은 남조선의 인민의 광범위의 소동은 침략적 제국주의자 미군정의 반동성을 전 세계 인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이와 반대로 북조선에 주둔한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과업의 위대성을 전 세계에 자랑하는 효과 있는 결과로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록된 종합적 계획안에 의하여 남조선에 있는 전부의 학교에서는 광범위의 조직적 맹렬한 투쟁을 시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혁명적 투쟁을 제1차로 동맹휴학을 합법적으로 시작하여야 됩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