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2월 14일 하지가 워싱턴으로 떠날 때는 그가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18개월이 조금 안 된 시점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얼마나 더 있을지는 물론 그 시점에서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18개월을 더 그 자리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니, 3년간의 재임 중 딱 중간 시점이었다. 해방 조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인이었던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 시점에서 한 번 살펴본다.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의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머리말의 제목이 “일본의 맥아더 연구열과 하지에 대한 우리의 무지”다.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전쟁까지 맥아더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은 실로 막대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 특히 남한에 한정한다면 남조선주둔 미 육군사령관 하지의 비중은 일본에서 맥아더의 비중 못지않은 것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 정치와 국가 건설에 하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기이하게도 이 이방인 군인에 대해서는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변변한 전기나 평전이 없다.

(...) 일본 현대사가 미군 점령이라는 조건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사고와 행동이 전후 일본의 진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국 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연구열은 사실은 현재 일본의 역사에 대한 일본인의 자기 성찰의 깊이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하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지와 비교됨으로써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6-7쪽)


나는 이 관점에 일부만 동의한다. 하지뿐만 아니라 하지가 조선에서 활동한 시기에 대한 연구가 일본의 ‘맥아더 시대’ 연구에 비해 질적-양적으로 뒤처진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의 오랜 독재정치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근년 빠른 속도로 극복되어 가고 있다.


동의하지 못하는 점은 하지와 맥아더의 역할을 같은 평면에 놓고 보는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가이진 텐노(외국인 천황)’로 군림하던 6년 동안 일본에 대해서만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미국 정치에 대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인 안에 꼽히고 있었다. 반면 하지는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의 중요성에 비해 본인 자신의 중요성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기가 미국에서 출판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놀라운 일일 것이다.


어림짐작으로 볼 때 1945년 당시 미국군에 현역 중장 이상의 고급 장성이 수백 명 있었을 것이다. 조선에 부임하기 3개월 전 52세로 중장으로 승진한 하지는 그 집단의 밑바닥이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14세 나이로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함으로써 직업군인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니 세계대전 덕분에 직업을 얻고, 또 그 직업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둘 기회를 얻은 사람이다.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하지가 있는 동안 비슷한 배경의 동료들이 무더기로 퇴역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행운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을까. 14세 때부터 군대생활을 해온 끝에 오른 군단장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얼마나 오래 더 누릴 수 있을지 절박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점령군 사령관의 보직은 퇴역을 늦춰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것이었을 텐데, 후일의 회고에서 그는 그 고마운 마음을 감추려고 애쓴 것 같다.


“미군정 최고 책임자로서 나의 직책은 내가 지금까지 맡았던 직책들 가운데 최악의 것이었다. 만약 내가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민간인 신분이었다면 연봉 1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결코 그 직책을 다시 맡지 않을 것이다.” (같은 책 247-248쪽)


연봉 1백만 달러? 그가 퇴역 후 연봉 10만 달러짜리 직장을 얻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아무리 미국의 군사산업이 융성하고 있었어도 “군인 중의 군인이요 전쟁을 가장 잘 아는 전형적 군인”이자 “일본군과의 정글전투의 권위”(<매일신보> 1945년 9월 11일자 “하지 중장의 약력”)인 하지에게까지 돌아갈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백만 달러는 지금의 백만 달러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맥아더가 1942년 초 필리핀군 고문으로 있다가 일본군의 진격을 앞두고 케손 대통령으로부터 50만 달러를 받은 사실이 1979년에 밝혀져 평판에 큰 타격을 받은 일이 있다. 7년간 고문으로 있으면서 미국 지원을 받는 데 도와준 공로에 대한 사례였을 텐데, 그것이 당시에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돈 얘기 하다가 맥아더 얘기가 불쑥 나왔는데, 맥아더는 50세 때인 1930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해서 5년간 재임했던, 당대 미국 군부의 기린아였다. 참모총장 퇴임 후 필리핀에 가 있는 동안 퇴역했다가(1937) 1941년 현역에 복귀해서 태평양전쟁을 지휘했다. 그의 계급이 5성장군인 ‘원수’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그 계급은 미군이 아니라 필리핀군의 것이었다. (미군 최초의 5성장군이 된 것은 맥아더와 동갑인 조지 마셜이었다. 1944년 12월에 만들어진 그 계급의 호칭은 흔히 쓰는 ‘marshal’이 아니라 ‘general of the army’였다. 마셜이 “Marshal Marshall”이라고 불리게 될 것을 피해서 호칭을 정한 게 아니냐는 우스개를 담은 신문칼럼도 나왔다. 1946년 말까지 중국의 국공합작을 중재하다가 1947년 초 국무장관이 된 마셜은 유럽 원조정책 ‘마셜 플랜’으로 이름을 남기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거니와, 중국 사정 설명을 위해 불원간 이 일기에서도 다루게 될 것이다.)


맥아더는 미국 전 역사를 통해 가장 특이한 군인의 하나일 뿐 아니라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은 개인의 하나로도 꼽히는 인물이다. 일본 점령과 한국전쟁을 빼놓더라도 충분히 전기가 쏟아져 나올 만한 경력이 그 앞에 쌓여 있던 인물이다. 그가 일본 점령군 사령관과 한국전쟁의 유엔군 사령관을 맡음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면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반면 하지에게는 개인으로서의 중요성이 별로 없다. 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조금이라도 적합한 인물을 고르려고 두 사람이 먼저 검토되었지만(중국전구 사령관을 지낸 웨드마이어와 스틸웰) 둘 다 불편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으로 이동하기에 제일 형편이 좋은 24군단을 고른 것이고 하지는 마침 그 군단장이었던 것이다. 하지가 어떤 인물인지 세심히 더듬어본다면 물론 그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바가 없지 않겠지만 맥아더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조선 점령군 사령관은 하지의 경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그 역할에서 두드러진 것이 있었다면 역사적 인물로서 하지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재임기간의 절반을 살펴본 데 따르면 하지는 형편에 몰려 눈치를 보며 근근이 역할을 수행했을 뿐, 독창적인 안목도 투철한 자세도 보여준 것이 없다. 그는 어쩌다 조선에 오게 되었고, 자신의 퇴역을 늦춘 것 밖에는 조선에서 맡은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한 것이 없었다.


미국 입장에서 조선 점령은 일본 점령에 부수되는 조그만 일거리였을 뿐이다. 군인이라도 중장쯤 되면 웬만한 정치적 식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하지는 정치적 식견이 아주 얕은 군인이었고, 맥아더의 일본 점령에 도움도 안 되지만 방해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반공주의자라고도 할 수 없다. 공산주의가 뭔지 알아야 반공주의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그저 주변의 눈치 봐서 반공이 좋은 건 줄 알고 따라 한 ‘반공꾼’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하지 같은 사람을 사령관으로 보낸 데서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조선을 대단히 경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로비스트로 활동한 로버트 올리버는 1946년 6월에서 8월까지 서울에 머물었는데, 당시 미군정의 분위기를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보이는 대목에 밑줄을 쳤다.


나는 24군단 재정과장 스타이거 대령과 한국의 국제통화 환율을 정하는 진행사항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라고요?” 그는 격하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 일본을 위해서도 정한 바가 없소!” 그의 반응이 너무나 강조적이고 진지하였지만 이것은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열등하고 훨씬 덜 중요하다는 그의 신념을 드러낸 것이었다. (...) 아주 우울한 사실은 모든 계통을 통틀어 - 이곳이나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나 멀리 워싱턴에서도 그것이 틀림없는 그들의 태도인 것이다. “일본은 중요하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해주어야 한다. 한국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다른 일들을 돌볼 때까지 한국 문제는 그저 선반 위에 올려 버려두어도 좋다.” 이곳 군정 당국자들 전체를 통하여 들리는 말은 “한국은 우선순위 계통의 맨 끝에 붙어있다”는 것이다. 인원배치, 보급품, 정책조정 등 모든 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곳 일본인이나 군정 당국자들을 위해 일단 동경에서 알맹이는 빠지고 겨우 남은
찌꺼기이거나 다른 데서 필요치 않은 것들이 한국까지 온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 84쪽)


하지의 인물 탐구를 중요한 과제로 여긴 정용욱도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그의 행동 외에 인물 자체에 대한 시각을 특별히 제공한 것이 없다. 군대의 인사기록카드나 홍보물에 담긴 정도의 정보뿐이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에서 정용욱은 3년간 하지와 군정청이 한 일을 하지 개인의 입장에 최대한 초점을 맞춰 서술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로 뽑아낸 하지의 모습으로 책이 마무리된다.


미국인으로서는 크지 않은 덩치에다 짧은 백발의 머리, 항상 단정한 군복 차림의 하지의 외모가 풍기는 분위기는 엄격한 군인이자, 전형적인 무장이다. 그는 야전군 지휘관의 감각을 가지고 미국 대한정책의 큰 틀을 이해하고, 출발부터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한국 정치에 개입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하지는 고지식한 군인에 불과했고, 그것도 대단히 성실한 군인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군인으로서의 성실성은 그가 이해하고 동의하는 이데올로기적 한계 내에서 발휘되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적과 아군에 대한 구분이 뚜렷했으며, 그가 나름대로 판단한 미국의 국익과 그의 군대의 안전이 적과 우군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맥아더는 일본의 정치-사회적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과 인기를 드높였고, 그는 이를 토대로 미국에서 정치적 성공을 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지에게는 그러한 보상 이익도 없었다. 물론 미국의 남한 점령정책이 한국 사회에 남긴 긍-부정성을 모두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은 그가 미군의 남한 점령 목적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일환으로 간주하였고, 진주 이래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기꺼이 공산주의와 싸웠으며, 또 그 싸움은 공산주의에 한정되지 않은 채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수립 열망과 도처에서 충돌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점령통치는 한반도에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259-260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