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의 하나로 나왔던 토지개혁 방침에 미군정이 동의한 것처럼 합작위 선전부장 박건웅이 2월 18일 발언했다. 극우세력에서 이에 대한 반대가 쏟아져 나오자 며칠 후 농무부장 이훈구가 이 발언을 부정했다.


“토지개혁문제에 관하여는 하지 중장 경제고문 번스, 농무부장 이훈구와 본인(박건웅)이 누차 토의한 바 있었는데 합작 7원칙에 의하여 몰수 유조건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기로 동의하였다.”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2월 20일, 21일자)


남조선의 토지를 앞으로 유상매수 한다느니 또는 무상몰수 유상분배 무상분배 한다는 등 항간에 상당히 많은 낭설이 떠돌고 있다. 이는 결과에 있어 농업생산에 좋지 못한 영향을 가져올 염려가 있는 터로 군정청 농무부장 이훈구는 22일 다음과 같은 담화로서 낭설을 시정하였다.

“남조선의 토지문제는 과도입법의원에서 법안이 새로 제정되어 러취 군정장관에의 승인을 맡아 법률로서 시행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토지제도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농업자는 항간에 떠도는 낭설을 믿지 말고 한결같이 농업생산에 전력하여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1947년 2월 23일자)


2월 20일 독촉국민회에서, 21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반탁위)에서 토지개혁에 대한 반대 성명이 나왔다. 22일 이훈구의 담화 뒤인 23일에도 반탁위는 다시 토지개혁 반대 주장을 되풀이했다.


“토지개혁문제에 있어서 체감매상에는 동의하나 무상분배로 인하여 국가경제 파탄을 여하한 방법으로 방지할 것인가 그 대책으로 폭세 부과 외국차관 등이 있는데,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봉급자 등은 폭세 부담 반대운동을 지금부터 하게 될 것이고 외국차관은 경제적 매국행위이다. 금일 조선은 매명적 위정자를 경계하고 보다 더 총명한 위정자를 요청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7년 2월 21일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선전부에서는 21일 토지개혁문제에 관하여 좌우합작위원회 7원칙 중에 무상분배는 경제적으로 매국적 행위이므로 부당하다는 견해를 발표하였다.(<조선일보> 1947년 2월 22일자)


“최근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유령집단인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군정당국과 결탁하여 남조선에 토지개혁을 실시 계획 중이라 한다. 조선에 있어서의 토지개혁은 농민대중의 실태에 비추어 의당 단행할 과제이나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전에 외국군정하에서 이를 실시하려 함은 북조선에 있어서의 매국정책과 다를 것이 없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23일자)


‘폭세(暴稅)’란 말이 근년 쓰이던 ‘세금폭탄’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매국’이란 말이 토지개혁 반대에 쓰이기 시작하고 있다. 무상분배가 재정문제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에 붙여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외국차관을 들여온다면 “경제적 매국행위”가 된다는 것이니 토지행위와 매국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는 매우 희박한 것이다. 그런데 그 희박한 인과관계를 근거로 이제부터 토지개혁을 ‘매국’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니, ‘모스크바결정 지지’ = ‘찬탁’ = ‘반역’의 도식보다도 더 명쾌한 파시스트 선전이다.


선전부장이면 요즘 말로 대변인인데, 대변인의 말 한 마디에 이렇게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는 까닭이 무엇일까. 안재홍의 민정장관 취임 때문에 신경들이 곤두선 것 아닐까? 안재홍이 감투라면 얼씨구나 하고 아무거나 뒤집어쓸 인물이 아니란 사실은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었고, 그가 민정장관직을 수락하는 데는 미군정 측의 상당한 권한 보장이 있었으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신빙할만한 정보에 의하면 안재홍은 민정장관취임 수락 전일인 4일 러취 군정장관과의 회견석상에서 취임조건으로 군정청행정부의 인사문제와 입법의원 강화문제 등 3 요구안을 제출하였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6일자)


이 보도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경찰개혁’도 안재홍이 요구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안재홍도 참여했던 전 해 말의 조미공위에서도 가장 중시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정 측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당장 조병옥-장택상 체제를 어쩔 수 없어서 그대로 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개혁론자 안재홍이 요직에 앉으니 경찰개혁 이야기가 무성할 수밖에.


“경찰의 이동설은 낭설 - 맥그린 대좌 각지에 통첩”

경찰간부의 이동설은 허무한 낭설이라고 20일 하오4시 경무부 맥그린 대좌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남조선 전 경찰에 통첩하였다.

“각 관구경찰청장 급 미군 공안장교에게 고함: 본월 20일부 모보에 게재된 경무부수뇌와 수도관구경찰청장 경질설은 전부 낭설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22일자)


“경찰 수뇌 경질 - 러 장관 부인”

20일 모 신문에 “경무부장과 수도청장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고 하는 보도를 한 바 있었는데 21일 러취 장관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이를 부인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자유신문> 1947년 2월 22일자)


경찰수뇌부 인사이동설 문제로 시내 경찰 일부는 동요의 빛을 보이고 있는데 수도청에서는 20일 오후1시부터 긴급 과서장회의를 열고 그 대책을 토의하였다 한다.

조선인 민정장관이 취임한 후 항간에는 군정청 수뇌부와 경찰간부의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떠돌고 있는데 그 파문은 수도청장 장택상에까지 파급되어 시내 각서에서는 벌써부터 동요의 빛을 보이고 있다는 바, 이에 대하여 수도청 부청장 이익흥은 20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 신문에 게재된 것은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다. 과도기에 처한 현 경찰로서는 상하가 혼연일체로 구성된 경찰이어야만 치안을 확보할 것이다. 일제시대와 같은 인사이동이 있다면 그것은 경찰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이러한 소문으로 벌써부터 각 서원이 동요하고 있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21일자)


경찰 간부들이 엄청 쫄았던 모양이다. 어느 신문 보도였는지는 모르지만, 고문으로 물러서 있던 매글린 대령이 즉각 진화에 나서고 러치 군정장관이 뒤따라 나섰다. 게다가 이익흥 부청장은 경찰의 “동요”를 시인하고 있었다. 장택상 본인도 20일 관하 각 경찰청과 시내 각 서에 경찰을 와해하는 모략에 속지 말고 건국치안에 이바지하라는 격문을 보냈다.


“신명을 바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전선에서 사투하는 경찰관동지! 본관은 동지의 열렬한 애국심과 빛나는 업적에 자못 감사하는 바이다. 살인적 물가고와 광란적 모략에도 불구하고 조국 해방조선을 위하여 직무에 충실하는 여러분의 태도에는 다만 감사할 뿐이다. 독립을 좀먹게 하고 이를 방해하는 분자는 우리의 적이다. 경찰의 건전과 와해를 모략하는 언사나 행동은 절대 경계하라. 곤궁한 생활난과 교활하고 음흉한 모략전에 빠지지 말고 우리의 최종의 목표를 달할 때까지 분투하자. 나는 동지와 생사를 같이할 것을 굳게 맹서하노라.” (<동아일보> 1947년 2월 21일자)


조미공위의 공격을 모면한 경찰은 그 후 개선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최능진 파면(1946년 12월 5일자 일기) 후 기고만장한 조병옥의 모습을 12월 16일자 일기에서 그린 바 있다. 경찰의 오만은 마침내 대법원장에게 대들기에까지 이르렀다.


수도경찰청부청장 이익흥을 비롯하여 각 과장과 시내 10개 경찰서장 동 경찰수뇌부 10여 명은 11일 상오10시 대법원장 김용무를 방문하고 신성한 심판에 간섭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강경히 항의하였다고 하는데 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즉 작년 가을 영남소요사건 당시에 대구지방심리원 성주출장소장(등기소장)을 폭동선동자라고 고문하였다는 죄명으로 수도청특경대 김동순 경위는 8일 서울지방심리원에서 심동구 심판관으로부터 체형 8개월 집행유예 3년 언도를 받았다는 바 이 사건에 있어 김 대법원장은 대구법원장으로부터 엄중 처벌하여 달라는 요구보고를 하급관청에 공람시키며 당 심판관에게는 재판소 관계의 일이니 신중 고려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하여, 경찰 측은 심판관이 판결한 죄의 경중은 고사하고 대법원장의 직능은 행정상 감독권은 있으나 설혹 부정한 판결이 있다 할지라도 간섭할 수 없다는 견해로써 이와 같이 심판에 간섭하였음은 유감된 일이라 하여 이날 하오2시에 이르기까지 토론하였다는데, 동 석상에서 김 대법원장은 상고심에는 현장조사를 하여 정확을 기하겠다고 언명하였다 하며 경찰 측은 강경한 태도로 금명간 이상 요지의 정식 항의문을 관계당국과 김 대법원장에게 지시하리라 한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13일자)


경찰 간부들의 대법원장 ‘방문’을 여론이 경찰의 ‘고문권 수호’를 위한 집단행동으로 보고 비난을 퍼붓자 며칠 후 장택상이 나서서 이렇게 해명했다.


“재판의 신성은 평인이나 관리나를 막론하고 절대 간섭치 못함은 근대 법률에 비추어 상식화되었다. 이번에 수도청 직원이 김 대법원장에게 항의한 것은 판결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김 대법원장 자신이 간섭했다는 이유에 원인이 된 것이다. 판결에 대한 불복이 있었다면 인민으로서 상고함이 당연하지 항의란 것은 천만부당이다. 김 대법원장 자신이 간섭하였다는 것을 경찰이 항의함을 마치 판결 자체에 대한 항의같이 세간에 유포함은 내 자신도 판단키 어려울 만큼 경찰의 태도를 왜곡한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2월 18일자)


법원장의 간섭에 경찰 간부들이 나서서 항의를 해주다니, 재판에 부당한 간섭을 한 법원장이 대법관으로 영전하는 요즘 사람들이 부러워할 일인가? 그러나 다른 일 아닌 고문경찰관 재판에 나선 것을 그렇게 변명할 수 있는 걸까? 더구나 재판관 본인은 간섭받지 않았다는데?


심동구 심판관 담: “본건에 있어서 대법원장이 나의 심판에 간섭하였다고 하나 이것은 전연 오해임을 단언한다. 비록 직속상관이라도 자기 지시 기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은 법률상식이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만약 당시에 대법원장이 나의 심판에 간섭적 태도를 취하였다 하면 나는 단연 이것을 거부하였을 것이다. 검사 측은 단순한 상해의 견해였으나 경찰의 직무를 행하는 자가 피의자에게 폭행을 가하여 상해를 입게 한 증거가 명백하므로 사실대로 독직 상해로써 처단할 것이며 상해죄로는 엄형에 처함이 당연하나 피고의 기타 정상을 참작하여 특히 집행유예의 관대한 처분을 한 것이고 이외에는 별다름이 없으니 일반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상기 대법관 담: “항간에서 이번 경찰항의에 대한 재판소 측의 태도가 선명치 못하다는 여론이 자자한 듯한데 재판소 측으로서는 이번 경찰 항의를 어린애 칼 장난으로밖에 보지 않으므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22일자)


이상기 대법관이 왜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김용무 대법원장이 너무 점잖게 대응하는 것이 불만스러워서 대신 나선 것 같다. “어린애 칼 장난”이란 표현을 보면 경찰에게 대단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랴. 성질부리는 데는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장택상이 그 상대였으니.


“모욕적인 이상기 대법관의 언사는 대법관의 언사로는 볼 수 없고 개인의 입에 젖내 나는 언사로 밖에 볼 수 없다. 미군정이 설립한 조선독립의 전초전으로 건투하는 국립경찰을 어린아이 칼 장난이라고 하는 몰상식한 언사는 경찰로서는 용인할 수 없다. 자기가 간섭치 아니한 심리사건에 시시비비를 운운함은 일종의 붕당적 행동이라고 단정한다. 우리는 판결에 대하여 항의한 적도 없고 판결에 대한 신성성을 굳게 지키는 관청이다. 다만 개인적 간섭에만 불평을 가졌던 것이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23일자)


말 한 마디에서도 파시스트 선동의 원칙을 투철하게 지키는 장택상이다. 이상기가 “어린아이 칼 장난”이라고 비하한 것은 대법원장을 찾아온 몇몇 간부들의 집단행동이다. 그런데 장택상은 그 비하의 대상이 마치 “조선독립의 전초전으로 건투하는 국립경찰” 전체인 것처럼 갖다 붙인다. 이익흥 등의 집단행동 자체보다도 장택상의 이런 발언에서 당시 경찰의 자세를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17일의 ‘해명’에서도 장택상은 경찰 간부들의 집단행동에 대한 비난이 “경찰의 태도를 왜곡한 것”이라고 우겼다. 자기 편 한 짓은 무조건 옳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왜곡” 아니면 “오해”라는 것이다. 60여 년 후에 많은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아무개 판박이다.


장택상은 1월 31일 극장 흥행 취체 고시를 발포한 바 있었는데, 2월 15일 6인의 문화계 대표가 그를 방문해서 고시 취소를 요구했다. 그 자리에서 장택상이 자기 의사는 문화예술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데서 그의 사고방식을 또 확인할 수 있다. 극장 지배인실에만 붙일 것을 전 시가에 붙인 것은 말단 경관의 잘못이라는 변명에서도.


“3·1기념일을 기하여 일부 정객들이 극장을 이용하여 어떤 선동을 꾀한다는 정보에 의해서 치안을 교란시키는 사태를 방지코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고시문은 극장 지배인실만 붙이도록 보낸 것이다. 전 시가에 붙인 것은 말단 경관의 잘못이니 곧 떼도록 하겠으며 나는 문화예술에 간섭할 의사가 아니었으니 오해치 말기를 바란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2월 16일자)


이 무렵 장택상의 언설을 하나 더 검토해 본다. 3-1절 행사를 계기로 대대적 테러를 계획하는 측에서 테러 대상 주택 대문에 백묵으로 암호를 표시한다는 소문이 흉흉할 때였다. 2월 24일 이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장택상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런 맹랑한 말이 들려서 그에 관한 재료를 수집하는 한편 만반대책을 세우고 있는 터인데 좌우가 충돌 운운은 정확한 객관적 재료와 타진에 의해서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책임지고 단정하는 바이다. 대문짝에 암호 운운도 그에 대한 인쇄물을 가진 자를 한 놈 붙들어 내고 관하 서원이 몇 군데서 그런 암호를 본 일이 있지만 정확한 조사에 의해서 이 역시 하등의 정치적 배경도 없는 악질 부랑소년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 판명되어서 구태여 이런 장난에 명색을 붙인다면 악질모략이나 신경전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날 근거와 염려는 조금도 없을 뿐더러 가사 그러한 근거가 있다손 치더라도 철벽같은 경찰진 앞에는 절대 실현될 여지가 없을 터이니 일반은 이런 허무맹랑한 낭설에 사로잡히지 말고 절대 안심하여 3·1절을 맞기 바란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2월 25일자)


그런 일을 어떻게 “책임지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대문의 암호 표시는 일제시대에 독립군도 쓰던 것이다. 합리적 근거도 없이 그런 가능성을 극구 부인하는 것을 보면 그 짓을 장택상과 ‘같은 편’에서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