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가는 유엔총회에 조선 문제를 상정하겠다고 12월 초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은 총회가 끝난 지 두 달이 넘도록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가 워싱턴으로 소환된 1주일 후에야 비로소 미국을 떠날 뜻을 밝혔다. 장개석을 만나러 중국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조선 탁치 문제를 검토 - 이 박사 방중코 장 주석과 회견 예정”

[워싱턴 21일 AP발 합동] 당지에 체재 중인 남조선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은 신문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최근 당지에 도착한 하지 중장(도착 이래 신문에 하등의 성명도 하지 않고 있다.)과도 회견하였다. 나는 장개석 주석과 조중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근근 중국으로 향할 예정이다. 중국은 모스크바결정에 의하여 미 소 영과 더불어 조선에 대한 결정권을 보유하고 있는 만치 나는 장 주석과 조선 신탁통치문제를 검토할 터이다. 그리고 당지 주재 임병직은 영경에서 영 외무성과 접촉하여 조선 탁치안 及 기타 조선 문제에 관하여 영 당국의 태도를 알고자 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22일자)


이승만은 결국 달포가 지난 4월 5일에야 미국을 떠나게 되는데, 이 시점에서는 정말로 바로 떠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민주의원은 이승만의 중국 방문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바로 김구 명의의 전문을 장개석에게 보냈다.


“이 박사 명일 남경 착”

22일 민주의원 발표에 의하면 현재 워싱턴에 체재중인 이승만은 장개석과 조선 문제 협의차 동경 맥아더사령부를 거쳐서 24일 남경에 도착하리라 하며 이에 관하여 동원 대리의장 김구 선생 명의로 장 주석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하였다 한다.

“본원 의장 이 박사가 한국 독립 문제를 협의차 귀국을 방문하게 되었는 바, 귀아 양국의 특수친선관계에 감하여 특별히 진력하여 주기 바라나이다. 귀국의 융창과 각하의 건강을 축하하나이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23일자)


민통, 독촉국민회, 반탁투위 등 우익 단체들도 이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이미 중국 남경에 도착했다는 착오가 2월 24일의 민통 담화문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이 움직임이 급했는지 알 수 있다. 독촉에서는 임병직을 영국에 보낸 것까지 포함해서 연합국 상대의 폭넓은 외교활동을 찬양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반탁투위 담화문에서는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이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며 기쁨을 표했다. (<동아일보> 1947년 2월 25일자)


이 급작스런 움직임에 의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급히 미국을 떠날 계획을 세우게 되었을까? 바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가 도로 주저앉은 까닭은 무엇일까?


뒤의 의문부터 생각하면, 재미 활동의 성과가 시원치 않았다고 보인다. 떠날 무렵부터 미국행의 중요성을 엄청나게 선전해서 여비 명목으로 국민 ‘성금’처럼 돈을 모으기까지 했는데, 이런 성과를 거뒀다고 내놓을 것이 없었다. 그가 성과라고 들고 나온 것은 이로부터 한 달 동안 일어난 두 가지 일이었다. 그 하나는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된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3년간 6억 달러의 대 조선 원조 계획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3월 20일자 <뉴욕타임즈>에 나온 것이다.


이런 호재들이 불원간 나타날 가능성은 이미 예견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서둘러 미국을 떠날 생각을 했을까?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추측한다면, 하지를 용공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등 제멋대로 떠들고 있다가 막상 하지가 워싱턴에 오니까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가 이승만을 얼마나 벼르고 있었을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그리고 따로 더 절실한 이유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오늘 일기 끝부분에서 설명하겠다.


‘조선인 대표’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이승만은 어떤 주장을 미국에서 내놓고 있었는가? 소련에 대한 비난에 큰 비중이 있었다. 2월 15일자 일기에 다룬 “남조선 노동운동자에 보낸 소 측 사주”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북조선 주둔 소련군의 소령 하나가 남로당 위원장이나 민전 공동의장인 허헌에게 혼란 책동 ‘지령’을 내렸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AP 기자가 터뜨린 것이다. 국내에서는 누구도 곧이들을 수 없는 이 이야기는 미국인 독자들을 위한 창작물이었던 것 같다. 이승만은 이 이야기가 나온 바로 그 날 이를 지적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워싱턴 14일발 AP합동] 체미중인 남조선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은 소련이 남조선에 혁명이 발생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소련군관이 쓴 서한은 남조선에 혁명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망하고 있다. 그러나 여차한 요구는 국무성 일부의 지시 하에 미군정부가 유화정책을 채용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조선인은 이상의 서한에 놀라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작년 가을에 분란을 꾀하였으나 우리 경찰대와 민간단체는 미 군정부가 중립 입장을 취하여 폭도들을 제어하기보다도 원조한 데도 불구하고 이 폭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군정부의 유화정책은 공산주의운동 及 반미선동과 투쟁하려는 조선 지도자층의 사업을 극히 곤란케 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에 통합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무효력하다는 것을 미국인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서울신문> 1947년 2월 15일자)


이런 네거티브 공작을 꾸준히 하는 가운데 적극적인 정책노선 제시를 한 것이라면 1월 27일 미 국무부에 제출한 6개항 제안이다. 그 내용은 1월 30일자, 2월 12일자, 2월 21일자 여러 신문에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소개되었는데,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조선 독립의 6개안 - 이 박사 미 국무성에 제안”

체미중인 이승만 박사는 민주의원에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민족 재건을 시작함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다음과 같은 6 항목의 요구조건을 미 국무성에 제안 중에 있다.”고 타전하여 왔다 한다.

1) 총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2) 이 과도정부는 미-소 양국 간의 교섭을 방해하는 바 없이 점령군과 기타 중요문제에 관하여 미-소 양국과 교섭할 것

3) 조선의 경제재건을 위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배상 요구를 속히 고려할 것

4) 평등한 지위에서 조선에 통상권을 행할 것

5) 국제 위체(爲替)제도를 설치하고 통화를 안정시킬 것

6) 미국의 보위군을 미-소 양군이 동시 철퇴할 때까지 주둔할 것


1946년 6월 3일의 ‘정읍 발언’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미소공위가 좌초되어 있는 부득이한 상황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는 소극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제 곧 재개될 조짐이 보이는 미소공위를 그 근거인 모스크바결정까지 싸잡아 부정하며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당당히 내놓게 된 것이다.


이승만에게는 미국인 협력자들이 있었다. 캐나다 대사를 지낸 크롬웰, 변호사 스태거즈, 신문기자 출신의 윌리엄스, 상원 원목 해리스, OSS 출신의 굿펠로, 그리고 그의 공보비서를 맡을 올리버 등을 정병준은 꼽았다. (<우남 이승만 연구> 258, 637쪽) 그들 중에는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이용하려는 극우파 인사들도 있었고, 이권을 바라고 그에게 접근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이승만의 정치자금 중 가장 많은 금액은 그의 주장대로 미국에서의 외교 선전과 로비 활동, 그리고 도미 경비로 쓰였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의 워싱턴 주재 사설 고문들에게도 상당액이 소요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28일자 편지에서 굿펠로우에게 매년 ‘총 4만 달러 내지 5만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 굿펠로우는 1948년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워싱턴에서 한국 정부 혹은 이승만 개인의 종합 고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한 종합 계획서를 제출하면서 워싱턴 주재 샴 고문조차 1년에 3만 6천 달러를 받는다며 자신은 그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편 이승만의 공보 고문으로 활동한 올리버에게 지출된 금액은 정확하게 파악된다. 이승만은 1946년 방미했을 때 올리버에게 1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하며 공보 고문으로 일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올리버가 이끌던 워싱턴의 공보 사무실은 1948년에 올리버 4천 달러, 직원 2명에게 각 2,800달러를 지급한 것을 포함해, 2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했으며, 1947~48년간 올리버에게는 매년 2만 달러 가량이 지원되었다. 이들 외에도 제이 제롬 윌리암스, 해롤드 레이디, 프레드릭 브라운 등에게 로비 자금이 건네졌을 것이다. (<우남 이승만 연구> 623-624쪽)


이승만은 왜 장개석을 꼭 만나고 싶어 했을까? 미국 출발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는 결국 귀국하는 길에 장개석을 만나고 돌아왔다. 당시 국민당 정부의 중국은 연합국으로서 발언권이 극히 미약했고 장개석은 미국 정계에 더 이상 영향력이 없는 존재였다. 정병준의 설명에서 예상 못했던 절실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정치자금에 대한 이승만의 수완과 집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김구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승만의 정치자금 조성과 운영 과정에 김구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장개석이 김구의 귀국시 제공한 자금을 이승만이 ‘대미 외교’와 독립운동에 필요하다며 가져갔다는 얘기만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45년 11월 말 입국하는 김구에게 장개석은 미화 20만 달러와 3명의 무전사 및 무전기를 제공했다. 미군정의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김구는 20만 달러를 일단 뉴욕에 있는 중국 대사관에 보낸 후 다시 서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 이에 이승만은 1946년 2월부터 1947년 말까지 모두 4~5 차례에 걸쳐 장개석에게 이 자금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했다. (...)

임시정부에 제공된 자금을 미국 내의 개인 통장으로 입금시켜 달라는 이승만의 요청에 국민당 정부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1946년 내내 워싱턴의 이승만 진영은 중국대사관과 접촉했지만, 돈을 받아낼 수 없었다. (...)

그러나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1946년 말에 방미하게 된 이승만은 주미 중국 대사관 참사 진지매를 통해 장개석에게 또다시 20만 달러를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했다. 나아가 이승만은 귀국 길에 직접 중국을 방문해, 장개석에게 이 자금을 자신에게 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이승만이 방미 후 귀국 길에 왜 번거롭게 동경을 거치고, 다시 중국 상해-남경을 거쳐 귀국했는지에 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주미 중국 대사관과의 협상을 통해 20만 달러를 입수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방미 중인 1947년 1월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남경을 직접 방문해 장개석을 만나길 희망한다는 전문을 타전했다. 결국 이승만은 장개석을 만났지만, 20만 달러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 614-617쪽)


2월 20일경, 얼른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나면 20만 달러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떤 정보에 접했던 것이 아닐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