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이남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는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운동의 많은 부분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그에 대한 진술과 증언에도 파당적인 입장에 얽매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당시 중견 운동가였던 두 사람의 회고를 읽으며 1946년 후반과 1947년 초반의 상황에 대한 진술이 입장에 따라 어떻게 엇갈리는지, 그리고 그런 엇갈림 속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박갑동이 지은 <통곡의 언덕에서>(1991, 서당 펴냄). 1919년 산청군 출생의 박갑동은 1941년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정치부 기자로 들어가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원래 그를 추천한 것은 박헌영 직계인 경성콤그룹에 비해 비주류였던 이정윤과 이우적이었지만 1946년 여름 이후 공산당 분규 속에서 그들과 결별하고 박헌영 직계가 되었다. 전쟁 중 평양으로 가서 문화선전성 구라파부장을 지내고 1953년 남로당 출신 탄압 때 실권했다가 1957년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탈출했다.


고준석이 지은 <해방 1945-1950: 공산주의운동사의 증언>(정범구 옮김, 겨레 펴냄). 1910년 제주 출생의 고준석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재학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고 제적된 후 여러 직업을 거쳐 해방 당시 총독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 기자로 있었다. 해방 후 좌익 정치경제연구소로 조선산업노동조사소(산노)를 설립했는데, 이 산노가 공산당 연구소로 포섭되면서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6년 여름의 분규 때 비주류의 길을 걷고 북로당 노선을 따르다가 전쟁 전에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 책은 1971년 1월부터 1년간 일본에서 나온 <조선연구>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두 책 모두 상당한 오류를 담고 있다. 그중에는 정보력과 기억력의 한계에 인한 착오도 있고 정치적 입장에 따른 편향도 있다. 기술적 착오는 대개 그 동안의 실증적 연구로 보완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적 편향이 흥미로운 것이다. 우익과 미군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임에 반해 공산주의운동의 흐름과 그 관계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정치적 편향은 박갑동의 책에 더 크게 보인다. 고준석의 글이 원래 일본 학술지에 실렸던 것인 반면 박갑동의 글은 1991년 시점에서 한국 출판을 목적으로 쓴 것이라는 차이가 첫 번째 이유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박갑동은 자신이 추종한 박헌영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일성과 여운형 등 그에 저촉되는 인물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여운형에 대한 이런 서술은 지금까지 내가 파악하고 있는 여운형의 모습에 비추어 매우 편향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눈에는 미국과 소련만 있고 조선인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하지 장군과 연락하며 다른 한편으론 평양의 로마넨코 및 그의 앞잡이 김일성과 연락하면서 서울의 동지들에 대해서는 배신도 할 수 있다는 태도가 역력히 보였다. 그날만 해도 이틀 전인 14일 민주의원 결성식에 참가하겠다고 하지 장군에게 약속해 놓고 평양의 눈치를 보고 불참했다.

민전 결성에 있어서도 그 자신과 인민당이 참가한다고 결의해 놓고 스스로가 의장에 취임할 것도 알면서 하지를 의식해 첫날은 불참하고 이튿날 대회가 폐회될 무렵 얼굴을 내밀었다. 여운형의 그같은 심리와 태도를 어느 정도 아는 나는 존경하는 선배로서, 그리고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력을 가진 정치가로서 왜 좀 자주적으로 처신하지 않는가고 안타까워했다. (<통곡의 언덕> 207쪽)


1946년 2월 민주의원과 민전 설립 당시의 상황 서술인데, 추측과 고급 정보가(여운형의 평양 방문) 뒤섞여 있다. 20대 기자의 독자적 시각보다 박헌영의 여운형 비방을 떠오르게 하는 화법이다. 당시의 관점이 아니라 박헌영 직계로 들어선 이후의 관점을 소급 적용시킨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여름의 상황을 적은 아래 대목도 같은 식으로 박헌영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 같다.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 평양의 김일성이 서울에 조직한 반 박헌영 연합전선은 어마어마한 세력이었다. 이에 또 미군정이 가담하여 박헌영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미군정은 우선 이북의 김일성파와 연합하여 이남 최대의 반미 세력인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말살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 미군정 내에서 친 김일성 반공주의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 같은 사람은 술좌석에서 “나는 김일성을 지지한다. 나는 그와 같은 평안도 사람이기 때문에”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이남의 반공세력도 김일성보다는 박헌영 타도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통곡의 언덕> 231쪽)


박갑동의 글에 1991년 한국 출판을 위해 굴절된 부분도 없지 않은 듯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박헌영 노선을 옹호하려는 노력이다.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고려할 필요가 있는 편향성이다.


최능진은 고준석의 글에도 등장하는데, 최를 단순한 반공주의자로 보는 고준석의 시각이 박갑동보다 자연스럽게 보인다. 1946년 7월 경찰의 산노 사무실 습격에 함북청년회가 앞장섰고 자료도 탈취해 갔다고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에게 항의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마무리 문단에서 최능진과 장택상 사이의 대립을 똑같은 친미 반공주의자 사이의 ‘나와바리’ 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공산운동가로서 합당해 보인다. 최능진이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한 것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기술적 착오이지, 정치적 편향에 의한 왜곡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당시에 이 최능진과 수도경찰청의 장택상 사이가 매우 나쁘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구역’ 쟁탈전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 미국과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던 최능진은, 한국전쟁 시에 살해되고 말았다. (<해방 1945-1950> 126-127쪽)


두 사람의 기록이 일치하는 중요한 내용 하나가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의 갈등관계다. 미묘한 갈등의 기미를 고준석이 감지한 것은 1946년 1월 자신이 서기장 겸 편집부장으로 있는 산노 출판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것을 봤을 때였는데, <올바른 노선을 위하여>란 이 팸플릿의 표지에는 “조선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 박헌영 동무 만세”라고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몇 주일 후 이 팸플릿이 이북 사리원에서 트럭째 몰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등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방 1945-1950> 92-95쪽)


1945년 10월 8일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 직후 공산당의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졌다. 서울의 당 중앙 직속으로 하급 당 중앙을 만든 셈이다. 두 달 후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책임비서에 취임할 때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틀을 바꿨다고 고준석이 회고한 것은 착오로 보인다. 12월 17-18일 열린 것은 북조선분국 확대집행위원회였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8월 북로당으로 합당될 때까지 공식 명칭으로 유지되었다.


1946년 들어 이북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제반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역할이 자라나고 김일성의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북조선분국이 서울 당 중앙의 통제를 받는 형식적 관계가 어색하게 되어 갔다. 소련군이 만들어준 유리한 조건 위에 해외에서 귀국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이북에 더 많이 모였기 때문에 당원 기반도 이북 쪽이 더 빨리 넓혀졌다. 그래서 1946년 3월경부터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자칭하는 일이 늘어났고, 서울의 공산당 중앙도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못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아마 고준석 같은 간부 당원들도 “북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6개 장으로 이뤄진 <해방 1945-1950>의 제2장 끝 절 “김일성이냐, 박헌영이냐” 이후 이남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고준석의 회고는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예컨대 1946년 여름 박헌영 체제에 대한 대회파의(고준석은 ‘청당(淸黨)파’라 부름) 도전도 김일성에 대한 선택으로 해석하고, 박헌영의 남로당이 좌익을 석권한 뒤 자신이 굴욕적 복귀를 거부하고 ‘낭인’의 길을 택한 것도 박헌영의 파당행위를 김일성 중심의 중앙부가 바로잡아 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고준석이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낭인 신세에서 ‘권위 있는 선’(북로당 공작선)을 잡아 <우리신문>이란 제호로 김일성을 지지하는 신문을 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김일성 지지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여러 번 밝혔다. 지난 뒤에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당시의 심정이 그럴 수 있었을 것 같다. 해방 전의 파벌 배경이 미약했던 그에게 이남의 좌익 영도력으로는 박헌영 외의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박갑동은 김일성을 시종일관 깎아내린다. 제일 놀라운 점은 박헌영 측에서 일찍부터 ‘가짜 김일성’설을 꺼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서울의 각 신문사가 평양에 파견하는 기자들에게 각종 편의와 지원을 해주고 각 방향에서 소위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김성주의 사진을 많이 찍어 오도록 부탁했다. 그들이 찍어 온 사진이 1백 장을 넘었다. 이 사진을 박달과 박금철에게 보였다. (...) 10월 14일 평양운동장에 나타났던 자칭 ‘김일성 장군’이라는 자의 사진을 박달과 박금철에게 갖다 보이니 두 사람은 펄쩍 뛰며 전혀 다른 사람이며 나이도 전혀 틀린다고 했다.

(...) 두 사람은 평양에 도착하여 곧 김일성이라 자칭하는 자에게 면회를 신청했으나 분리당하여 각각 감금당하고 만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한 것이 11월인데 해가 바뀌고 다음 해 1월말에야 그들은 김일성이란 자에게 호출당했다.

그들이 면회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천보를 습격한 김일성보다 열 살이나 젊어 보이며 키가 커 보이는 젊은 자가 “이 새끼! 전향하여 왜놈들한테 잘 얻어먹어 살이 쪘구나. 변절한 놈들은 보기도 싫어! 빨리 싹 없어져!”라고 호통을 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박금철은 앉은뱅이 박달을 평양에 남기고 혼자 강계로 떠나면서 서울의 박헌영에게 자칭 김일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내왔다. 박헌영이 박금철의 보고를 권오직과 조두원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듣게 된 것이다. (<통곡의 언덕> 137-138쪽)


이야기가 좀 엉성해 보인다. 박헌영이 권오직과 조두원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박갑동이 곁에서 들었다는 것인데, 1월말에 박금철이 1월말에 김일성을 만난 후 보낸 보고라니 2월 어느 시점에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그 때는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책임비서일 때인데, 그런 신분 인물의 신원에 관한 보고를 최고급 간부인 권오직과 조두원이 직접 읽지 않고 박헌영에게 잡담 듣듯이 듣는다? 아무래도 정확한 정식 보고 내용이 아니라 작성 중인 마타도어 같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고준석의 회고 중 주목을 끄는 내용이 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갔을 때 가까운 옛 동지 임해에게 이북 지도자들에 관해 알려달라고 청했을 때 임해가 해줬다는 얘기다.


“박헌영파인 오기섭이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였던 당시부터 분파주의 활동을 하여 김일성 동지를 가짜라고 하는 문서를 당 하부조직에까지 유포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요구당했는데, ‘나는 조선의 트로츠키스트입니다. 이것을 자기비판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오기섭에게 김일성 동지가, ‘지금의 오기섭 동지의 말은 자기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비판이란 것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쁘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힐책했습니다. 그로부터 황해도 도 당부 책임자(이 동지는 김일성 동지와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가 일어나서, 수첩의 페이지를 뒤적이며 김무정 동지가 모월 모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수많은 구체적 사실을 들어 김의 분파주의 언동을 지적하며 자기비판을 요구했습니다. 김무정이 박헌영파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구체적인 분파주의 언동이 폭로되었으므로 이 마음이 약한 장군은 시종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해방 1945-1950> 220-221쪽)


1946년 8월 이후 박헌영파와의 대항에 나선 대회파가 동조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북조선공산당(내지 북로당) 지도부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라고 주장한 사실에는 두 사람의 회고가 일치한다. 그리고 고준석의 회고에는 패퇴한 대회파에게 여러 가닥의 ‘권위 있는 선’이 북로당에서 내려온 사실이 담겨 있다. 고준석 자신도 이 선에 희망을 걸고 굴욕적인 남로당 복귀를 거부했다고 한다.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성시백 등 북조선공산당-북로당의 대남공작이 일부 밝혀져 있어 고준석이 말하는 ‘권위 있는 선’과 부합한다. 김일성의 북로당은 박헌영의 남로당을 거치지 않고 이남 좌익에 대한 활발한 공작을 펼친 것이다.


두 사람의 회고를 읽으면서 북로당의 남한 좌익에 대한 경쟁의식이 1946년 후반의 대남 전략에도 상당한 작용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로당이 박헌영의 남로당 장악을 지지해 준 결과 이남의 좌익 활동은 큰 제약을 겪게 되었고 좌익 활동가 상당수가 이남에서 활동하면서도 남로당 아닌 북로당의 포섭 대상이 되었다. 표면상으로는 박헌영의 손을 들어준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남 좌익세력의 독자적 활동능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 박헌영이 남로당을 장악한 결과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