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미국 측 대표 브라운 소장이 모스크바협정과 미소공위에 관한 미국 측 견해를 몇 차례에 걸쳐 공표하기로 하고 첫 발표를 2월 10일에 내놓았다. 이후 2월 15일, 2월 18일, 2월 25일, 3월 4일까지 총 5차의 발표가 나왔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 시점에 브라운이 전면에 나선 사실을 음미해 본다. 미소공위의 미국 측 최종책임자는 하지 사령관이었고, 실제로 조선인을 상대로 한 미소공위 관계 성명서는 여러 차례 하지 이름으로 나왔었다. 그런데 이제 하지 대신 브라운이 나선 것은 하지가 자리를 비울 계획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 중장 귀국 - 1개월간 예정으로”

믿을만한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수일 중 육군 국무 양 당국과 협의차 왕복 1개월 예정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간 국무장관도 경질되었고 또 동 중장도 이번 대전에 참가하여 벌써 5개년이 되므로 휴가를 겸해서 작년 구랍부터 일시귀국을 전해오던 터이다. 더욱 내 3월 10일부터의 막부회의에 미측 대표로 나갈 마셜 미 국무장관과 요로 각 방면에 조선의 실정을 여실히 보고하여 조선 문제 해결에 한 큰 박차를 가할 것이 크게 기대되고 있다. 그리고 부재중에는 미소공위 미측 수석위원 뿌라운 소장이 그 대행을 하리라고 한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14일자)


하지의 워싱턴행이 발표된 것은 2월 13일이었지만 계획은 벌써 세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반탁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인 홍보활동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므로 브라운이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브라운 이름으로 발표된 다섯 차례 글은 하지가 있었다면 직접 발표했을 내용과 다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2월 10일 제1차 발표문의 핵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모스크바협정이 처음 발표된 후 1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탁치라는 조목에 대한 맹렬한 반대운동이 여러 번째 있었다. 그러나 탁치는 조선에 관한 한 결코 명확히 규정된 것이 아니요, 따라서 공위가 조선국민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그 구체적 안을 작성하기 전에는 누구나 그 내용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탁치에 관한 반대운동이 실지로 작년 5월의 위원회 휴회의 원인을 만들었으며 이래 조선지도자들이 많은 시간과 협력과 정력과 주의를 쓰게 하였다. 이 지도자들이 남북조선의 통일을 방해하여 남조선 독립의 기초를 위태케 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건설적 사업과 조선임시정부 수립에 협력함으로서 조선독립을 획득하려는 데 그들의 시간과 정력을 사용하였더라면 좀 더 애국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모스크바협정과 又는 미소공위의 기능을 이후 오해치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동 위원회의 미측 대표는 돌아오는 몇 주일 동안에 수회의 성명을 발표하려고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추후로 발표되는 성명을 자세히 연구하면 조선 사람들이 오직 위원회의 업무진전을 천연시키고 따라서 조선의 독립을 천연시키는 시기에 적당치 않은 행동이나 그릇 지도된 행동을 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진정한 조선애국자들이 최대의 역량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는 조선독립을 완수할 방법을 제정한 것은 모스크바협정 이외에 아무 기구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바이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11일자)


브라운의 1차 발표문에 대한 민통과 민전의 반응이 보도되었는데, 민통에서는 “조선 독립을 완수할 방법은 모스크바협정 외에 아무 기관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모스크바협정에 의한 찬탁독립은 결코 진정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는 것을 알므로 死로써 항쟁할 방법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반박한 반면 민전에서는 “하지중장의 전후 2차에 긍한 성명에 뒤이어 미국 측의 삼상결정 해석에 대한 일보 전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하여 감사의 意를 표하는 바”라고 환영했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12일자)


2월 15일에서 3월 4일까지 2~5차 발표의 요점을 뽑아본다.


“모스크바협정은 거기에 대한 오해가 조선인간에 전파되고 있고 자기 목적을 위한 약간의 지도자에 의하여 조장되고 있으나 결코 조선을 외국의 통치하에 속박하여 두자는 정신 밑에서는 此를 고안한 것이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4대 연합국 영·중·미·소는 그들의 전쟁 중의 희생적 노력으로서 조선의 해방을 가능케 한 후 순서적 단계에 의한 조선의 완전 독립에 동의한 것이며 조선이 어떤 외국이나 또는 연합국 어떤 1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특별 주의가 고려된 것이다. 該 협정이 성립되었을 때는 전쟁후의 세계정세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세계의 정치 경제의 형태는 다소 명확하지 못한 점이 있다.

모스크바협정에 의하여 성립된 미소공동위원회에 관하여도 많은 조선 사람은 만일 공동위원회에서 협의하기 위하여 조선인민 대표들을 참가시킬 때는 공동위원회가 모스크바협정을 수정하기 위한 무슨 토론회나 논단으로 변할 것 같이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은 전연 오류이다. 최근의 사태로 보아 나는 조선의 독립을 재래할 모스크바협정의 규정을 설명하는 연속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모스크바협정과 및 그 사실상 의미를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들과 토의하여 본 여러 조선 사람들은 모스크바협정은 그 토론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절대로 조선에 유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만족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16일자)


“협의할 정당 及 사회단체는 어느 정도의 강력성과 중요성을 가진 정당 급 사회단체일 뿐 아니라 공동성명서 제5호에 서명하여야 되며 서명 후는 모스크바협정의 적극적 반대를 억제하여야 된다. 공동위원회에 참석할 조선인은 물론 토의하고자 상정된 문제에 한하여 토의하게 될 것이다. 실천의 제 계단 중에 상정될 문제는 적당한 시기에 순차로 토의될 것이다. 위원회의 임무와 범위를 떠난 문제는 전연 토의되지 않을 것이다. 토의의 범위를 떠난 성질의 문제를 상정할 것을 고집하는 자는 토의 진행을 방해하는 자이므로 참석 계속 토의할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가 소속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대하여 공동위원회는 동 위원회의 사업에 협의할 대표를 다시 파견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19일자)


“모스크바결정에 의하여 영 중 소 미 4개국은 전후세계에 있어서 조선의 안전과 완전독립을 일정한 기간 중 보장하였다. 이것이 신탁의 제1의의이다. 세계가 평화적으로 생활하기 위하여 세계의 전국가가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일 약소국가가 내부분쟁과 무질서로 인하여 동요가 있으면 세계평화에 일 위협이 될 것이다. (...) 동등한 입장에서 세계 각국과 경쟁할 수 있도록 조선의 건전한 정상적 발전을 보장하고 조선의 성장 及 향상기간 중 국제적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모스크바결정에 독립을 약속한 4대국은 이 발전기간 중 최고 5년간 조선을 원조 及 후원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것이 모스크바협정 중에 표현되어 있는 신탁의 제2의의이다.

남조선인민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고 기전에는 장기간 군주전제정치를 받아 왔으므로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적 방법과 이념에 미숙하다. 그런고로 그들의 정당은 국가의 장래보다도 소수 정치지도자가 정치적 이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全 조선인이 신탁이라는 숙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증오에 호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安價한 정치적 책동은 정치지도자의 당면목적을 조성할지언정 실제에 있어서는 민중을 오도하고 인민이 정당히 또 당연히 요망하고 있는 독립달성을 지연시키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있을 뿐이다.

신탁의 상세한 내용과 其 실천방법은 모스크바협정에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아직 누구나 모른다. 이것은 모스크바협정 제2조항에 의하여 공동위원회와 조선임시정부 간에서 결정될 성질의 문제이다. (...) 그런고로 일부 정객에 의하여 이러한 치열한 반대는 실제적 의미가 없는 한 글자에 대한 반대에 불과하다. 유일한 결과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도와줄 책임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조선의 정치지도자들의 신뢰성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되며 그들이 조선국가의 운명을 등지고 개척하여 갈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2월 26일자)


“조선인이 여하한 고려도 없이 악의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신탁이라는 숙어의 의미는 연합국이 신조선국가에 대하여 일종의 공동관리의 원조와 조력을 하자고 하는 것이며 원조와 조력의 정확한 성질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공동위원회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또 과도기중 조선임시정부의 안정과 권위를 유지하자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하지중장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사려있는 조선인과 그들의 지도자를 위하여 발표한 특별성명을 인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조선 문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된다. 여러분이나 본관은 모스크바협정의 일어(一語)도 변경할 수 없다. 일부 조선인은 신탁반대의 전국적 운동으로써 서명국가에게 협정을 변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의외의 방면의 영향을 미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남북조선이 통일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여러분 중의 진정한 애국자와 같이 장차 임무를 수행할 일기관인 위대한 연합국의 행동에 대하여 사회적 소동을 계속하는 것보다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 더 중대한 것이다.

본관은 여러분에게 무사려(無思慮)의 애국운동을 하여 비애국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또 통일조선을 위한 임시정부수립을 지연시키는 선동을 계속하지 않도록 절실히 요망하는 바이다.” (<자유신문> 1947년 3월 5일자)


브라운의 연재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2월 17일 민통에서 재차 반박 성명이 있었고 2월 26일 독촉국민회에서 반박 성명이 있었다. 내용은 볼만한 것이 없다. 연재가 끝난 후인 3월 7일 천도교청우당의 성명이 더 눈길을 끈다.


“브라운소장은 모스크바협정 실천에 대한 상세한 성명을 5회에 긍하여 발표하였는데 그 친절 자세한 점에 대하여 감사하여 마지않는 동시에 그 중 우리 동포 及 지도자의 일부분이 정치적 훈련 교양의 부족으로서 기인한 행위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훈사적 언구를 (예여(例如) 조선정치지도자의 신뢰성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되며 그들이 조선국가의 운명을 등에 지고 개척하여 갈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등을) 중복 사용한 것과 소수의 행위로서 임정수립 지연의 책임을 전 민족이 지게 될 듯이 표현된 것은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모스크바협정은 조선이 어느 외국이나 또는 연합국 중 어떤 1국의 통치하에 들어가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가 첨가된, 즉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것이며 신탁 운운은 원조의 의미로서 어떤 보호국적 의미가 아니며 또는 국제헌장에 의한 신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파혹(破惑)케 한 점은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7일자)


브라운의 연재 성명은 종래 미군정 당국자들의 발언에 비해 내용만이 아니라 표현에도 공을 들여 신탁통치와 미소공위에 관한 최선의 설명을 해준 것이다. 그런데 청우당 성명서는 그 내용을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표현에 있어서는 반탁세력에 대한 적개심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2월 1일자 일기에서 청우당의 위상을 설명했는데, 이 성명에서도 청우당의 중립적이고 초연한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청우당의 2월 10일 성명에서도 같은 자세가 확인된다. 김규식 등 합작위 우익 측 위원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던 통일전선에 대해 목적에 동의하면서도 참여에는 신중하겠다는 것이다. 천도교단의 기반 덕분에 당시 금력과 폭력에 휩쓸리고 있던 남조선 정치계에서 초연한 자세를 지킬 수 있었던 청우당이 중도파(중간파) 노선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위하여 최근 민주통일전선(가칭) 제3전선 등이 탄생하려는 데 있어서 청우당 태도에 대하여 그 지향하는 바 노선이 불분명하다는 일부 정계 여론에 대하여 동당에서는 10일 출입기자단에게 당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었다.

“우리 당은 우리 민족 우리 인간의 당연한 기본노선을 행진하기 위하여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활약하여 온 것이다. 남북통일의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는 것도 이 기본노선 행정의 일부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당은 좌익이나 우익을 논할 것 없이 그들이 과거의 과오를 청산하든가 또는 반동적 영역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적 신출발을 할 때에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커다란 연합전선을 형성하려고 하였으며, 앞으로 그러한 시기가 멀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만치 우리 당은 아직까지 좌우익 소속하지 않은 집단이나 인사들이 최근 새로운 연합체를 결성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협조를 하여 온 것은 이상에서 논의한 민주주의자의 총연합체를 형성하는 매개적 노력을 하는 임시적 연락기관으로 인정하고 한 것이요 결코 제3세력을 결성하여 혼란을 조장하는 데는 절대로 행동을 같이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자의 총연맹체가 형성되기 전에 편협한 단체를 조직한다든가 그러한 기구에 투입하지 않을 것을 부언하여 둔다.” (<조선일보> 1947년 2월 11일자)


약 1개월 비울 것을 예상하며 2월 14일 미국으로 떠난 하지는 55일 만인 4월 5일에야 서울에 돌아오게 된다. 남조선주둔군 사령관 부임 후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 5년 만의 귀국이었다. 임지를 좀체로 떠나지 않던 하지의 소환이 온갖 억측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미군정의 실패가 다각적으로 확인되고 이승만의 하지에 대한 공격이 노골화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부재는 심리적으로도 큰 작용을 일으켰다. 하지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한 번 면밀히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