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부인의 딸과 사위 졸리오-퀴리 부부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것은 1935년. 그 다음으로 프랑스인이 화학상을 받은 것은 1987년의 일이다. 물리학상은 1929년 브롤리가 받은 뒤 1991년 젠느가 받을 때까지 60여년 사이에 1966년의 알프레드 카슬러가 유일한 프랑스인 수상자였다.


방사선의 분석을 통한 원자구조 연구로 물리학상을 받은 카슬러의 이름은 독일식이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로렌 지방 출신이니 프랑스로서는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건진 셈이다. 수상이 결정된 뒤 수상이유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카슬러의 대답이 걸작으로 전해진다. “그 논문을 영어로 발표한 덕분 아니겠습니까.” 노벨상이 영어권에만 편중된다는 프랑스사람들의 불만을 대변한 말이다.


상과 벌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당근과 채찍이니 인간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늘 있어 온 것이다. 그런데 벌의 종류는 가두기, 때리기, 죽이기, 재산 뺏기 등 몇 가지 되지 않는데 상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무슨 까닭일까.


인간의 두려움은 모두 비슷하지만 원하는 것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먹고싶은 음식은 가지각색이지만 굶주림은 똑같이 두려워하지 않는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영위하는 모든 활동에 상이 따르게 되었으니 상의 다양성은 바로 가치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달리기 잘해 받는 상, 공부 잘해 받는 상, 착한 일 해 받는 상이 모두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것이 곧 가치의 다양성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노벨상이 다른 모든 상을 압도하는 막중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가치관의 획일화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성의 다양한 발현방법이 고르게 존중받는 분위기에서는 한 가지 상이 모든 사람의 선망대상이 될 수 없다. 1964년 사르트르가 수상을 거부하며 “노벨상은 작가정신을 제도 속에 옭아 넣는다”고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불건전성을 지적한 것이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국적을 보면 평화상 수상자를 낸 나라가 제일 많고 다음으로는 문학상이다. 구미 선진국에 집중된 학술분야에 비해 평화상과 문학상에는 정치적 배려가 따르기 때문이다. 인구와 경제력에 비해 노벨상과 인연이 멀었던 사실을 놓고 우리가 반성할 것은 빈약한 학술정책이다. 상 자체를 따내려 목적의식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은 바로 노벨상의 폐단에 빠지는 길이다.


'미국인의 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怪力, 鬪魂, 淸淨心  (0) 2011.12.21
“같-이-가-자”?  (0) 2011.12.20
한글날은 ‘민족의 날’ (1997. 10. 9)  (0) 2011.12.16
大入명문 특수목적고  (1) 2011.12.15
이남이 할머니, 반가워요.  (0) 2011.12.14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