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은 和田春樹, 後藤乾一, 木畑洋一, 山室信一, 趙景達, 中野聰, 川島眞의 7인이다. 면면으로 보아 일본의 현재 입장에 얽매이지 않는 거시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기대할 수 있다.
편집위원 일동은 간행사에서 이 책이 “미래를 향한 역사 인식과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출발점이 될 것을 바란다”고 했다. 다루는 시기는 동아시아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는 18세기 말에서 냉전구조의 붕괴로 새로운 공동체 구상이 모색되는 오늘날까지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20세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제2권에서 제10권까지 20세기를 10~15년씩 쪼개서 다룬 데 비해 19세기 전체를 한 권에 다룬 제1권은 전체 작업의 도입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각 권의 중심 주제와 시기는 아래와 같다.
제1권: 19세기 / 동아시아세계의 근대
제2권: 19세기 말~1900년대 / 러일전쟁과 한국 병합
제3권: 1910년대 / 세계전쟁과 개조(改造)
제4권: 1920년대 / 사회주의와 내셔널리즘
제5권: 1930년대 / 신질서의 모색
제6권: 1935~1945년 /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대동아공영권’
제7권: 1945~1960년 / 아시아 제 전쟁의 시대
제8권: 1960~1975년 / 베트남전쟁의 시대
제9권: 1975~1990년 / 경제발전과 민주혁명
제10권: 1990년 이후 / 화해와 협력의 미래로
별권: 아시아 연구의 내력과 전망
내게 “올해의 책”을 고르라면 올해 나왔고(제3권까지는 작년 말에) 내가 제일 많이 들여다본 이 책을 고를 수밖에 없다. 아직 제7권까지만 입수해 놓고, 그나마 절반도 못 읽었지만 2011년을 통해 다른 어떤 책보다 내게 중요한 책이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목차를 보면서부터 아주 마음에 든 형식상의 장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각 권이(별권을 제외하고)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각 권의 맨 앞에 40여 쪽 크기의 “통사”가 있다. 편집위원 중 한 사람이 해당 시기를 개관하는 것이다. 편집 작업의 구체적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각 권의 통사에서 제기하는 주제들이 연관성을 가진 것을 볼 때, 편집위원들 사이의 토론이 매우 긴밀하게 이뤄진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열 권의 통사만 따로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면 많은 분량이 벅찬 독자들에게도 좋은 읽을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통사” 뒤에 “통공간논제(通空間論題)”로 세 편의 논문이 담겨 있고, 그 뒤에 “개별사-지역사”를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눠 각각 몇 편씩의 논문을 담고 있다. 통공간논제는 각 시기의 중요한 주제들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 책의 기획에 따라 집필된 것이 분명하다. 개별사-지역사의 영역들은 통공간논제에서 제기된 주제들과 맞추려 애쓴 감도 있지만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맞추지 않은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개별사-지역사에는 이 책에 싣기 위해 쓴 논문 외에 해당 분야의 중요한 기존 논문을 게재한 것도 있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읽어 보니 모두 이 책을 위해 쓴 글로 보인다. 필자의 학설 제시보다 주제에 관한 연구 실적과 현황을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발표된 중요한 기존 연구가 빠짐없이 소개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또 하나 훌륭한 점은 ‘동아시아’의 범위를 신축성 있게 파악하는 것이다. 한-중-일 3국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동아시아가 주축을 이루지만 역사적 상황이나 주제의 성격에 따라 동남아시아 지역을 많이 포함하고, 때로는 인도와 시베리아까지 서술 범위를 넓히기도 한다.
제1권에서 19세기를 개관할 때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서세동점 현상을 넓게 바라보다가 제2권에서는 동아 3국으로 초점을 좁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기를 다룬 제3권에서는 동남아시아까지 시야를 넓혔다가 1920년대를 다룬 제4권에서는 다시 동아 3국에 치중하는 식이다.
아시아를 근동, 중동, 원동(극동)으로 구분하던 유럽중심 관점이야 철 지난 지 오래거니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등의 구분 방식도 외부인의 편의적 관점에 치우친 것이다. 외부 접촉이 적었던 한국인에게는 3국으로 이뤄진 동아시아가 한자-유교 문명권으로 확고하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천하체제를 운영하던 중국인과 대동아공영권을 추구하던 일본인의 인식은 이와 다를 수 있다. 3국의 동아시아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로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진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 넓은 범위도 고려할 여지가 있다.
전통시대에는 동남아시아가 우리와 다른 세계였다 하더라도 서세동점 이후로는 많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해 온 지역이다.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서술에서 이 공동의 경험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자세다. 이웃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 경험의 의미를 더 알뜰하게 새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미를 넓힐 가능성도 검토할 수 있는 길이다.
다시 간행사로 돌아가 보면 냉전구조 해체 이후 유럽에서 지역통합이 가속되고 있는 반면 식민지주의와 전쟁, 냉전의 상처를 아물리지 못한 채 대립감정에 묶여 있는 동아시아 지역이 세계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아쉬워하며 “화해와 협력의 미래”를 향한 역사인식의 필요를 역설한다. 그를 위해 일국사(一國史)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지역사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도 일국사의 폐쇄성을 지적하는 “국사 해체” 주장을 내놓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긍정하는 사람들도 “대안이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질문에 “대안 없는 것이 바로 대안”이라고 대답한 이도 있었는데, 그 궁색함이 참 딱하다.
정조 때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이라며 그 탄압을 청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집요함이 지나친 사람에게 벌을 내리며 정조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정학(正學)의 쇠퇴는 사학의 침해 때문이 아니라 자기 힘이 모자란 때문이다. 사학 탄압에 쓸 힘을 아껴 바른 공부에 힘쓴다면 사학은 탄압하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
우리 사회의 편협한 역사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버린다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이다. 좁은 것이 문제라면 없앨 것이 아니라 넓혀야 한다. 그 작업에서 일본 사회의 앞선 면을 이 책이 보여주며 우리의 역사인식 확장에도 좋은 지침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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