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과학을 德선생과 賽선생으로 받들어 모신 것이 루쉰이었던가? 1910년대 중국 신문화운동의 대표적 논설로 학생 때 읽은 생각이 난다.
아마 당시의 민주주의에서는 개인(individual)의 인권, 과학에서는 원자(atom)의 개념이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individual, atom, 둘 다 "쪼갤 수 없다"는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19세기 중에 확립된 원자론은 근대과학의 환원론적 경향을 대표하는 이론이었다. 자연의 이해는 자연의 정복을 위한 필수조건이고, 자연의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는 환원론은 인간의 자연 정복 꿈과 맺어진 생각이었다. 물질의 근본이 원자로 파악된다는 것은 자연의 완전한 이해를 위한 중요한 열쇠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 자연과학을 지배한 환원론적 믿음은 같은 시기 사회과학의 발생과 발전에도 작용했다. 인간사회에서 개인은 물질계에서 원자와 같은 존재이니, 원자의 탐구를 통해 자연현상의 완전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처럼 개인의 탐구를 통해 인간사회의 완전한 이해를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 위에서 사회과학이 자라난 것이다. 이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학자들도 물론 있었지만, 시대의 주류는 원자-개인에게 쏠려 있었다.
잘 드는 칼이 있으면 뭐든 썰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물질을 원자로 쪼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을 원자로 쪼개고 싶어진다. 원자가 물질의 순수한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화합물은 순수하지 못한,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라는 기분이 들기 쉽다.
인간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관계로 얽혀 있는 것은 현실의 제약으로 본질이 억제되어 있는 불행한 상태이며, 모든 사회관계에서 벗어난 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제약 없이 누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기분이 든다. 19세기 자유주의는 합리적 타당성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인주의적, 원자론적 믿음에서 힘을 얻었던 것이다.
관념적 믿음인 개인주의에 비해 그로부터 파생된 자유주의는 현실 체제에 적용되는 정치이념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동안 현실 조건에 따라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유'의 개념이 부단히 확충되고 조정됨에 따라 '자유주의'의 의미도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개인주의는 정치이념의 배후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원자론적 자연관은 20세기 들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해서 이제는 자연과학에서 지배적 위치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 그런데 사회과학에 파생된 '개인'관에는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없다. 자연에 대해서는 유기론적 관점이 원자론적 관점과 필적하는 위치를 되찾은 반면 사회과학에서는 유기론적 담론이 아직도 큰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이나 정치이념에서 'individualism'에 대칭되는 개념이 무엇일까? 막연히 'socialism'을 생각해 왔다. 그런데 더 확실히 알아보고 싶어 <위키>를 뒤져보니, 이건 안 되겠다. 실제로 이 말이 쓰여 온 범위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못지않게 원자론적 인간관에 입각한 개념이 많았다.
관련 항목을 계속 검토하다 보니 제일 비슷해 보이는 것이 'collectivism'이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이 말이 그중 그럴싸해 보이는 중요한 이유 하나가, 많이 쓰이지 않는 말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말이 그 동안 '집산(集産)주의'라고 번역되어 온 모양인데(물론 일본 뒤를 따라), 점수를 높이 줄 수 없는 번역이다. 의미로 본다면 '집단주의'나 '단체주의'가 더 맞을 것 같은데, 그리 중시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에 이름도 제대로 찾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몇 시간 조사해본 인상으로, 유기론적 관점은 19-20세기 정치이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여러 방면에서 유기론적 관점이 가미된 요소들이 분파처럼 나타나기는 해도, 큰 틀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 보이지 않는다. 메이저리거로 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는 입맛이 없어서 별로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그 영역을 검색이라도 한 번 해봐야겠다. 아무튼 지금까지 훑어본 바로는 사회과학과 정치이념 영역에서 원자론-개인주의 관점이 아직까지도 힘을 잃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의 20세기> 작업에서는 이 방면에서 상식에 저항하는 노력이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뭘 할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나미 강좌 <동아시아근현대통사> (2) | 2011.10.07 |
---|---|
<끝나지 않은 20세기> 앞쪽을 읽은 인상 (1) | 2011.09.28 |
이제 새것을 더 공부하기 싫다. (3) | 2011.09.16 |
경제사를 서술의 주축으로 삼을 생각. (2) | 2011.08.13 |
어떤 책을 만들까? (3) | 2011.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