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발판으로 한 유럽인의 세계정복은 각지의 전통문명에 충격을 주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가 되는 상황 속에서 비교적 강한 전통의 저력을 가지고 있던 동아시아 지역만은 완전한 식민지가 되는 것을 면했지만 역사에 큰 굴곡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충격 속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적극적인 근대화를 이룩하고 유럽 열강을 모델로 한 군국화와 제국주의의 길을 걷는 동안 중국은 전통에의 집착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본질을 갖추지 못한 개혁 속에서 혼란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개혁다운 개혁에 손도 못 대고 있다가 일본의 대외정책이 활성화되자 그 힘에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근대화, 즉 유럽화에 앞서고 뒤진 차이가 20세기 초반 세 나라 사이의 관계를 결정했다. 러-일전쟁(1904-05)으로 유럽의 주변국이자 극동의 경쟁자였던 러시아를 따돌린 일본은 유럽 열강들 사이의 갈등을 틈타 동아시아 지역의 패자(覇者)로 등장했다. 상대적으로 근대화에 뒤진 중국은 그 침략대상이 되었고, 더 저항력이 약했던 우리나라는 합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일본이 근대화에 앞서 성공할 수 있었던 한 까닭으로 기존 정치수준이 낮았던 점이 꼽힌다. 근세에 들여온 유교사상과 고래(古來)의 천황체제를 억지로 결합시킨 바쿠후(幕府)체제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표방하던 도덕의 정치보다 힘에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약점이 급격한 변화에 임해서는 전통의 저항이 적다는 강점으로 오히려 작용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국은 오랜 혼란 끝에 40년대에 이르러 공산혁명을 이뤘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호지세(騎虎之勢) 끝에 태평양전쟁의 비극을 맞은 일본의 지식인들은 공산중국을 부러워해 마지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옛이야기, 중국은 다시 경제후진국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우리의 남북분단에는 이웃 두 나라 모델 사이의 갈등이라는 측면이 있다. 이 분단의 경험이 우리 장래에 좋은 자산으로 작용하는 또 하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될지. 그런데 동아시아 현대사의 도처에 이처럼 아이러니가 널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재적 역사발전의 논리가 서양의 충격으로 꺾여버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