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9. 09:45

기훈이 다녀갈 때 안마에 중독되실까 걱정했는데 별 탈이 없으시다. 그 녀석이 주물러드리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내게도 같은 걸 요구하실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기훈이가 주물러드리는 걸 옆에서 보고 있던 내게 "야, 넌 이렇게 좀 사람이 부드러울 수 없냐?" 주문까지 하셨었다. 진짜로 그 맛을 잊지 않고 내게 계속 요구하셨다면 사흘 연속 출근이 어려웠을 거다. 내가 몸살이 날 테니까.

그래도 틈만 나면 양손을 마주잡고 주무르시는 건 기훈이가 가르쳐드린 것을 잊지 않으신 것 같다. 뻣뻣하시던 손가락이 며칠 사이에 부쩍 풀리셨다. 좀 있으면 숟가락질은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마비가 더 심하신 왼손 두 군데 맥점에 기훈이가 고약을 바르고 반창고로 덮어놓았는데, 하루 지난 뒤 내가 가리키며 누가 붙여드린 거냐고 물었더니 "스님이 붙여주셨어." 하시곤 덧붙이신다. "참 좋은 스님이야. 꼭 너 같은 스님." 맞다. 기훈이가 아직 총각일 때도 어머니는 훌륭한 스님깜이다, 도인이다, 하며 무척 좋아하셨다. 바로 전날 다녀간 기훈이를 조카로, 그리고 수양사위로 분명히 인식하셨지만, 하루 지난 기억에는 "좋은 스님"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나도 괜찮은 스님깜으로 지목하셨었다. 두 번째 파경 보고를 들으시곤 거의 희희낙락하시며 "네 팔자가 아무래도 스님 팔잔가보다. 좀 늙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머리 깎지 않으련?" 하시던 것이 어제 일 같다.)

음식을 절제하시는 능력이 확고해지셨다. 죽을 딱 한두 숟갈 남기시는 일이 몇 번 있었고, 깨끗이 비우실 때도 더 내놓으라고 조르시는 일이 없다. 빈 식판을 치우려면 더 먹게 놔두라고 하실 때가 이따금 있지만 농담이 분명하시다. 과자도 과일도 지나치게 드실까봐 조심스러운 일이 이제 없어졌다. 요즘은 딸기를 많이 즐기시는데, 얼마 전까지는 다 없어질 때까지 일로 용맹정진이시다가, 어느 날 한두 쪽 남았을 때 "너도 먹어라." 하고 넘겨주시더니, 요 일간에는 몇 쪽 드실 때마다 나도 한 쪽씩 먹어야 하게 되었다.

긴 방의 짧은 끝벽을 등지고 어머니와 또 한 분 할머니가 나란히 누워계신다. 어머니와 동연배이신데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대범하신 인상이다. 그 자제들이 간식 공급에 아주 열심인데, 어머니가 딸기 좋아하시는 것을 그분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분이 식후에 늘 딸기를 드시는데, 여사님들이 조금씩 나눠서 어머니께 권하니까 오물오물 잘 받아 드시더라고. 틀니는 며칠 전에 넣어드리려다가 실패했는데, 틀니 없이 과일을 못 드시리라 생각하고 즙만 갈아드렸던 것이, 알고 보니 딸기, 바나나 같이 육질이 부드러운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할머니께 고마운 마음이 있어 드나들 때도 인사를 깍듯이 드리는데 대범하게 잘 받아주신다. 엊그제 점심 후 딸기 대접이 없기에 냉장고를 열어보니 내가 가져온 딸기만 있었다. 어쩌다 그 댁 공급이 잘 안 된 모양이라 보은을 위한 물실호기! 딸기를 씻어 어머니보다 먼저 그분께 갖다드렸더니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씨익 웃으신다. 어머니를 돌아보니 끄덕끄덕하신다. 그러고 보니 그날부터였나? 딸기 잡술 때 "너도 먹어라." 말씀이 잦아지신 것이.

식사 후엔 과자를 두어 쪽 드린 다음 딸기나 과일즙을 올리는 것이 후식의 규범이 되었는데, 오늘 저녁 마침 큰형이 두고 간 강정과 내가 사둔 웨하스가 다 떨어져 있었다. 식사 후에 딸기를 먹여 드린 다음 앉았으려니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어머니, 저 밑에 다녀오는 동안 쉬고 계세요."

"밑에? 뭐하러?"

"어머니 과자 구하러요."

"과자? 안 먹어도 된다."

"어머니가 식후에 과자 한 쪽 못 드시니 제 마음이 아픕니다."

"하! 그런 호강 나 필요 없다."

"어머니 호강이 문제가 아니라 아들들 체면을 생각해 주세요. 아들이 셋이나 있으면서 어머니 과자도 챙겨드리지 못한다면 남들이 저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구나. 그럼 다녀오너라."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과자 진열대를 훑어보는데 웨하스보다 먼저 '홈런볼'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먹어본 건데, 요것도 우물우물 괜찮을 것 같다. 웨하스와 함께 사서 올라와 새 품목을 먼저 맛보여 드렸는데, 우물우물 꿀떡은 하셨지만 별로 감동의 기색이 없으시다. 이어 웨하스를 까 드리니 이건 반갑게 받아 무신다. 그런데 웨하스 두 쪽을 드신 뒤 홈런볼 봉지에 눈길을 꽂으시며 "저건 뭐냐?" "조금 전 한 알 드신 건데 더 드셔 보시겠어요?" "그러자꾸나." 그런데 이번엔 초콜렛 맛을 음미하는 기색이 역력하시더니 꿀떡 하신 다음 "더!" 하신다. 여러 날 만에 듣는 "더!" 소리가 반갑기까지 하다. 요즘은 식사 중 숟갈이 좀 늦어져도 전혀 재촉을 않으시는데. 홈런볼 세 알에 저렇게 행복해 하실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효자의 길은 참 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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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