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9. 09:24

오늘은 조금 일찍 병실에 들어서며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제 결석했기 때문이다. 저녁때 한겨레 강좌도 준비가 필요한 외에 오랫만에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기에 앞서 근황을 파악할 필요 때문에 병원 갈 틈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공교롭게 아내도 낮에는 이 집, 저녁에는 저 집에 일 나가는 날이었다.

웬만큼 회복되시기 전에는 시간 감각이 별로 없으셔서, 오면 왔나보다, 가면 갔나보다였는데, 요즘은 40여 시간 안 보이면 확연하게 아실 것 같았다. 과연 내 얼굴이 보이자 마자 지적을 하신다. 그런데 지적하시는 방법이 뜻밖이었다. 먼저 환한 웃음과 함께 "야! 네 얼굴을 보니까 참 좋구나." 그런 다음에 덧붙이신다. "그런데 네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평소처럼 자주 나타나지 않은 데 대한 지적이지만 참 절묘한 화법이시다. 그저께도 감명받은 일이 있다. 작은형이 4시쯤 오겠다고 했고 나도 맞춰 가서 얼굴 보기로 했는데, 장조림이 떨어졌기 때문에 점심때 잠깐 들렀다. 평소보다 짧은 시간 지나고 일어서기가 미안해서 지금 갔다가 조금 후에 작은형을 데려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작은형에 대한 애정은 거의 본능적이시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환해지시며 탄성을 터뜨리신다. "기목이가? 아이구 신통해라!" 그런데 터뜨리시고 나서 얼핏 내게 미안한 생각이 드셨는지 덧붙이신다. "너도 신통하구... 참 신통하다."

내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서운할 수도 있는 태도시다. 어쩌다 한 번 나타나는 형 얘기엔 저렇게 반색을 하시면서 맨날 살펴드리는 나는 뒷전이라니... 하지만 작은형에 대한 총애를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깡촌에 뒷전이라도 어디야? 본능적 반응에 이어 저만큼 마무리를 하려는 노력이 가상하시고, 앞뒤를 가리실 만큼 사고력이 회복되신 것이 반갑다.

이런 훌륭하신 태도는 마땅히 북돋워드려야 한다. 걸상에 엉덩이를 도로 붙이고 말씀드렸다. "어머니, 아들 중에 어쩌다 신통한 놈 하나 있으면 저 혼자 신통한 거지만, 아들마다 이렇게 신통하다면 다들 누구 닮아서 신통한 거 아니겠어요? 제가 노래를 하나 불러드리고 싶네요." 그리고는 어머니와 함께 부르는 네 곡 가운데 하나를 패러디했다. "송아지, 송아지, 신통송아지... 엄마소도 신통소, 엄마 닮았네." 더할 수 없이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서 넘쳐나신다. 편애를 드러낸 실태에 조금 미안해 하시는 판에 감싸 드리는 것이 고맙고, 패러디의 재미도 한껏 누리시는 것 같다. 아들 하고 이 수준으로 놀다가 철부지 물리치료사한테 붙잡혀 계시려면 얼마나 답답하고 짜증나실가.

오늘은 회복되신 후 최고로 점잖은 태도를 보이셨다. 호통이 하나도 없으셨다. 장난기 섞인 호통조차도. 그리고 이따금 부리시는 응석어린 애교도 없으시고. 그렇다고 엄숙하게 무게잡으시는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점잖으신 태도. 식사 후에 금강경을 읽다가 잘 이해를 못하시겠다든가, 논평하시는 태도도 학술토론에 가장 바람직한, 진지하면서도 대범한 말투셨다. 나도 거기 이끌려 최대한 성의 있는 해설을 한참 해드리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내 등 뒤의 할머니를 살펴드리고 있던 닥터 한이 걸어나오다가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경탄의 기색이 곁들인 웃음이다. 하기야 90 노모 문안 와서 이렇게 금강경 강해를 베풀어드리는 효자가 흔하진 않겠지.

금강경에 많이 집중하셨는지, 금세 노곤한 기색을 보이신다. 조금 쉬시라고, 옆 방에서 책 읽고 있다가 다시 와 뵙겠다고 말씀드리니 순순히 눈을 감으신다. 조용히 책을 읽을 만한 곳은 여기저기 있지만 오늘은 바로 옆 일반병실에 가서 앉아 있었다. 불원간 일반병실로 옮기실 가능성을 생각해서 실제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옆방의 정 여사가 지난 가을 처음 와서 이 방에 며칠 있을 때 말마디라도 나눈 사이고 인상도 각별히 좋은 사람이라서 부탁하기가 편하다.

한 시간 가량 있어 보니, 할머니들 활동성이 낫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번잡스럽지는 않다. 텔레비전 켜져 있는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 덜 심심하실 것 같기는 하고. 그런데 문제는 야간근무가 없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밤에 깨어 있으실 때가 많다는데, 중환자실에는 당직하는 여사님이 있고, 한밤중에 일도 별로 없으니 많이 응대해 드리는 모양이라. 당직 때 응대를 좀 줄여드려 보라고 여사님들에게 권해 봐야겠다.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보니 깨어 계시다. 과일즙을 꺼내 드리며 늘 하는 대로 "어머니, 이거 한 번 뚜껑을 열면 다섯 숟갈은 드셔야 해요." 하니까 "다섯 숟갈, 좋지." 흔쾌하시다. 네 숟갈째 떠 드리려니 "이게 네 숟갈째지?" 하시고, 다섯 숟갈 드린 뒤에 뚜껑 닫고 치울 때는 '좀 더 먹어도 좋겠다.' 하는 기색인데도 더 달라는 말씀이 없으시다. 회복 후로 음식 찾는 데 늘 맹렬하시던 태도가 보이지 않으신다.

두 번째 일어서면서 "어머니, 저 갔다가 내일 큰형 데려올께요." 했더니 눈이 둥그레져서 "기봉이를 어떻게?" 하신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든 데려와야죠." 하니까 말없이 흐뭇한 웃음. 그런데 기목이 데려온다고 할 때의 즉각적인 반색과는 차이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 오늘은 며느리한테 고맙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점심식사 나오기 전에 채 여사가 장조림병을 밥상 위에 갖다놓으니까 "이게 뭐지?" 하시기에 "며느리가 만들어드린 장조림이예요. 그냥 잡숫기는 좀 안 좋고, 죽에 섞어 드시기에 좋은 거죠." 하니까 "그래, 며느리가 잘해 줘서 참 고맙구나." 하셨다. 장조림병이건 뭐건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야, 저거 먹자!" "다 먹어치우자!" 늘 달려드시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참! 아까 딸기 드실 때는 "너도 먹어라."고 거듭거듭 권하셔서 나도 여러 쪽 먹었다. 최근까지도 내게 권하시는 것은 당신이 더 못 잡수실 만큼 잡수신 뒤에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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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