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아시아사 서술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내가 잘할 만한 일이 틀림없다. 그래서 준비 제대로 하는 자세를 지키기 위해 매주 한 차례는 여기다 생각을 적기로 했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적지 않고 지냈다.

적지 않고 지내는 동안 생각이 달라진 게 있다. '해야겠다'는 쪽에서 '하고 싶다'는 쪽으로 비중이 옮겨진 것이다. 이 악물고 하는 '작업'은 해방일기로 정말 끝내고 싶다. 그 뒤의 일은 좀 편한 마음으로, '노느니 염불하는' 기분으로 하고 싶다.

해방일기 작업의 성과가 분명히 느껴지는 덕분에 달라지는 생각이다. 역사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이 그 성과다. 전에도 알기는 알던 관계지만, 눈 똑바로 뜨고 긴장해서 들여다봐야 알아볼 수 있던 관계였는데,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진다고 할까?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니얼 퍼거슨 책을 리뷰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퍼거슨의 꼼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은 맥락에 대한 자신감 덕분이다.

새로 느껴지는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을 펼쳐봐야겠다. 물론 이 자신감이 지나친 자만심일 위험도 염두에 두기는 해야겠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시간 여유도 있으니까 가급적 마음을 편한 쪽으로 먹어 보는 것이 좋겠다.

핵심 컨텐츠는 지금까지 확보된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적절한 자료를 모으기는 하겠지만, 지금 떠올리지 못하는 관점이나 대상을 새로 찾아나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근대성과 전통에 관한 내 생각은 지금 사회에 유용한 메시지를 뽑아낼 만큼 정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효과적인 표현방법을 찾는 것이 이제 중요한 일이다.

동아시아 20세기사 작업을 떠올리면서부터 제도적 지원, 나아가 조직활동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큰 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이것을 극히 개인적인 일로 바꿔서 생각해보려 한다. 컨텐츠 확충을 위해서는 물량의 투입이 필요하겠지만, 효과적 표현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질적 특성, 인간적 신뢰감을 추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제 노을님과 한 잔 하다가 좋은 지적을 받았다. 내 블로그에 들어왔다가 새로 올린 글이 해방일기만 있으면 꽝이고, 다른 글이 있으면 신이 난다고 한다. 어머니 카테고리에 글이 꾸준히 올라올 때가 좋았는데, 요새는 너무 꽝이 많아서 들어올 생각도 잘 안 나기 시작한다고, 사뭇 협박조다.

듣고 가만 생각하니 맞다! 내 꼴을 있는 대로 보여준 글들을 독자들이 얼마나 좋아했나. 책으로 묶어놓고 보니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내가 독자들에게 보여줄 만한 생각도 아주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길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열심히 덧붙여 놓아야만 보여줄 만한 모습이 될 것이라는 학삐리의 강박, 화장 않고는 외출 못하는 된장녀와 짝이 맞는 게 아닐까?

그래서 심각한 체하는 글보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가벼운 글을 더 열심히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노출 수준을 높이기로 했다. 이 사회에서 우리 또래로는 원래 잘 벗는 편이지만, 그래도 꺼리는 것이 꽤 있었다. 그리고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예의 때문에 노출을 삼갈 영역도 많았다. 꺼리는 것, 삼가는 것을 바짝 줄이려 한다. 아주 홀랑 벗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환갑 노인에게 허용되는 주책의 한도를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 [19금]까지는 아니더라도 [15금] 정도 딱지 붙이는 글도 더러 써야겠다.

20세기 동아시아사 서술을 위해 읽을 책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안 보면 안 되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보면 더 좋은' 것이라서 읽는 자세를 지키려 한다. 이 나이 되도록 키워놓은 생각을 뛰어넘어 더 훌륭한 생각을 얻어다가 팔아먹을 생각일랑 말아야겠다. 지금 가진 생각을 힘껏 체화해서 잘 표현하는 길을 찾는 데 노력을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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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