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출범 당시의 한 제국은 중앙집권력이 약했다. 한 고조(高祖) 유방은 진나라가 무너질 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항우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할거세력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심지어 유방의 명목상 신하 중에도 동맹세력의 성격을 가진 한신(韓信) 같은 인물이 있었다. 


한신은 유방의 천하 제패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런데 유방이 천자 자리에 오른 후 반역의 죄목으로 숙청된 것이 무척 억울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한신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자초한 일로 볼 수 있다. 제(齊)나라 정벌 때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신은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받은 후 동북방을 원정,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평정했다. 그보다 동남쪽에 있던 제나라가 또 하나 중요한 대국이었는데, 유방은 제나라까지 군사력으로 정벌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 생각해서 역이기(酈食其)를 사신으로 보내 (실제로는 동맹 성격의) 투항을 권유했다.


역이기가 제나라 왕 설득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한신이 듣고 군대를 쉬게 하려 할 때 모사 괴통(蒯通)이 그를 부추겼다. 한신은 힘든 전투로 조나라 50여 성을 겨우 얻었는데 일개 서생 역이기가 세 치 혀 운동만으로 제나라 70여 성을 얻는다니, 그 꼴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 앉았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향해 ‘닥치고 공격’에 나서자 제왕은 역이기를 솥에 삶아죽이고 도망쳐 항우의 원조를 청했다.


결과는 한신의 대성공이었다. 항우가 보낸 용저(龍且)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제나라 확보에 성공했다. 그런 뒤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제나라 왕에 봉해달라고 청했다. 제나라는 항우 세력과 직접 마주치는 곳인데 민심이 불안하기 때문에 임시 왕[假王]으로라도 세워줘야 통치가 안정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항우군의 포위 아래 곤경에 빠져 있던 유방은 한신의 요청에 발끈했다. “빨리 와 도와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놈은 제 몫 챙기기만 바쁘구나!” 욕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측근들이 유방의 발을 슬쩍 밟아 입을 막아놓고 귓속말을 했다. 지금 성질부릴 형편이 아니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주라고. 상황을 깨달은 유방은 오히려 더 통 크게 나왔다. “임시 왕은 무슨 임시 왕이야! 진짜 왕 하라고 그래!” 


그래서 한신은 제왕이 되기는 했는데, 십여 년 후 뒤집어쓴 죄목보다 이것이 진짜 ‘반역’이라면 반역이었다. 유방이 그를 제왕에 봉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사기> 권 89~93에는 한신을 비롯한 한나라 초기의 이성 제후들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황족도 여러 명 제후에 책봉된 것은 이성 제후들을 견제하는 번병(藩屛)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세운 제국은 아직 제국다운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다운 제국을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정리한 것이 이성 제후였다. 기원전 195년 유방이 죽을 때까지 이 사업이 진행되었다. 흉노에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을 맺은 것도 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이 죽을 무렵 연왕 노관(盧綰)이 흉노에 투항했는데, 한나라 권력구조의 변화가 단적으로 비쳐진 사건이었다. 노관은 유방의 세력이 미미할 때부터 한결같은 충성을 바친 심복이었다. 그런 노관도 이성 제후의 정리를 피해갈 수 없었고, 막장에 몰린 그의 선택은 흉노 행이었던 것이다.


이성 제후가 정리되자 이번에는 황실 내의 모순이 이리저리 터져 나왔다. 안으로는 여후(呂后)가 권력을 장악하여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밖으로는 종실 제후들이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는 추세가 나타났다. 여후의 세도는 15년간 계속되다가 기원전 180년 문제의 즉위 후 해소되었으나 제후 통제 문제는 20여 년이 더 지나 기원전 154년에야 오-초(吳-楚) 7국의 난을 계기로 겨우 극복되었다. 제국의 선포로부터 50년이 지나서야 제국다운 제국의 틀이 잡힌 셈이다.

 

한나라 초기의 군현제 지역과 봉건제 지역. 황제 직할의 군현은 내륙 쪽에 설치되었고 동쪽 일대는 제후국으로 분봉되었다.

 

기원전 154년의 반란에 참여한 7개 제후국



7국의 난을 촉발한 계기는 조조(晁錯)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문제와 경제(景帝)의 큰 신임을 받은 조조는 제후국의 세력을 줄여나가는 삭번책(削藩策)을 추진했고, 오왕 초왕 등 제후들이 이에 반발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반란 초기에 제후들은 자기네가 황제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조 같은 간신을 처단하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경제는 조조를 처형하고 제후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통하지 않았고, 결국 전면적 내전을 통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조가 또한 제안했던 흉노 대책도 그의 억울한 죽음으로 막히고 말았다. 그가 문제에게 올린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는 대규모 둔전(屯田)으로 변경을 충실하게 하는 정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40여 년간 계속되어 온 굴욕적인 대 흉노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적극적 시도가 나타난 것이다. 현실에서는 조조가 죽은 20여 년 후 그보다 훨씬 더 강경한 정책이 무제(武帝)에 의해 추진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계기로 한나라의 중앙집권체제가 안정되자 재정이 풍족해졌다. 십여 년이 지난 기원전 141년 무제가 즉위할 때는 엄청난 분량의 곡식이 국가의 곳간에 쌓여 썩어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자원을 발판으로 무제의 흉노 정벌이 시작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