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도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나 서적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약속을 했다. 어린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로 새나 쥐를 쏘고, 좀 자라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충당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새나 짐승을 사냥하며 지내다가, 필요할 때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 싸움이 유리할 때는 나아가고 불리할 때는 후퇴하였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이익을 위해서 일을 꾸밀 뿐 예의는 고려하지 않았다. (...) 건장한 사람이 좋은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이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사람을 중히 여기고, 노약자를 경시하였던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에 그려져 있는 전형적인 유목민으로서 흉노의 모습이다. (1) 문자가 없다는 점, (2) 모든 남자가 활에 익숙하고 병사로 동원된다는 점, (3) 예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 농경민인 중국인의 눈에 두드러져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몇 가지 특징만 보더라도 유목민에게는 국가와 같은 대규모 정치조직이 어려울 것 같다. 비트포겔은 유목민 ‘사회’의 성립 자체가 단독으로 이뤄지기 힘든 것이라고 보았다. 다양한 생활용품을 자체 내에서 모두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환을 (안 되면 약탈이라도) 행할 수 있는 농경사회가 존재해야 유목민사회도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수한 유목사회의 존재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유목 활동은 원래 수렵-채집에서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다. 계절에 따른 초식동물 떼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따라다니는 데서 유목이 시작되었다. 따라다니는 중에 인위적 관리 작업이 조금씩 늘어난 것이다. 최초의 유목사회는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체 내에서 조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농경사회와 접촉을 갖게 되면 교환을 통해 노력을 줄이고 편의를 늘리는 분업관계를 맺게 된다. 농경문명이 전 세계로 확산된 뒤에는 그런 접촉을 전연 안 가지는 유목사회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20세기 후반기에 몽고와 시베리아의 유목민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그중에는 농경지와 수공업 등을 갖춘 마을의 유적도 있다. 농경사회와의 분업관계가 완제품의 수입에 그치지 않고 얼마간의 생산수단까지 도입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목 활동에 필요한 사회 조직에는 규모의 한계가 있다.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가족-씨족의 범위를 넘어 계절에 따른 이동을 함께 하는 부족 단위까지는 자연스럽게 조직되는데, 부족이 번성해서 규모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벌의 분봉처럼 부족을 쪼개야 한다. 한꺼번에 몰고 다닐 가축 떼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부족 간에는 물자 교환의 필요도 별로 없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 나란히 존재했다.

 

그렇다면 ‘유목 제국’이란 하나의 형용모순이 아닐까? 농경사회에 비해 유목사회에서는 구성원 대부분이 같은 일을 하며 살고 잉여생산도 크지 않기 때문에 국가와 같은 대규모 조직을 운영할 전문 인력을 많이 키울 수 없다. 부족 단위를 넘어서는 큰 조직 활동은 농경사회와의 관계 때문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농경사회의 공격을 막고 필요할 때는 약탈에 나서기 위해. 보다 일상적으로는 물자의 교환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래서 기원전 3세기 말에 건설된 ‘흉노 제국’은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쪽 농경사회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는 데 따라 그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군사-정치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발전시킨 조직 기술과 원리를 활용함으로써 유목민들이 오랫동안 유리한 조건을 누릴 때도 있었다. 조직의 필요와 방법이 모두 농경사회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그림자 제국’이라 하는 것이다. <사기> ‘흉노열전’ 에 보이는 묵특(冒頓) 선우의 굴기 과정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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