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묵특은 두만(頭曼) 선우의 맏아들이었지만 두만은 다른 아들에게 선우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서 일부러 묵특을 위험한 지경에 빠트렸다고 한다.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내놓고 월지를 공격함으로써 묵특을 죽이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묵특이 위기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초인적 지혜와 용기를 증명했기 때문에 두만도 그를 물리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아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해 묵특을 제거해야 했다는 데서 당시 흉노 사회에 장자 계승의 원칙이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겪어 중용된 뒤에도 묵특이 두만을 공격해서 살해한 데서는 이 원칙이 아직 확고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묵특(재위 기원전 209-174) 이후 선우 자리는 노상(老上, 기원전 174-160)과 군신(軍臣, 기원전 160-126)으로 부자 계승이 되었으나 군신의 아들 어단(於單)이 숙부 이치사(伊雉斜, 기원전 126-114)에게 쫓겨나 한나라에 투항하면서 이 원칙이 무너졌다. 

 

앞 회에서 설명한 것처럼 임금 자리의 장자 계승은 국가 규모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원칙이다. 개인의 지혜와 완력보다 확실한 계승권이 보장해 주는 권위와 안정성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묵특이 이 원칙을 도입한 것은 제국 규모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이 원칙이 무너진 것은 한 무제(漢 武帝)의 흉노 정벌이 시작된 뒤의 위기 속에서였다.

 

묵특이 두만을 제거하고 선우 자리를 탈취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묵특은 부하들에게 자기가 언제든 명적(鳴鏑)을 날릴 때는 모두 즉각 같은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자기 애마에게 명적을 날렸다. 망설이며 쏘지 못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다음에는 자기 애첩에게 명적을 날렸다. 역시 망설인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러고 나서 기회를 만들어 두만에게 명적을 날렸다. 두만은 바로 고슴도치가 되었다.

 

흉노의 병사란 적령기의 모든 남성이었다. 생업에 종사하다가 필요할 때 자기 말 타고 자기 활 들고 모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병사들이 상식과 인정에 어긋나는 명령을 일사불란하게 따른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묵특은 그들을 직업군인으로 훈련시킨 것이다. 이 훈련의 효과가 두만의 제거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유목세력을 통합하는 데도, 한나라 군대에 대항하는 데도 두루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유목세력 통합의 과정이 동호(東胡)를 공격하는 장면으로 예시되어 있다. 

 

묵특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호가 세력이 강했는데,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동호 왕이 듣자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특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말했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묵특이 자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줄로 안 동호 왕이 얼마 뒤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閼氏 선우의 처첩) 한 사람을 얻고 싶다고 청했다. 묵특이 또 좌우에 물었다.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동호가 연지를 요구하는 것은 무례합니다. 출병해서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특은 말했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끼는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 보내주었다. 

 

이로써 동호는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을 넘보게 되었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천여 리에 걸쳐 비어 있는 황무지가 있었다. 쌍방은 각각 지형에 따라 수비 초소를 세워놓고 있었다. 동호가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초소 밖의 황무지는 흉노에게 어차피 무용지물이니 우리가 차지하면 좋겠소.” 묵특이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말했다. “버려진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겠습니다.”
그러자 묵특은 크게 성을 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후퇴하는 자는 즉시 죽이겠다.” 동호는 애초에 묵특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 묵특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순식간에 동호를 대파하고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월지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누번, 백양, 하남왕 등의 영지를 병합하였다. 또 연(燕)과 대(代)를 공격하여 일찍이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사기> “흉노열전”)

가치관의 전환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애첩도 버릴 수 있고 명마도 버릴 수 있지만 땅은 버릴 수 없다는 묵특의 관점, 이것은 유목민의 관점이 아니다. 영토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전환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목이 달아난 부하들은 ‘영토’ 같은 데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옮겨 다니며 살던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