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묵특의 제국 건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많은 장정이 상비군으로 편성되면서 생산 활동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좌-우 현왕, 좌-우 녹려왕, 좌-우 대장, 좌-우 대도위 등 작위와 관직, 그리고 왕부(王府) 등 정치기구를 만들었고 이 조직 운영에도 더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 통합된 다른 유목사회의 착취를 통해 그 비용을 조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상호 착취를 통해 큰 조직을 지탱할 만한 잉여생산이 유목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요한 작위와 관직을 좌-우로 나누어 좌를 동쪽에, 우를 서쪽에 배치한 것만 보더라도 묵특의 제국은 남쪽의 중화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중원 농경사회의 생산력 증대로 유목사회에 대한 압력이 늘어났다. 향상된 군사력과 경제력을 무기로 토지, 인력과 물자 등 유목사회의 자원을 탈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이 진행된 것이다. 유목민의 조직 확장과 강화는 그 대응으로 방어적 입장에서 시작되었다.

 

유목민의 조직 확장 성공 여부는 농경사회와의 관계로부터 조직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조직력 덕분에 물자 거래에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었고 약탈 활동으로 이득을 얻기도 했다. 유목사회의 대규모 조직은 그 동기와 수단이 모두 농경사회의 발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농경사회가 분열되어 있던 전국시대까지는 유목사회의 통합 규모에도 한계가 있었다. 조(趙)나라, 진(秦)나라, 연(燕)나라 등 인접한 제후국들이 모두 중원 내의 쟁투에 집중할 필요 때문에 인근의 유목민에게 극단적인 공세를 취할 수 없었고, 유목민 사이에도 근접한 제후국과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조나라 무령왕(武寧王, 기원전 326-299)이 병사들에게 오랑캐의 복식이던 바지를 입혀 기병(騎兵)을 양성한 일이 알려져 있다. 바지만 빌려왔겠는가? 그 무렵의 제후국들은 오랑캐를 용병으로도 활용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통일로 상황이 바뀌었다. 농경사회를 통일한 후 진나라의 큰 사업 하나가 장성 축조였다. 유목민과의 거래를 (군사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일원화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진나라의 통일 직후 묵특 선우의 유목세력 통합은 그 반작용이었다. 묵특이 아무리 군사적 천재라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 내에 그 많은 세력을 우격다짐만으로 복속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경사회 쪽의 일방적인 창구 일원화로 피해를 입고 있던 여러 세력이 통합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묵특의 창구 일원화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둔 결정적 계기가 중국사에 ‘평성의 치욕(平城之恥)’이란 이름을 남긴 기원전 201년의 전투였다. 항우(項羽)를 막 물리치고 황제에 즉위한 유방(劉邦)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하나 생겼다. 한왕 신(韓王 信)이 흉노에 투항한 것이다. 분노한 유방이 30만 대군을 일으켜 정벌에 나섰는데 흉노는 40만 대군으로 이를 공략, 한나라 황제가 7일간 포위되어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70여 년간 한나라는 흉노에 해마다 막대한 재물을 보내고 황실 여인을 흉노에 시집보내는 등 굴욕적일 정도의 유화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 거래로 흉노가 얻은 이득이 조직의 비용을 충당하고 통합된 여러 세력을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평성의 싸움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극히 간략한데 그 상황은 너무나 극적인 것이라서 많은 의문이 남는다. 천하를 통일한 30만 대군 앞에 거칠 것이 무엇이랴, 호호탕탕 진군하다가 막 통합된 유목세력의 40만 대군 앞에서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40만 대군을 그 시점에서 그 장소에 집결시킨 것은 엄청난 수준의 준비가 필요한 일인데, 통합된 지 얼마 안 되는 유목세력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손-오자(孫-吳子) 수준의 병법가가 있었던 것일까?

 


더욱 신기한 것은 한나라 황제를 통쾌하게 잡아 죽이는 대신 실컷 골려준 뒤 풀어주고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어 70여 년간 누린 사실이다. 그렇게 유리한 조건을 그렇게 오래 누린다는 것은 인질 잡아두는 방법 정도로 되지 않는 일이다. 이 역시 정상급의 병법가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이다.


병법가만이 아니라 온갖 인재들이 묵특 선우의 막하에 모여 있지 않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 한왕 신의 흉노 투항을 이야기했다. 기원전 202년 한제국의 출범 때 강역의 서쪽 절반은 군현으로 편제하고 동쪽 절반은 제후국으로 쪼개놓았다. 제후 중에는 종실(宗室) 제후와 이성(異姓) 제후가 있었고, 이성 제후는 유방의 동맹세력들이었다. 일단 제국이 성립된 뒤에는 이성 제후를 밀어내기 위한 압박이 시작되었는데, 한왕 신에게는 흉노 제압이라는 과중한 짐이 지워졌다. 흉노를 제압할 군사력을 갖지 못한 한왕은 흉노와 타협하는 고식책을 쓰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내통’으로 단죄될 위기에 빠지자 흉노에 투항해 버린 것이었다.


한왕에게 제후 비슷한 신분을 제공할 수 있는 제국 체제가 흉노 측에 갖춰져 있지 않았다면 투항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묵특의 유목사회 통합에 중원에서 전파된 정치-행정-군사 기술이 많이 활용되었을 것이다.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처럼 전국 말기에는 중원에서 오랑캐 땅으로 망명하는 고급 인력이 많았다. 각국의 중앙집권화에 밀려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진나라에게 멸망당하는 나라 지배층의 도피도 있었다. 그들은 유목사회에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있는 대로 재능을 바쳤고, 그 공헌을 제일 잘 활용한 지도자가 묵특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을 소개한 일이 있다. 한 문제(文帝)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이라 한다. <사기> “흉노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처음 흉노는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선우에게 진언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單于)께서 풍습을 바꿔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하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으시면 모두 버리십시오. 그것이 젖과 유제품처럼 편리하고 맛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농경사회의 소비문화를 차단해야 흉노의 전략적 우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중항열의 주장이었다. 당시 흉노사회에 사치 풍조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락이 주어지면 거기 길드는 인간의 습성은 이런 경각심으로 어느 정도 늦출 수는 있어도 아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세대가 지나 한 무제가 즉위하는 기원전 141년 무렵에는 흉노의 요구는 너무 많아지고 한나라의 국력은 자라나 ‘평성 체제’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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