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춘추시대를 통해 오랑캐의 땅으로 여겨지던 장강 유역에서 초, 오, 월 세 나라가 나타나자마자 중원을 호령하는 위세를 보인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중원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오랑캐스러움’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기원전 638년 송 양공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은 중원 문화에 물들지 않은 초나라 군대의 씩씩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런 오랑캐의 씩씩함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넓게 통할 수 있었을까? 중원의 오래된 나라들도 새로운 전쟁 방식을 익히고 있었고, 오랑캐도 중원에 일단 끼어들면 중원 문화에 물들어 오랑캐다움을 잃어버리는 추세가 있었다.

 

더 중요한 조건은 획득할 인적-물적 자원이 주변부에 풍성하다는 점에 있었다. 농경문화를 발전시켜 큰 인구와 생산력을 키워놓고 있으면서도 하-상-주 중심의 조공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있던 지역이 가장 중요한 정복 대상이었다. 그런 지역은 장강 유역에 많았다. 장강 중-하류 유역은 춘추시대에 초-오-월을 통해 중원에 편입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지역인 장강 상류 유역, 스촨(四川) 분지는 어떤 사정이었을까?


몇 백 년 후 한(漢)나라가 쇠퇴할 때 제갈량(諸葛亮)이 내놓은 천하 3분지계는 과거 황하문화권과 장강문화권, 파촉문화권의 영역으로 세력권을 가르자는 것이었다. 한나라 4백 년 동안 스촨 지역은 제국체제의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한나라 이전부터 갖고 있던 풍부한 자원으로 촉한(蜀漢)의 근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촨 지역 고대사에 관해서는 문헌 기록이 극히 적다. <사기> ‘진(秦)본기’에는 혜왕(惠王) 9년(기원전 316) 사마조(司馬錯)가 촉(蜀)을 정벌해 멸망시켰다는 기사에 이어 몇 차례 촉후(蜀侯)의 반란 등 짧은 기사 몇 개가 보일 뿐이다. <화양국지(華陽國志)>, <산해경(山海經>, <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 얼마간의 기록이 실려 있지만 사료로서 신뢰성이 약하다. 


그런데 최근 30년 동안 이 지역의 고고학 발굴이 놀라운 내용을 쏟아내고 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1986년 삼성퇴(三星堆) 유적의 제사갱(祭祀坑) 출토였다.

 

삼성퇴 1, 2호 제사갱의 발굴 상태


삼성퇴 발굴의 역사 자체가 참으로 기구하다. 청두(成都)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1930년대 초 상당량의 옥기(玉器)가 우발적으로 출토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1934년부터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몇 차례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서 파생된 변방문화에 불과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중시되지 않았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신중국의 본격적 발굴이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사방 2킬로미터 크기 도성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천년기 후반, 상나라와 같은 시기에 상나라 도읍과 맞먹는 크기의 도성이 이 지역에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도성의 확인에 따라 발굴작업이 심화된 결과 1986년에 제사갱이 발견된 것이다. 두 개 구덩이의 풍성한 출토 내용은 ‘중국의 경이’를 넘어 ‘전 세계의 경이’를 불러일으킬 수준이었다. 병마용(兵馬俑)보다 더 큰 발견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당시 중국문명의 중심지로 인식되어 온 상나라의 유적 출토 내용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뒤지지 않으면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삼성퇴 유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봄 충칭(重慶) 지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의 고대 상황에 궁금증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행 후 <바이두백과>로 삼성퇴에 관한 기초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귀국 후 동네 도서관에서 웨난(岳南)의 <삼성퇴의 청동문명>(심규호-유소영 옮김, 2책, 일빛 펴냄)이 눈에 띄었다. ‘고고학 르포’라 할 수 있는 이 책으로 삼성퇴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중국 고고학계의 상황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양국지> 등 신뢰성이 약한 문헌자료 내용을 새 고고학적 발견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시도가 많이 담겨있는데, 바람직한 노력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삼성퇴의 특이한 청동기 출토품


1986년 이후 스촨 지역의 고대문화를 바라보는 고고학계의 시각이 달라졌다. 황하문명의 한 지류가 아니라 그와 대등한 하나의 큰 흐름이 이 지역에 있었다고 보게 된 것이다. 그 흐름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 작업이 넓게 펼쳐졌고, 1990년대에 몇 개 중요한 유적지가 발견된 끝에 2001년, 삼성퇴와 맞먹는 품질과 규모의 금사(金沙) 유적이 청두시 서쪽 교외에서 발굴되었다. 다량의 뛰어난 청동기와 옥기 외에 가면(假面), 관대(冠帶) 등 특이한 금제품이 여럿 나왔다고 한다. 고촉국(古蜀國)의 도읍이 삼성퇴에서 금사로 옮겨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측한다고 한다.


기원전 316년에 진나라가 촉나라를 정복한 후 바로 군현제에 편입시키지 않고 촉후(蜀侯)를 임명했는데, 그 후 30여 년간 진나라가 임명한 촉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사기> ‘진 본기’에 몇 차례 보인다. 촉나라 왕조를 멸망시키고도 그 지역의 독립성을 소멸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의 촉나라 정복에 관한 설화가 있다. 촉나라가 진나라의 도움을 얻으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혜왕이 그 기회에 촉나라를 잡아먹으려고 꾀를 썼다는 것이다. 큰 석우(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촉왕에게 준다며, 꼬리 밑에 금 조각을 붙여놓고 금똥(屎金)이라고 했다. 대단한 보물로 여긴 촉왕이 장사들을 보내 석우를 끌어오게 해서 넓은 길이 생겼다. 그 길로 혜왕이 군대를 보내 촉나라를 공격했다는 것. 산시(陝西)성에서 스촨성으로 넘어가는 길에 ‘석우도(石牛道)’라는 별명이 남아있다.)

 

삼국지에서 익숙한 촉잔(蜀棧)의 관문 검문관(劍門關)

 
상나라에서 주나라 시대에 걸쳐 황하문화권과 대등한 수준의 문화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장강문화권과 파촉문화권이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화문명으로 합류하는 과정에서 황하문화권이 주도권을 갖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제철기술의 획기적 발전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것 아닐까 궁리를 해봤지만, 지금까지 고고 발굴 성과가 이 가설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문자의 발달로 생각이 끌린다. 장강 유역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상나라 유적처럼 풍부한 명문(銘文)과 복골(卜骨)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문명에서 문자의 역할은 워낙 의미가 넓고 큰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앞으로 생각을 모아봐야겠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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