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신뢰’가 확장되기 바란다. 

지난 주 문 대통령의 스웨덴의회 연설에서 ‘신뢰’란 말이 마음에 크게 남았다. 중계를 볼 때는 가볍게 들렸는데, 연설문을 다시 읽어보면서 그 의미가 무척 심장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세 가지 방향(또는 층위)에서 ‘신뢰’를 말했다. 

 

첫째 국민 간의 신뢰. 평화롭게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을 모두가 갖고 있다는 믿음 위에서 오해를 줄이고 이해를 넓힘으로써 “평범한 평화”를 키워내는 것이 항구적이고 완전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평범한”이란 말이 깊이 와 닿는다. 세상을 바꾸는 “완전한 평화”가 아니라 일상적 감각 속에서 국민의 마음이 평화에 젖어들 때 상대방의 동기를 나쁜 쪽으로만 상상하던 버릇에서 벗어날 것이다.


둘째 대화에 대한 신뢰. “평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이론(異論)이 나올 수 있는 말이다. 핵무기의 억지력이 평화를 보장해준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피상적인 관점이다. 억지력이 보장해주는 평화란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의 평화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형태로 꼭 폭발하지 않더라도 인간사회의 갈등이 평화를 해치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억지력에 의한 평화 역시 대화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억지력과 대화 양쪽 다 전쟁을 막기 위해 필요한 요소이지만, 전쟁 막는 것을 넘어 적극적 의미의 평화를 바라보는 데는 대화가 본질적인 요소에 틀림없다.


셋째 국제사회의 신뢰. 한반도평화의 기초가 될 신뢰는 남북 양자 간의 신뢰에 그칠 수 없다. 국제사회가 함께 나누는 신뢰라야 한반도평화가 세계평화와 유기적으로 어울려 생산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반만년 역사에서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다”는 믿음이 지금 현실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만들어 증명”함으로써 세계인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신뢰의 확장성을 말하는 이 셋째 층위에 생각이 많이 머무른다. 신뢰를 폐쇄적 신뢰와 개방적 신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로버트 퍼트넘은 <나 혼자 볼링(Bowling Alone, 2000)>에서 본딩(bonding)과 브리징(bridging)의 차이를 말했다. 동질적 집단 내의 유대감은 구체적 이해관계 위에 세워지지만 이질적 집단 간의 연대감은 공유하는 가치관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70년 전 민족사회가 일본 지배에서 막 해방됐을 때는 민족 내부의 유대감이 확고했다. 민족사회는 조상대대로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공동체였고, 식민지배도 함께 겼었다. 식민지배자들의 힘에 기대어 약간의 비민족적-반민족적 요소가 자라나 있었지만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민족사회와 유리된 존재로서 영향력이 제한되어 있었다. 당시의 민족사회는 외부의 도움 없이도 공동체를 지켜나갈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외부세력의 극심한 교란 때문에 공동체가 깨어졌던 것이다.


민족공동체가 깨어진 후 참혹한 내전에 이어 수십 년간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분단-대립 상태를 유리하게 받아들이는 세력들이 득세한 이 기간 동안 남북의 주민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에 길들여지면서 휴전선 건너편을 나쁘게만 보라는 체제교육의 압력 아래 정보가 차단된 채로 지냈다. 압력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하므로 불편한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쪼개진 민족사회의 파편들 사이에 유대감이 약해진 것이다.


1980년대 말 몇몇 사람이나마 북한을 방문하고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40년 전의 민족공동체를 그대로 복원할 희망이 떠돌았다. 1993년 초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 이런 말이 있었다. 
 
칠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통일지상주의가 아닙니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입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마음만 먹으면 설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의 믿음이었다.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 원인이던 세계적 냉전이 끝났다. 남한에서 분단체제를 지탱해 오던 군사독재도 끝났다. 그리고 40여 년 전 청년기에 분단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사회를 이끄는 위치에 와 있었다. “모든 가치를 초월하는 가치”가 민족에 있다고 한 문익환 선생의 일갈은 40년 전 기성세대의 오류를 바로잡아야겠다는 그 세대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분단의 역사에서 1990년경까지의 40여 년과 그 후의 30년은 의미가 다르다. 1990년 이전의 분단에는 단순명쾌한 이유가 안팎에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분단 지속은 민족사회 내부, 더 깊은 곳에서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미국의 네오콘 세력 등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으려는 외부의 요인도 있었고 분단 지속을 원하는 수구세력의 저항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민족 유대감의 약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분단 이전의 민족사회 경험이 없고 분단 상태 속에서 자라난 세대는 그 동안 살아온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감이 약해졌다기보다 흐려졌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도 같다. 평창의 여자아이스하키 팀을 생각해 보자. 많은 준비를 하고도 무리한 통합 때문에 출전 기회를 잃은 일부 선수들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대회 시작 전에는 많았다. 그러나 경기가 일단 진행되자 ‘민족 팀’ 성립을 반가워하는 마음이 더 크게 드러났다. ‘따로’ 지낸 기간이 길기 때문에 ‘너와 나’를 구분하는 마음이 컸지만 ‘함께’ 하는 경험을 통해 바닥에 깔려있던 ‘우리’ 의식이 살아난 것이다.


남북의 접근 과정에서 이와 같은 유대감의 회복이 많은 방면에서 이뤄질 것이다. 개성공단 수준의 접촉을 통해서도 관계자들이 인식의 큰 변화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처음에는 동남아 어느 곳에 공장을 짓고 현지인을 채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지나다 보면 소통이 늘어나 일을 ‘함께’ 하는 관계가 되더라는 것이다. 언어를 공유하고 많은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우리 윗세대는 ‘남한, 북한’이라 하지 않고 ‘이남, 이북’이라 했다. 두 개 덩어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덩어리의 이쪽과 저쪽으로 본 것이다. 남북의 접근이 진행되는 데 따라 윗세대의 관점으로 차츰 돌아갈 것이 예상된다.


민족 유대감은 지금 그 대부분이 수면 밑에 잠복해 있는 상황이다. 평창올림픽이나 판문점회담 같은 ‘이벤트’를 통해서만 그 일각이 잠깐씩 드러나곤 할 뿐이다. 앞으로 개성공단 등 합작사업과 금강산 등 관광이 활성화되는 데 따라 그 본체가 서서히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접촉을 늘리는 길을 열려고 애쓰는 단계다. 민족 유대감의 잠재적 동력이 당장 제대로 활용될 수 없는 단계다. 


박근혜가 팔아먹은 양두구육(羊頭狗肉) 중 제일 그럴싸했던 것 하나가 “평화 프로세스”였다. 한반도평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가장 고심하던 문제가 평화 정착 과정의 입체성에 있었다. 그 과정에 가치체계의 변화가 따를 것이므로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청사진을 그려놓기가 어려운 문제다.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을 약속하는 것 같은 ‘프로세스’라는 말에 많이들 속았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프로세스는 무슨 얼어 죽을 프로세스, 개성공단 틀어막는 데 어떤 프로세스가 작동했단 말인가!


남북 간 화해의 초기 단계에서는 같은 민족 내의 유대감보다 인접하는 두 국가 사이의 연대감에 의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유대감에 입각한 깊이 있는 신뢰보다 얕더라도 흔들릴 염려 없는 신뢰를 연대감 속에서 먼저 키워야겠다. 단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연애결혼보다 주변에서 두루 권해주고 축하해주는 중매결혼을 생각할 상황이다. 기질이 아무리 잘 맞는 두 사람이라도 초년에 온갖 어려운 곡절이 예상되는 상황이라면 일시적 문제 때문에 관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주변의 도움이 요긴하다. 주변의 도움이 점점 필요 없게 되어가는 과정이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일 것이다.

주변의 도움 받기에 좋은 국제정세가 형성되어 왔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한반도 평화가 진도를 맞추지 못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물류(物流)를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 주변 국가들의 국익이 한반도 평화에 맞춰져 있다. 일본의 보수정권도 외면할 수 없는 방향이다. 북한 개방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에도 큰 가치를 더해줄 것이다. 세계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네 국익을 위해 한반도 평화를 지지할 나라들이 차고 넘친다.

 

국제정세의 어떤 변화든 혜택을 보는 나라들이 있으면 손해를 보는 나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는 혜택을 볼 나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너무 늦어져서 세계평화의 불안 요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방향을 놓고는 이해관계가 다소 엇갈리더라도,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 자체를 반대할 나라는 거의 없다.
북한 개방과 한반도 평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라가 딱 하나 있다. 미국이다. 미국은 위치 때문에 북한 개방에서 기대할 혜택이 아시아와 유럽의 경쟁국들보다 적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큰 핸디캡 하나를 제거하는 데 따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의 입장이 불리해질 수 있다. 또한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 들어서까지 미국의 진로를 크게 좌우해 온 군-산 복합체 세력에게는 한반도 평화 자체가 반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이야기하는데, 국제사회의 신뢰를 가장 크게 해치는 나라가 또한 미국이다. 북한 문제만이 아니라 기후협약 탈퇴, 이란 핵협정 파기, 이스라엘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 등등 세계 구석구석에서 신뢰를 뒤집고 긴장을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행태를 트럼프의 캐릭터와 연결해서 흔히 이해한다. 사업가(businessman) 아닌 투기꾼(speculator)이 본업이라서 격동이 큰 판세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트럼프라 아니라도 미국이 원래 투기꾼의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해방일기>와 <냉전 이후> 작업을 하면서 미국이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고 유지해 온 역할에 주목했다.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은 “전쟁국가 미국” 작업을 통해 미국이 세계평화를 저해해 온 추세를 밝히고 있다. “전쟁국가”! 아주 적절한 키워드다. 20세기 내내 미국은 우월한 생산력과 군사력으로 세계정세의 칼자루를 쥐기 위해 대립과 갈등을 만들고 키우는 데 매진해 온 나라다. 지금 트럼프 같은 인물이 지도자로 나서게 된 것은 근년 들어 미국의 우세가 둔화되는 데 따라 체면을 내던지고 본색을 거침없이 드러내게 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북한과 협상에 트럼프가 성심으로 임할 것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김정은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을 키우려는 투기꾼의 ‘전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술이 협상 진행에 얼마간의 도움이 된 것은 그가 미국의 국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서 오는 ‘틈새’ 덕분이라고 본다.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도움은 되지만 ‘신뢰’에 입각한 세계평화와 한반도평화에 궁극적인 보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을 말했을 때 나는 그 새로운 길이 국제사회와의 대화를 넓히는 길이 되기 바랐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23682)

20년 전 미국의 제네바협정 파기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추방될 때와는 세계정세도 달라지고 미국 사정도 달라졌다. 정치가의 자격이 없는 트럼프 같은 인물에게 백악관을 맡기게 된 것은 미국민이 만족할 만한 국가 전망을 주류 정치계가 더 이상 보여줄 수 없게 된 막장 현상이라고 나는 본다. 스스로 빚어놓은 한반도 문제를 결자해지할 능력이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국제사회는 미국의 지도력-지배력-영향력이 줄어드는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이 변화에 앞장서서 다자간 구조의 새로운 질서를 빚어가고 있다. 20년 전에는 미국이 지목하는 대로 "불량국가(rogue state)"도 되고 "악의 축(axis of evil)"도 되었지만 지금은 미국 자신이 그런 호칭을 모면하기 바쁘다. 미국의 동의 없이라도 유엔 제재 해제를 바라보는 것이 북한의 "새로운 길"이 되기 바란다. 북한 개방을 위한 열쇠를 이제 미국만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진핑의 평양 방문을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주장이 이 방문에서 나올 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세계평화에 공헌하면서 국제사회에 진입하고 싶다는 북한의 호소를 국제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의 표현으로서 이 방문에 의미가 있다. 한반도평화에 대한 미국의 독점권이 해소되고 국제사회의 폭넓은 신뢰에 입각한 한반도평화가 세워지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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