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니며 구경을 잘 하려면 안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안경을 꺼내 봤다. 지난 2년 동안 안경을 전혀 쓰지 않고 살았다. 중학교 때 흑판 보기가 힘들어져 시력을 측정하니 양쪽 다 0.1이 나와 쓰기 시작한 안경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책 볼 때와 잠 잘 때 외에는 거의 안경을 벗는 일 없이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 몇 해 전부터 안경과 작별을 시작했다.


근년에 ‘운동’이라고 해온 것이 당구와 산책이다. 당구는 같이 칠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1주일에 한두 차례 치게 되고, 매일 꾸준히 하는 운동은 산책이다. 작년까지 십여 년 살던 일산은 산책에 좋은 환경이었다. 집에서 걸어 다닐 만한 길고 짧은 산책로가 얼마든지 있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있다가 해 기울 무렵 대개 산책에 나서는데, 종종 안경을 잊어버리고 다닐 때가 있게 되었다. 같은 동네를 맨날 다니다 보니 동네가 집안처럼 느껴지게 된 셈이다. 처음에는 안경 잊고 나온 것을 깨달을 때 당황하곤 했는데, 거듭되다 보니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산책 나가는 길에 안경 생각이 나도 그냥 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맨눈으로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서울이든 파주든 좀 멀리 나갈 때만 안경을 쓰다가 차츰 그나마 쓰지 않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경이 내 삶에 그렇게도 필요한 물건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학생 시절에는 절대적인 필수품이었다. 흑판을 읽어야 할 뿐 아니라 선생님 눈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괜히 혼나는 수가 있으니까. 군대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뒤로는 안경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글 읽는 데는 안경이 필요 없고, 윗사람 눈치 살필 필요도 없는 직종으로 나아갔으니까. 그런데도 ‘안경 없는 나’를 생각지 못한 것은 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의지해 사는 동안 인이 박힌 때문이다.


퇴각로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은 요 몇 해 사이의 일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퇴각로에 접어든 것은 더 오래된 일이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나도 지지 않고 누려야겠다는 마음이 큰 것이 진격의 단계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무분별한 욕심을 거두고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그러다 또 어느 단계에 이르러 세상을 바꾸려 들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쓰게 되는 것이 퇴각의 단계일 것이다. 


내 행로를 돌아보면 40대에 들어서며 교수직을 떠난 것이 가장 적극적인 진격의 자세였던 것 같다. 대학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잘하겠다는 의지였다. 50대 접어들어 연변에서 몇 해 지내는 동안 ‘선택과 집중’의 단계로 넘어갔다. 쓸데없는 (세상에서 행세하겠다는) 욕심 접어놓고 공부와 글쓰기에 매달려 꽤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60대 들어 큰 작업 <해방일기>를 해내고 나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공부를 많이 쌓아나가는 데 주력해 왔는데, 이제 공부와 생각이 양적으로는 더 바랄 것 없이 쌓여 있다. 지금부터 필요한 일은 구슬을 모으기보다 꿰는 일, 쌓아 놓은 공부와 생각이 품은 의미를 발효시켜 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구자보다 사상가의 역할을 바라보고, 그를 위해 ‘퇴각’의 자세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마음이 안경과의 작별을 불러온 것이다. 안경을 쓰는 것은 시력 좋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나도 봐야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걸 꼭 다 봐야 하나? 내 눈에 그냥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되나? 내 경제적 신분은 ‘차상위’ 계층이다. 하고 싶은 일을 돈이 모자라 참고 사는 것이 많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세상을 비관하지는 않는다. 익숙해진 검소한 생활 속에서 생각을 키우고 다듬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번 산샤 관광 같은 일 더러 할 수 있으면 호강으로 누린다. 돈 많은 사람들 하는 일 내가 못한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돈 많고 적은 것도 사람의 분수고 시력 좋고 나쁜 것도 사람의 분수다. 내 분수에 만족할 때 내 삶의 의미를 키우는 길이 더 넓어진다.


안경과의 작별에 끝까지 쐐기로 작용한 것이 운전이다. 안경 안 끼고는 표지판을 빨리 알아볼 수 없고 길 위에서 버벅거리면 나 혼자 불편한 게 아니라 민폐가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안경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차 안에 두고 지냈다. 훤히 아는 가까운 길은 맨눈으로 운전하더라도 익숙지 않은 길에서는 꼭 안경을 끼고 운전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운전할 때도 안경을 안 쓰게 되었다.


안경 없이 운전하게 되면서 운전 습관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운전을 가급적 덜 하고 싶어졌다. 35년 전 운전을 시작한 이래 특별한 상황 아니면 운전하기가 싫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 시력 좋은 운전자들 틈에 끼어 핸디캡을 안고 운전한다는 것이 이제 불편하게 느껴진다. 전에는 차 몰고 다니던 곳을 가급적 버스로 다니게 되고, 버스로 다니기 힘든 곳은 가급적 안 다니게 되었다.


굳이 운전을 할 때도 빨리 가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다. 운전 초년에는 같은 조건에서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것이 기분 좋았고 부당한 끼어들기를 당할 때 화가 났다. 지금은 다르다. 시력 시원찮은 내가 부득이하게 운전대 잡고 나온 게 다른 운전자들에게 미안한 일이고, 그들 틈에 끼어 천천히라도 움직여갈 수 있는 것이 감지덕지할 뿐이다.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자동차문명’의 의미를 한 차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제주도 떠날 때 ‘차 없는 제주도’ 되기 바라는 뜻의 글 쓴 것을 얼마 전 “퇴각일기”에 붙인 일이 있는데, 개인용 자동차의 범람이 환경 파괴와 자원 낭비를 불러온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교통이 자동차 위주로 돌아가는 데는 관계 업계의 획책도 있겠지만 일반인들의 ‘자아(自我)’ 인식방법에 더 큰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나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다. ‘마이카’가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자유를 실컷 누리기도 했다. 1980년대 대구 살 때 생각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러 다닐 수 있었고 1990년대 제주 살 때 기분 내키는 대로 풍광을 살펴보러 나설 수 있었다. 아직 차가 그리 많지 않을 때였다. 지금은 같은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동료 운전자들의 존재가 그 자유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 자유가 무한한 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백한 사례다.


‘마이카’만이 아니라 현대인은 일반적으로 ‘내 것’에 무리한 집착을 가진다. 근대 이전의 대부분 사회에 비해 ‘우리 것’을 덜 누리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이 교도소에서 ‘내 수도꼭지’가 일으키는 문제를 예리하게 관찰한 일이 있다. 관리자들이 ‘물 절약’을 위해 수도에서 꼭지를 빼어 놓는 데서 유발된 수도꼭지의 ‘사유화’ 현상에서 조직 원리의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서울의 도처에서 문득문득 그 씁쓸한 수도꼭지의 기억을 상기하게 된다. 수많은 자동차들로 체증을 이룬 도로의 한복판에서 걷는 것보다 더 느리게 꿈틀대는 버스 속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예의 그 수도꼭지를 생각한다. 분양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 붐비는 인파 속에서 나는 먹통 수도꼭지 앞에서 마른 침을 삼키던 예의 그 갈증을 생각한다.

8개의 수도꼭지로 될 일이 20개 30개의 수도꼭지로도 안 되는 일은 교도소가 아닌 바깥세상에도 얼마든지 있다. 자동차도 그렇고 아파트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대학입시도 그렇고 화려한 백화점의 수많은 상품들도 그렇다.

나는 낯선 서울거리를 걸으며 버릇처럼 수도꼭지를 상기한다. 맨손으로 수도꼭지를 비틀다가 하얗게 핏기가 가신 엄지와 검지의 통증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잘못된 소유, 잘못된 사유가 한편으로 얼마나 엄청난 낭비를 가져오며,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심한 궁핍을 가져오는가를 생각한다. 망망대해 위를 나는 목마른 기러기를 생각한다.


연변에서는 마이카 없이 지낸다. 15년 전 여기서 살 때는 차를 몰고 다닐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에 비해 차 보유가 쉬워졌지만 이제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차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엄두가 안 난다. 서울시내야 어디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데 다른 외곽지역을 대중교통으로 다니려면 시간이 너무 든다. 매주 한 차례씩 다니는 파주 출판도시만 하더라도 인천 검단의 집에서 차를 몰고 가면 30분이 안 걸리는데, 버스로 가려면 아마 세 시간은 걸릴 것이다.


차 없이 살고 싶지만 교통사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차를 보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수도에 몇 개 ‘우리 꼭지’가 달려 있으면 될 일을 수십 개의 ‘내 꼭지’를 갖도록 강요하는 제도와 정책이 이렇게 범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의 파편화를 유도하는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에는 많은 지적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 유도에 너무나 기꺼이 넘어가는 현대인의 자세에서 더 큰 문제를 나는 본다.


절대화된 ‘자유’와 절대화된 ‘평등’에 대한 믿음이다. 자유와 평등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비용’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보편적이다. 나도 그런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고, 그런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교수직에 오래 남아있었다면 그런 믿음과 사명감이 더 오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앞을 내가 가리며 살다 보니 그런 호강을 길게 누릴 수 없었다.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재산과 권력을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과 떳떳하게 어울리기 위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곧 깨우치게 되었다.


안경을 안 끼고 차를 몰고 다니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었다. 면허시험 시력 측정은 안경을 끼고 한 것이다. 안경 없이 시력이 면허 기준에 미달하는 것이라면 내가 규범을 벗어나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위험한 운전은 타인에게도 위협을 가하는 일이므로 양심이 편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정기 건강검진에서 안경 안 끼고 시력 측정을 했는데 양쪽 모두 1.0 전후로 나오는 것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0.1이라고 늘 믿어온 맨눈 시력이 그렇게 좋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어서 담당자를 한참 귀찮게 굴기까지 했다. 결국 병원을 나오면서는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 하나가 또 생각났다.

정鄭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度)뜨고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신발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도로 돌아갔다. 탁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왔을 때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직접 발로 신어 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현실을 본뜬 탁을 상대하는 제자백가들의 공리공담을 풍자하는 <한비자>의 예화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