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명은 황하(黃河)문명?

1969년에 사학과로 옮기고 그 이듬해부터 중국사상사를 전공분야로 잡았다. 그리고부터 몇 해 동안은 고대사에 공부를 집중해서 학부 졸업논문도 석사논문도 그 영역을 다뤘다. 그러나 고대사에 관심이 묶인 것은 아니었고, 사상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점을 고대사에서 찾은 것이었다. 


통시적 관점을 추구한 것은 역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것이 시대별로 전공영역을 획정하는 역사학계의 관습과 맞지 않아서 제도권 학술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민두기 교수와의 불화도 여기에 일부 원인이 있었다.[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38277] 그래서 학회활동을 동양사학회보다 과학사학회에서 하게 되었다.

 

아무튼 공부의 시작 단계 여러 해를 중국고대사에 집중하며 지냈는데, 지난 5월 충칭(重慶)-산샤(三峽)를 둘러보고 돌아온 후 그 시절 공부했던 내용을 오랜만에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황하 유역을 중국문명의 발상지로 여겨 온 믿음을 뒤집어보게 되었다. 스촨(四川) 분지의 고대문명이 중국문명의 흐름 속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에 새로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50년 전까지도 스웨덴 고고학자 앤더슨(Johan Gunnar Andersson,1874~1960)의 관점이 중국 선사시대 연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1914년부터 중국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그는 중국의 고대문명이 서방에서 수입된 기술로 촉발된 것이라는 가설 위에서 서방으로부터의 통로로 보이는 간수(甘肅) 회랑(回廊) 지역을 중시했다. 그 통로를 통해 수입 기술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황하 유역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중국문명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제 돌아보면 그 가설은 흔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샤나이(夏鼐, 1910~1985)가 1945년에 간수성 한 유적에서 앙소(仰韶)문화와 제가(齊家)문화의 선후관계에 대한 앤더슨의 관점을 뒤집은 일이 있다. 서래설(西來說)을 확신한 앤더슨은 서쪽의 제가문화가 동쪽의 앙소문화보다 더 일찍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앙소문화의 지층 위에 제가문화의 지층이 겹쳐진 유적을 샤나이가 확인한 것이다.


샤나이는 장강 하류 항저우(杭州) 일대에서 1936년 이래 발굴되어 온 일군의 신석기시대 유적에 ‘량저(良渚)문화’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종래 중시되어 온 황하 유역의 선사시대 문화와 대등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의 관점은 중국 외부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중국문명의 덩치를 키워 보이려는 애국심이나 자기 고향의 선진성을 우기려는(그는 저장(浙江)성 출신이다.) 애향심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량저문화의 진면목은 샤나이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더 크게 드러나 왔다. 2007년에는 성곽 유적이 발견되었고 2015년에는 성곽 밖에서 대규모 수리시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앤더슨의 중국문명 서래설에는 중국에 대한 서양인의 경멸감이 중국문명의 문명사적 가치까지도 낮춰보던 한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 측면이 있는데, 그 영향력이 오래간 것은 중국의 ‘굴기’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중국문명의 발원지를 황하 유역으로 국한해서 보던 그의 관점은 중국 고고학의 발전과 발굴 성과 축적에 따라 빛을 잃어 왔다. 
중국고대사를 직접 연구하지 않게 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무래도 초년에 집중했던 분야인지라 관련 학술정보에 비교적 관심이 많이 간다. 량저문화 연구 소식에 간간이 접하며,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까지 장강 하류 유역의 문화가 황하 유역과 대등한 수준이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량저 유적 전경

 


이런 인상 위에서 춘추시대 몇 개 남방 국가들의 흥기에 관한 <사기(史記)>의 기록으로부터 새로 떠오른 생각이 있다. 예를 들어 초(楚)나라. 오랑캐로 여겨지던 초나라가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원(中原)의 강대국으로 부각되었다. 그 출발이 기원전 704년 웅통(熊通)이 ‘무왕(武王)’의 칭호를 채택한 일이다. 원래 ‘왕(王)’이란 주나라 천자(天子)만의 호칭이었고 제후국 임금들은 천자의 책봉을 받아 ‘공(公)’, ‘후(侯)’, ‘백(伯)’ 등 칭호를 갖는 것이었다. 국력이 급성장한 초나라가 높은 등급 제후로 책봉해 줄 것을 바랐는데 천자가 응해주지 않자 책봉 없이 스스로 ‘왕’ 칭호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새로 흥미를 느낀 점은 초나라 왕실이 3황5제 중의 전욱(顓頊)을 조상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주나라 천자에게 책봉을 청하면서 자기네 족보가 이렇게 대단하니까 높은 등급을 달라고 우겼을 것 같다. 유전자 감식기술이 없던 시절인 만큼, 전설상의 위대한 인물 중에 확실한 자손이 따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 가짜 자손이 많았을 것이다.


족보 조작은 초나라만의 특허가 아니었다. 초나라보다 장강 하류에서 뒤늦게 일어난 오(吳)나라는 기원전 6세기 들어 두각을 나타내면서 역시 자의적으로 ‘왕’ 칭호를 취했다. 자기네 조상이 주나라를 개창한 문왕(文王)의 큰아버지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라고 했다. 조카인 문왕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에게 임금 자리가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남방의 황량한 땅으로 스스로 몸을 숨겼다는 고사를 남긴 인물들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주나라 천자의 위세가 얼마나 떨어졌으면 오랑캐에서 일어난 신흥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큰집’이라고 나서게 되었을까.

 

오나라 곁에서 뒤따라 일어나 오나라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쟁투를 벌인 월(越)나라도 족보 조작에서 밀리지 않았다. 월나라 왕실은 하(夏) 왕조 사(姒)씨의 방계 자손을 자임했다.

 

춘추시대에 장강 유역에서 일어나 중원을 뒤흔들기까지 한 초-오-월 세 나라 왕실에 모두 족보 조작의 짙은 혐의가 있는 것은 어쩐 일인가. 장강 유역에는 황하 유역과 맞먹는 수준과 규모의 문명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들어와 그곳에서 조직된 강력한 정치세력들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천하체제(天下體制)’에 끼어들면서 기존 천하체제의 상징적 인물들을 조상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북방과 맞먹는 문명 기반이 남방에 만들어져 있었다면 왜 북방의 천하체제에 남방 세력들이 편입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을까? 왜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추측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제철(製鐵)기술의 전파 방향에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춘추시대는 제철기술이 확장된 시대였다. 황하 유역에서 제철기술이 먼저 나타나 그에 따른 정치조직의 대형화가 천하체제의 성립을 가져왔고, 이 기술이 장강 유역까지 전파되면서 초-오-월 같은 세력들이 뒤따라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중원의 외곽세력이 중원문명의 상징적 인물을 조상으로 ‘입양(入養)’하던 풍조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 기자(箕子)조선의 성격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4세기에 조선의 존재가 중국에 뚜렷이 알려지게 되었을 때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설화가 생겨나고, 이것이 그 후의 사서 편찬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춘추시대에 양자강 유역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중국 무대에 등장하면서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의 후예를 자처한 일이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 중국과 교섭이 많아진 조선에서도 비슷한 식으로 기자의 후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이런 모칭(冒稱)은 중국문명에 귀순하는 뜻을 가진 것이므로 중국 측에서도 족보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 65-66쪽)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황하 유역과 장강 (하류) 유역에 대등한 수준과 규모의 농경문화가 형성되어 있다가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천하체제로 통합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여러 해째 해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충칭-산샤를 다녀오면서 그 시기에 장강 상류 유역, 스촨 분지는 어떤 상황을 겪고 있었을까, 궁금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바이두(百度) 백과>를 검색하던 중 “삼성퇴(三星堆)”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청두(成都)시 북쪽 약 40킬로미터 지점의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1200년경까지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어 ‘삼성퇴문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곡절이 순탄치 않았다. 1934년 최초의 발굴에서 꽤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학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1980년대 들어 몇 차례 대규모 발굴을 통해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삼성퇴 유적 전경


삼성퇴의 진면목을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은 사방 약 2킬로미터 크기의 성곽 유지였다. 기원전 1600년경 축조로 추정되는 이 성곽은 비슷한 시기의 상(商)나라 도성 정저우 상성(鄭州商城)과 비슷한 규모다. 뒤이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1986년에 발굴된 두 개의 제사갱(祭祀坑)이었다. 여기서 출토된 엄청난 분량의 유물은 종래의 통념을 벗어나는 양식을 보여주었고, 특히 청동기 유물 중에 놀라운 걸작품이 많았다. 이 청동기 유물의 가치가 시안(西安)의 병마용(兵馬踊)을 뛰어넘는다고 평가한 고미술 연구자도(대영박물관의 태스크 로전) 있었다. 이 발굴을 계기로 중국문명의 기원을 황하 유역 중심으로 보던 단선적 시각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삼성퇴 유적 출토 청동기

 


삼성퇴 성곽은 촉(蜀)나라의 도읍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촉나라에 관한 역사 기록은 아주 적다. <화양국지(華陽國志)> 등 자료에 약간의 설화가 실려 있고, <사기>에는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할 때 촉나라도 참여했다는 기사와 기원전 316년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이 장의(張儀) 등을 보내 촉나라를 병탄했다는 기사 정도가 보인다.

 

진나라의 촉나라 병탄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촉나라가 진나라의 도움을 얻으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혜왕은 그 기회에 촉나라를 잡아먹으려고 꾀를 썼다. 큰 석우(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촉왕에게 준다며, 꼬리 밑에 금 조각을 붙여놓고 금똥(屎金)이라고 했다. 대단한 보물로 여긴 촉왕이 장사들을 보내 석우를 끌어오게 해서 넓은 길이 생겼다. 그 길로 혜왕이 군대를 보내 촉나라를 공격했다는 것. 산시(陝西)성에서 스촨성으로 들어가는 ‘촉도(蜀道)’의 험준함을 이백(李白)이 “촉도난(蜀道難)”에서 “한 사람이 지켜도 만 사람이 열지 못한다(一夫當關 萬夫莫開)”고 그린 구절이 회자되는데, 어떤 천혜의 요새도 사람의 탐욕은 막을 수 없다는 교훈을 담은 설화다. 이 길에 ‘석우도(石牛道)’라는 별명이 남아있다. 


삼성퇴 유적을 중심으로 스촨 지역 고대사를 더듬어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중국 고대문명의 그림이 새로 그려진다. 이제까지의 그림은 황하 유역과 장강 (하류) 유역 사이의 대칭을 틀로 한 것이었는데, 장강 상류 유역에 또 하나 굵은 줄기가 나타난 것이다.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초기 단계의 농업문명 발전에 적합한 또 하나의 지역이었다. 기상학의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 깊은 내륙의 스촨 분지 강우량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지금도 비가 많이 오고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한반도 또한 초기 단계 농업문명의 발전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과 비슷한 성격의 농업문명을 발전시킨 것인데, 그러면서도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지킨 원리를 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중화제국의 내부 구조를 살피는 데도 이 원리를 생각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여러 갈래로 생각이 떠오르는데, 나중에 한 차례 차분히 정리해 볼 숙제로 남겨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