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하이텔 어느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이다가 화가 난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조직 활동이라고는 아무것도 못할 사람이요!” 악담으로 한 말씀이 내게는 덕담으로 들렸기 때문에 기억에 깊이 남은 말인데 이번 여행을 다녀오며 절실하게 떠올랐다. 나는 정말 조직 활동 싫다!


여러 사람과 긴 시간 함께 지내는 일이 29년 전 대학을 떠난 이후 좀체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바둑친구들과 밤새워 논 일 밖에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두어 차례 학회 참가와 중앙일보 몇 사람과 함께 한 한 차례 유럽 출장 정도?


40여 명 여행단에 끼어 11일간 돌아다닌 이번 여행 중 관광 대상인 명승고적보다 여행단 자체가 내게는 더 중요한 구경거리였다. 신영복 선생이 “서삼독(書三讀)”에서 문면만 읽을 것이 아니라 저자를 읽고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이치가 저절로 작동되었다. 문면에 해당되는 명승고적보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나 자신을 포함해서) 자세와 방식이 더 흥미로웠으니까. 여러 날에 걸친 조직 활동 자체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여행단 중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둘러싸고 몇 개의 보호막이 겹쳐져 있어서 좋은 시점(視點, vantage point)을 지키며 편안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제1보호막은 아내. 제2보호막은 이번 참가를 권해준 이용순 씨 부부. 그리고 제3보호막은 이용순 씨 부부와 가까운 신 선생 부부와 김 선생 부부. 6인이 하나의 소(小)그룹으로 여행을 몇 차례 해 왔는데 이번에 우리를 받아준 것이다. 중국의 관광 사업은 한국에 비해 세련되지 못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개인으로 참가하기보다 소그룹으로 참가해서 수시로 필요한 조치를 진행 측에 요구하는 ‘교섭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다.


이 교섭력의 첫 번째 효과로 보인 것이 침대차를 롼워(軟臥)로 바꾼 것이다. 원래 여행단의 표준은 3층 침대로 된 잉워(硬臥)인데 우리 일행 8인은 백여 원씩 더 내고 2층 침대의 롼워로 바꿨다. 문까지 달린(잉워 칸에는 문이 없다.) 두 칸을 우리끼리 쓸 수 있어서 쉬고 옷 갈아입는 데뿐 아니라 먹고 노는 데까지 훨씬 편안했다. 화장실과 세면대 사용에도 별 불편이 없었다. 


우리가 탄 열차는 지린(吉林) 발 충칭(重慶) 행이었다. 12:05분 창춘(長春)을 떠난 열차가 선양(瀋陽)을 지나며 해가 지고 밤중에 탕산(唐山)과 톈진(天津)을 지났다. 열차의 진동이 잠에 어울려, 큰 역에서 오래 머물면 눈이 떠졌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 잠속으로 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날이 밝고 보니 허베이(河北) 평원을 달리다가 스자좡(石家庄)을 지나고 있었다. 타이위안(太原)과 옌안(延安)을 지나 시안(西安)에 이르기까지 ‘황토(黃土)지대’의 풍경을 눈에 익힐 수 있었다. 시안에 이르기 전에 해가 넘어갔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스촨(四川)성의 다저우(達州)를 지나고 있었다. 시안 지역에서 스촨으로 넘어오는 길의 지형도 궁금했는데 밤중에 지나와 버렸다. 43시간 열차여행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황토지대였다.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궁금하던 풍경이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이런 장거리 열차여행은 흔치 않은 일 같다. 아내도 작년에 언니들과 유람하러 창춘에서 하이난다오의 산야(三亞)까지 51시간 달려보기 전까지 제일 멀리 가본 것이 한 차례 후난(湖南)성 출장이었다고 한다. 이용순 씨의 열차 경험은 군 복무 시절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군복을 입고 기차에 타면 민간인에게 자리를 꼭 양보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 고단할 때 군복을 벗어 감추고 자리에 앉은 일도 있다고 한다.


중국인의 열차 여행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 같다. 통계를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내가 처음 왔던 17년 전에 비해도 여객 수가 다섯 배는 늘어나지 않았을까? 그때 연변 밖으로 나가는 여객열차가 하루 다섯 편이 안 되었다. 침대표를 구하려면 연줄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속철[高鐵]만 하루에 20여 회 운행하고 일반열차도 더 늘어난 것 같다. 연길공항의 항공편도 국내선이나 국제선이나 17년 사이에 모두 다섯 배는 늘어난 것 같다.
우리 여행단의 연령은 60대가 주축이다. 버스 자리를 고령자부터 앞쪽에 배치한다 해서 멀미에 약한 아내가 모처럼 나그네 덕을 (연변에서는 남편을 ‘나그네’라 하고 아내를 ‘안깐’이라 한다. ‘안깐’은 그렇다 쳐도 ‘나그네’는 참 묘한 호칭이다.) 보나 했는데, 막상 충칭역에서 버스에 올라 보니 가운데쯤이었다. 대개 한창나이가 지난 후에 관광여행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소그룹의 6인도 해마다 한두 차례씩 장거리여행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 두어 해 전이라고 한다.


조선족과 한족이 반반쯤 되었다. 그런데 며칠 함께 다니며 행태를 살펴보니 민족의 차이보다 도시인-촌사람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한국에 비해 도시인과 촌사람의 차이를 크게 의식하는 것은 연변만이 아니라 중국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TV 드라마에도 많이 나타난다.) 근년까지 사회유동성이 낮아서 도시와 농촌의 교양 습득 여건에 차이가 컸던 것으로 이해된다. 촌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은 새로운 경험 앞에 혼란스러운 반응이 많고 구경에 악착스럽다. 


한국의 관광 사업에 비해 취향에 따른 장르 분화가 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기차여행을 제외한 5박6일의 일정 중 자연경관의 감상이 압도적 비중이다. 역사-문화 방면은 전체 비중도 작은 데다 그 중에도 정치적 의미를 가진 현대사 유적과 신기한 볼거리로서 소수민족 민속 소개가 많아서 먹물 관광객의 흥취를 특별히 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먹물이든 아니든 ‘중국’에 관심 가진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은 많이 있었다. 지목된 관광 대상만이 아니라 관광이 이뤄지는 환경 자체에 놀라운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충칭 이후 첫 코스였던 언스(恩施) 대협곡. 웅장하고 교묘한 풍광에 깜짝 놀랐다. 후난(湖南)성의 ‘장가계(張家界)’는 우리 발음으로 통할 만큼 잘 알려진 관광 명소인데, 일행 중 그곳에 가본 사람이 비슷한 풍광이라고 한다. 이곳 관광의 핵심은 절벽 위와 틈새를 잔도(棧道)로 이어 만든 스카이워크(sky-walk)다. 15리(7.5km) 길이인데 오르막내리막과 볼거리가 많아서 주파에 세 시간 걸린다.


기기묘묘한 풍광에 수시로 압도되며 걷는 가운데 십여 년 전 시작되었다는 이 관광지 개발의 규모와 방식에 생각이 미친다. 좋은 계절이고 주말이기도 해서 관광객이 많은 날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많은 사람이 큰 불편 없이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시설이 잘 되어 있다. 대중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빵과 서커스”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관광 사업이 서커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알아보지 않았지만 개발 주체가 민간 사업자 아닌 성(省) 정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기적 수익성을 노린 난개발의 경향이 전혀 보이지 않고 공공성을 최대한 추구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여행단의 주축인 60대 관광객들은 대개 연금을 경제적 기초로 가진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는 연금 조건이 좋다. 연금 적립을 1대 1로 직장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본인이 10원 적립하면 직장에서 10원 보태주는 식) 20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하면 퇴직 전의 본봉보다 더 많은 액수의 연금을 타게 된다. 그 수준의 연금만 있으면 생활수준 유지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연금에만 의지해서는 이런 여행에 나서기 힘들다. 기본 참가비가 한 달 연금 수준이고 그 절반가량의 부대비용이 필요하다. 부부가 함께 나선다면 석 달 생활비가 드는 셈이다. 1년에 한두 번씩 관광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른 밑천을 가진 것이다. 우리 소그룹 사람들을 보면, 중년에 한국 가서 몇 해 돈을 벌어 온 이들이 있고, 개혁개방 과정의 민영화에서 주식으로 돈을 번 이들이 있다. 그들이 40대와 50대를 지나는 동안 중국의 경제 상황이 내내 좋았기 때문에 그만한 밑천을 어떻게든 마련해 놓지 못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소비 행태 측면에서 아내가 가장 놀라는 현상은 “한족(漢族)이 돈을 쓴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이웃부터 직장생활의 동료들에 이르기까지 한족은 “돈이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는 사람들”로 일관되게 인식해 왔는데, 이제 조선족과 똑같이 돈 쓰며 다니는 사람들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중국 안팎에서 접해온 중국인들을 놓고 볼 때 한족에 대한 이런 인식은 연변지방의 특별한 조건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한국에서 ‘뙤놈’, ‘짱꼴라’를 돈 좋아하고 불결한 존재로 보던 인식과 통하는 것 같다. 한국 와서 살던 화교들은 공동체의 보호가 약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각자의 노력이 치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나 한국 와서 살아야 했던 화교들은 중국인 전체의 모집단과 꽤 다른 특성을 가진 집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연변의 한족도 한국의 화교처럼 뿌리가 약한 조건을 갖고 있다. 2-3대째 지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에 비해 공동체의 보호가 약하기 때문에 각개약진의 자세가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돈에 헤픈” 조선족과 “돈에 굳은” 한족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상당부분은) 그런 여건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연변에서 한족의 취약한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계절일꾼’이다. 연변의 건설 사업이 늘어나면서 봄에 와 막노동으로 돈을 벌다가 겨울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아무 데서나 자고 값싼 음식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그들을 한국에서 비슷한 식으로 지내본 조선족들은 착잡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게 다니다가 적응이 되어 연변에 자리 잡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연변의 조선족 인구 비율 하락에 한 몫을 한다고 한다.


이번 여행 중 들고 다니며 틈틈이 본 책 하나가 패트릭 드닌의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펴냄)였다. 몇 주일 전 프레시안에 실린 김창훈 씨의 글[링크]에 소개된 것을 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급하게 입수한 책이다. 관광산업에 나타나는 중국의 번영을 눈으로 보며 생각이 머무는 대목이 있다.

로크의 테제는 꾸준히 증대하는 부와 자산이 사회적 결속과 연대의 대체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이해한 대로 “급속한 경제 발전”을 받아들이는 사회는 불평등을 장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빠른 진보는 균일한 전선을 이루며 나아갈 수 없고 계층 방식으로 일어나야 한다.” 로크처럼 하이에크도 급속히 발전하며 현저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사회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미 빠른 데다 가속까지 하는 발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 성공을 누리는 즐거움은 전체적으로 아주 빠르게 진보하는 사회에서만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정적인[정체된?] 사회에서는 올라가는 사람들만큼이나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발전에 참여하려면 사회가 상당히 빠르게 발전해야 한다.” (196쪽)

중국의 경제 성장은 그 덩치로 놀라운 수준의 속도를 다년간 유지해 오고 있다. 그 효과가 인민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을 관찰해 왔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더욱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경제 성장으로 인한 불평등과 갈등을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원만하게 처리해 온 것으로 보인다. 함께 하는 여행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열린 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소강(小康)’에 접근하는 길이 분명하다. 그런데 앞으로는? 생각할 것이 참 많은 문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