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1월 2일 출발한 유엔조선위원단 본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월 6일 오후 도쿄에 도착했다. 원래는 도쿄에서 하룻밤 묵은 후 7일 오후 서울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도쿄에서 몇 개 나라 대표와 서기국 직원들의 합류에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려 하루 늦은 8일 오후 늦게 서울에 들어왔다.

 

과도정부는 우익의 요구에 호응해 12월 중순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전국환영위원회를 조직해 놓고 환영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환영위원회 명예의장은 이승만, 김구, 이시영, 의장은 오세창, 위원장은 조병옥이었다. 환영위원회는 1월 5일 환영 동원계획을 발표했다.

 

3월 말일까지 조선독립정부를 구성할 대의원들의 총선거를 감시하고 계속하여 정부 수립을 원조할 국제연합조선위원단 9개국 대표 등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프랑스 캐나다 호주 필리핀 엘살바도르 시리아 등 6개국 대표와 사무총장 등 30여 명은 조선 3천만 동포들이 충심으로 환영하는 가운데 7일 저녁 김포비행장에 도착 입경할 예정으로 전국 환영위원회에서는 5일 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환영 동원계획을 발표하였다.

 

1. 1월 7일 하오 6시 20분전까지는 참가단체는 지정장소에 집합할 것.

 

2. 1대 백 명을 2열로 편성 지휘자는 1명으로 할 것.

 

3. 각 단체 지휘자는 동원 제1호차가 통과되면 환영태세를 취하고, 제2호·제3호차가 통과할 때까지 만세환호를 계속할 것.

 

4. 환영문은 다음과 같이 할 것.

(1) “세계평화는 조선독립으로부터”

(2) “유엔조선위원단 환영 자주독립 만세”

(3) “국제연합 만세”

(4) “환영 국제정의의 선양, 국제헌장의 수호자”

 

5. 각 단체 배치장소는 다음과 같음.

(1) 여학생: 위원단 숙소로부터 조선은행 앞 파출소까지.

(2) 각 동회 및 시민: 도동 입구까지.

(3) 각 관공서: 갈월동 입구까지.

(4) 각 은행 회사 기타 직업단체: 용산중학 입구까지.

(5)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삼각지까지.

(6) 운수부 및 용산구민: 경전출장소 앞까지.

(7) 남학생: 용산우편국까지.

(8) 청년단체: 한강교까지.

(9) 영등포 및 김포 주민: 한강 이남 김포까지. (<동아일보> 1948년 1월 6일)

 

거국적으로 동원된 인파가 8일 저녁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가에서 위원단을 환영했다. 조병옥은 환영 인파가 50만에 달했다고 주장했는데(<서울신문> 1948년 1월 10일) <동아일보> 1월 10일자 “북조선 입경 연구중 - 위원단 제씨의 소신 피력” 기사에서 “경찰당국 추산에 의하면 (...) 도로 연변에 무려 25만에 달하였다 한다.”고 한 것이 맞을 것이다. 25만 명만 해도 대단한 숫자다. 당시 서울 인구가 백만을 조금 넘을 정도였으니까.

 

유엔위원단에 대한 조선인과 조선 언론의 기대는 엄청나게 컸다. 안 그럴 수 있겠는가. 1945년 8월 이래 30개월째 조선의 명운을 좌우하는 외세로 조선에 주둔해온 미군과 소련군을 대신하러 유엔이 보낸 ‘칙사’였다. 1월 8일자 <조선일보>에는 도착 예정인 일행 30여 명(통역과 비서까지 포함해서)의 이름과 국적을 보도하기까지 했다. 호주 대표 S. H. 잭슨(주 동경 호주위원단 고문관), 중국 대표 유어만(劉馭萬, 주 서울 중국총영사관 공사급), 프랑스 대표 쟝 루이 폴봉쿠르(전 루마니아 주재 불란서공사), 필리핀 대표 메레치오 아란즈(전 필리핀상원의원 임시의장), 시리아 대표 재크 자비(의사, 정당지도자)의 이름이 있었다. 인도 대표는 미정(未定)이라고 했다.

 

실제로 도착한 일행 중에는 인도 대표 메논이 있었고, 1월 12일의 첫 모임에서 메논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중국 대표 유어만은 12월 중에 서울에 들어와 있었고, 필리핀 대표 아란즈와 프랑스 대표 폴봉쿠르는 1월 12일에 도착했다. 캐나다 대표 조지 패터슨도 1월 12일에 도착했다. 1월 12일 오후 4시반경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첫 회의에는 호주, 캐나다, 중국, 시리아, 필리핀, 인도, 프랑스 7개국 대표가 참석했다. 엘살바도르 대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는 이 위원회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1월 8일 김포비행장에는 누구누구가 나갔는가.

 

이날 조선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세계 43개국의 찬성과 위임을 받아 3일 뉴욕을 출발하여 내조 도상에 있던 국련조선위원단 중 호주·프랑스·시리아 및 인도대표 메논과 사무총장 호세택(胡世澤)을 비롯하여 수원(隨員) 30명은 오후 5시55분 미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을 비롯하여 딘 군정장관 랭든 미 국무성 대표 및 브라운 소장 등 다수 군 수뇌부와 재경 중의 유어만 중국대표, 과정 측으로서 안 민정장관과 김규식 입의 의장 김용무 대법원장, 환영위원회 측으로서 이승만을 비롯하여 이청천 장군과 조병옥 정일형 등 조미인 군관 다수 출영리에 공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는데 비행장에 내린 일행은 유어만의 소개로 호세택을 위시한 각국대표는 하지 중장과 굳은 악수를 교환하였고 다음으로 하지 중장의 소개로 출영한 조미 인사들과 각국대표 간의 우호에 넘치는 악수를 한 후 고황경 모윤숙 씨 등이 증정하는 꽃다발을 가슴에 움켜 안고 도열한 수십만 시민의 환성을 받으며 동 7시경에 회현동 국제호텔과 수도호텔에 각각 투숙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9일)

 

음~ 모윤숙 씨가 꽃다발 증정하러 나갔었구나. 낙랑클럽 동지들의 활약상을 살필 기회도 불원간 있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기사 중에는 대표를 보낸 나라들에 관한 소개를 실은 것도 있었다. 최근 독립을 성취한(또는 독립을 바라보고 있는) 나라들이 많아서 조선인에게 이해심이 많고 우호적일 것을 기대한다는 취지를 많이 보였다.

 

위원단은 최초 9개국 대표로 성립되었으나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이 대표 파견을 거부하였으므로 다음의 8개국으로 되어 있다. 즉 중국 호주 캐나다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인 것이다.

 

이 위원단의 성격은 그 대표구성을 검토함으로 규지할 수 있다. 이 위원단의 구성은 자유롭고 독립한 조선국가의 건설을 목적한 모스크바협정의 파기를 의미하므로 이 위원단 속에는 모스크바협정에 서명한 어느 국가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다만 중국이 가입되어 있으나 중국은 모스크바협정에 추후로 참가했으며 조선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지대하므로 특히 일원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위원단은 대체로 조선에 대하여 큰 동정을 가진 소국들로 구성되었다. 이중에 중국과 불란서가 대국으로 생각되어 있으나 광범한 국제적 기관인 만치 그 위원 구성에 있어서 지리적 배분을 중요시한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 8개국 중의 대다수가 극동이나 또는 아세아문제에 관련을 가진 자들인 것은 확실하다. 프랑스와 우크라이나가 구라파 국가이며 캐나다와 엘살바도르가 서반구 국가이지만 나머지 5개국은 아세아나 또는 극동에 직접 위치하여 있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이 같은 지리적 분배는 이 조선 문제가 세계적 문제이기는 하나 동시에 그 문제의 취급은 극동의 현 정세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이곳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8개국 대표가 각각 자국의 쓰라린 경험에 비추어 독립국 조선을 건설하는 데 큰 기여와 원조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도는 지금도 오히려 독립된 단일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며 필리핀은 1946년 7월 4일에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시리아는 1944년 1월1일에 독립이 되었으며 호주와 캐나다는 이전에는 영국 영토이었으나 제1차 대전 후에 독립을 획득하였다.

 

프랑스는 인도지나에 있는 식민지 해방에 진보적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과거에 있어서 시리아 알제리 등 식민지를 독립국가로 해방하여 주었다.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의 자치령이다. 본래 두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이었으나 제1차 대전 후에 자치령의 지위를 획득하여 내정과 외교에 있어서 완전히 독립되었다. 호주는 7백만의 인구를 갖고 그 지리적 위치는 극동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있다. 제2차 대전시에 호주는 일본에 의하여 중대한 상처를 받았으며 그 본토는 상륙작전의 위협까지 받았었다. 현재 호주가 취하고 있는 대외정책은 극동에 있어서의 정치적 불안이나 또는 군사적 침략은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시킬런지 모른다는 것을 그 기본 관점으로 하고 있다.

 

캐나다는 2천만 가량의 인구를 옹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캐나다는 극동문제에 강렬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 나라의 서부 제항이 극동지역과 활발히 통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와 같이 캐나다도 중요한 생산국가로 이 양국의 식량생산은 현재 세계적인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캐나다는 농산물뿐이 아니라 점차로 공업국가화의 도정에 있어서 그 나라의 수출품의 태반이 완성된 제작품으로 되어 있다.

 

중국은 4억5천만의 인구를 옹하고 조선독립에 관해서 큰 열성을 갖고 있는 것은 이제 와서 췌언할 필요가 없다. 조선과 중국 간의 문화적 언어적 인권적 철학적 제 관계는 역사적인 깊은 뿌리를 박고 있어 각자의 문제에 대하여 쌍방이 다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중국은 이제 일본 때문에 폐허화한 지역의 부흥에 전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내란에 불구하고 정치적 통일에 노력하고 있다.

 

엘살바도르공화국은 중앙아메리카의 서해안에 위치하여 최근 10년간에 훌륭한 독립정부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공화국은 5대강국의 하나로 생각되어 있으며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도 한 의자를 갖고 있다. 인구는 3천8백만으로 구라파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중심이 되어 있다. 프랑스가 식민지 해방을 적극적으로 실행하여 온 것은 상술한 바와 같다.

 

필리핀은 제2차 대전 전에 독립이 확약되었었다. 그러나 대전 중에 본토의 대부분이 침략되어 1944년에 맥아더 장군 지휘하의 미군에 의하여 해방되기까지 일본 점령 하에 있었다. 이제 완전히 독립되어 국력 충실에 발분 중이므로 불원에 극동의 일대국가가 될 것이다. 인구는 천육백만이다.

 

시리아는 인구 166만으로 제1차 대전 후 오토만제국이 붕괴하자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되었다가 이번 제2차 대전 후에 독립국이 된 것이다. 아랍 블록의 중요한 멤버이다.

 

국제연합의 결정에 의하면 이 위원단의 기능은 조선인의 선거된 대표자가 자유롭고 독립한 조선국가의 해결에 참가하는 것을 촉진시키고 그 편의를 보아주는 것으로 그 위원단은 다음의 세 가지 기초 위에서 구성된 것이다.

 

1. 조선인민의 독립에 대한 긴급하고 정당한 요구를 인정한 것.

 

2. 조선의 국가적 독립이 재건되고 점령군이 최단기간 내에 철병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것.

 

3. 자유롭고 독립한 조선 국가는 조선인 대표의 참가 없이 정당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결정을 갖게 된 것. (...) (<서울신문> 1948년 1월 9일)

 

유엔 출범 당시 아시아의 회원국은 9개국이었는데 그중 4개국이 조선위원회에 참여했으니 조선위원회가 아시아국가에 중점을 두고 구성된 것은 사실이다. (나머지 5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란, 이락, 미얀마.) 오스트레일리아의 참여도 지역성에 입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개국의 당시 사정이 어떠했는지, 위 기사를 보완해서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중국: 국제사회에서는 국민당정부가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지만(소련 등 공산권에 대해서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입장이 계속 강화되고 있는 중이었다. 1949년 여름까지는 국민당정부가 타이완으로 피해 가기에 이른다.

 

인도: 1820년대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초기에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1880년대 이래 꾸준히 독립운동의 전통을 키운 인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립을 쟁취했다. 인도의 생산력과 병력이 연합국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1947년 8월 파키스탄과 분리되어 독립한 인도는 신생독립국 중 가장 큰 인적-물적 자원을 가진 나라였다.

 

필리핀: 스페인 식민지배 하에 국가의 틀을 만들고 19세기 말 미국에 넘겨졌던 필리핀은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와 다른 형태의 종속관계를 미국이 실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점령 초기 10여 년간 백만 명 이상의 인명을 빼앗으며 독립운동을 진압했던 미국이 1935년 필리핀에 자치령(commonwealth)의 위상을 부여하고 10년 후 완전 독립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일본의 침공 때문에 조금 늦어져, 1946년 4월의 총선거를 통해 1946년 7월 4일 정식으로 독립했다. 미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나라가 미국 독립기념일을 자기네 독립기념일로 삼은 데 어떤 뜻이 있는 것인지 흥미롭다. 조선의 신탁통치와 독립에 대한 미국인의 관념은 필리핀을 모델로 한 것이 보통이었다.

 

시리아: 수백 년 동안 오스만터키 통치 아래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터키제국이 해체될 때 시리아왕국으로 독립을 시도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에게 점령당해 남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신탁통치령(mandate)이 되고 북쪽의 시리아-레바논 지역은 프랑스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1920년) 1925년부터 대대적 독립운동을 벌인 결과 1936년 프랑스와 독립을 위한 조약을 맺었으나 프랑스 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해 수포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비시 정부의 통치가 1941년 영국군과 자유프랑스군의 진주로 끝났을 때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944년 1월에야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고도 프랑스군의 점령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가 1946년 4월 프랑스군의 철수로 완전한 독립을 성취했다. 독립 후에도 20여 년간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의 명절 중 우리의 개천절에 가까운 것이 ‘오스트레일리아 데이(1월 26일)’ 아닐까. 1788년 1월 26일 열한 척의 배에 실려 온 1천여 명의 정착민이(그중 4분의 3이 죄수) 시드니 부근에 자리 잡은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이래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모범적 식민지로 자라나 1901년에 자치령이 되었다. 원주민은 거의 존재를 감추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완전한 백인국가가 되었다. ‘백호(白濠)주의’를 공식화한 것도 자치령이 될 때의 일이었다.

 

캐나다: 역시 영국의 모범적 식민지로부터 자라난 자치령 형태의 백인국가.

 

엘살바도르: 스페인 식민지로 있다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같이 나폴레옹전쟁의 여파 속에 독립운동을 시작해(1811년) 1821년 중앙아메리카연합의 일부가 되었다가 1838년 연합의 해체와 함께 독립했다. 1931년 이래 군사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다. (군사독재는 1979년까지 계속되다가 1980~1992년에는 내전을 겪는다.)

 

프랑스: 위 기사에서는 “식민지 해방을 적극적으로 실행”해 왔다고 했는데, ‘팩트’에 문제가 있는 소개다. 프랑스가 기존 열강 중 식민지체제에 가장 강한 집착을 가진 나라였다는 사실을 당시 진행 중이던 베트남 독립전쟁이 보여주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