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동안 시민 생활을 옥죄어 온 미곡 반입 금지 조치가 1월 1일부로 풀렸다. 이 해금 조치를 경찰계통 명령에서 제일 먼저 확인한다는 사실이 찜찜하다.

 

“미곡 자유반입에 경찰은 간섭 말라.”

 

미곡의 자유반입에 대하여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총감은 1일부로 다음과 같은 명령을 관하 각 관구에 통첩하였다.

“수도관구경찰청 제1·제2관구경찰관에게 고함. 1월1일을 위시하여 미곡 자유반입을 허가한다. 수량의 다과(多寡)를 막론하고 전기 관구 내에서는 미곡 자유반입을 할 수 있으니 경찰관은 간섭치 말 것을 명령한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4일)

 

쌀값 통제를 위해 대량 이동을 규제하되 자가 소비를 위한 소량 반입은 허용하던 것을 전면 금지한 것이 지난 10월 중순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소량 반입만이 아니라 “다과를 막론하고” 자유반입을 허용한다니, 널뛰기가 심하다. 11월 말까지 철도경찰의 쌀 압수 기사를 보면 규제의 피해자는 소량 반입을 시도하던 사람들이었다. 6,422명으로부터 약 5천 가마를 압수했다니, 그 대부분이 1인당 한 가마 또는 한두 말의 쌀을 휴대한 경우였을 것이다.

 

“철경서 압수한 쌀 1만6천 두(斗)”

 

철도경찰청에서는 소량의 미곡반입이 금지된 이후 각 역 구내는 물론이요 철도 관내에 있어 미곡 반입 취체를 엄중히 실시하고 있는데 지난 10월 16일부터 11월 말일까지 철경이 압수한 미곡 수량은 33만9383킬로에 달하며 압수당한 인원은 6422명이라 한다. 그런데 철도경찰에서는 앞으로 미곡수집이 끝나고 소량의 반입을 허가할 때까지 미곡 반입을 계속하여 취체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4일)

 

새해 벽두부터 경찰의 모습이 너무 두드러진다. 1월 3일에 조병옥 경무부장은 절전 비협력에 대한 가차 없는 처단 방침을 밝혔고, 장택상의 수도경찰청은 관람료를 105원 받는 것이 불법이니 100원만 받으라는 경고를 시공관에 보냈다. 내용은 고마운 것이라도, 이런 일들에 경찰이 앞장서서 나서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비상사태 인식코 절전(節電)에 협력하라”

 

조 경무부장은 3일 중앙청출입기자단과 회견한 자리에서 자의적으로 전력의 비상사태를 인식하고 절전에 협력하여 중요국가사업과 생산부면에 지장이 없도록 일반 가정에서는 아침에는 5시부터 8시까지, 저녁에는 5시부터 10시까지에만 전광용으로 사용하고 그 외 시간에는 소등하여야 할 것이어니와 만일 이에 기만하는 자는 법에 비추어 가차 없이 처단하도록 할 터이라는 경찰의 입장과 각오를 다시 천명한 바 있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4일)

 

“입관료는 불법 - 수도청서 경고”

 

시공관에서 1백5원이라는 관람료를 받고 있음에 대하여 수도경찰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로 3일 엄중한 경고를 시공관에 보내었다.

 

“심포니와 오케스트라 연극에 1백원의 요금을 받게 하였는데 그 위에 입관료라 하여 더 받는다는 것은 불법이다. 입관료 5원은 주최자 측에서 당연히 최고요금을 받는 만큼 지불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4일)

 

시민의 일상에 관계된 이런 자상한 역할보다 경찰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일도 연초부터 마구 터져 나왔다. 가장 어마어마한 것이 1월 3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인민해방군’ 사건 진상 발표였다. <동아일보>는 1월 4일자와 6일자에 “남한 공산화를 기도 - 전율할 인민해방군 사건”이란 제목으로 이 발표를 보도했는데, 너무 길어서 모두 옮겨놓지는 않고 4일자 기사의 도입부만 소개한다.

 

남조선의 현 제도를 정복하고 공산주의화를 계획하기 위하여 민족진영을 파괴하고자 북조선노동당 김일성·김두봉·허가이 등과의 긴밀한 연락과 지령으로, 남로당의 강진·문갑송·한인식 등을 수반으로 작년 2월부터 비밀리에 활동을 개시하고 있던 소위 인민해방군사건은 그동안 7관구경찰청에서 관계자 4백여 명을 체포 문초 중이던 바, 사건 전모가 확실하게 드러났으므로 지난달 29일 관계자 157명을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송청하는 동시, 3일 조 경무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건 내용이 발표된 바 있었다.

 

발표 내용을 보면 공산당 대회파 출신을 중심으로 무장봉기의 목적을 세우고 1947년 3월 경상남도군사위원회를 조직, 경남 지역 몇 개 군에 군별로 연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조직 총동원 수 830명을 확보하고 교양훈련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군자금 마련을 위해 부호를 습격하고 경찰관 살해에 나섰다는 등 진부한 내용이 가득하다. 특히 눈에 띄는 내용은 관계된 국방경비대원 45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는 것이다.

 

군대를 지향하면서도 경찰에 억눌려 있던 국방경비대의 위상을 1947년 10월 17일자 일기에서 설명한 일이 있는데, 경찰에 비해 구성이 복잡하고 통제가 느슨하던 경비대에는 많은 좌익 청년들이 탄압을 위해 몸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건국 직후 여순사건 같은 사태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인민해방군’ 사건이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었는지 확실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 후 처리를 보면 2월 9일에 21명이 검찰로 송치되었고(<동아일보> 1948년 2월 10일) 그중 11명이 2월 19일에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동아일보> 1948년 2월 21일) 이들 11명에 대한 공판이 4월 27일에 시작되었는데(<동아일보> 1948년 4월 28일) 어찌된 일인지 8월 13일 구형공판에서는 피고가 43명이었고(<동아일보> 1948년 8월 19일) 8월 23일 언도공판 기사에는 32명의 피고가 나타나 있다.(<동아일보> 1948년 8월 28일) 기사 끝의 “홍순남(여) 무죄”가 “홍순남 외 11명 무죄”의 착오가 아니었을지. 최고형은 징역 8년이었다.

 

‘태산명동서일필’의 느낌이 드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남조선의 비상상황을 강조하고 경찰의 역할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조선에 온 유엔위원회에서 경찰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때 한민당은 이런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제연합조선위원단 모국(某國) 위원이 조선의 국립경찰 기구와 그 구성 요소에 대한 개혁을 운운한 것은 우리의 실정과 국립경찰의 과거 3년간의 위대한 업적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말이다. 일제가 물러간 직후 무정부상태에 있어서도 단시일에 남조선의 치안과 질서를 확보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학병동맹사건을 비롯하여 공산당 위조지폐사건, 영남 폭동사건, 8-15 인민혁명사건, 소위 인민해방군사건 등 중대 사건을 사전에 또는 사후에 신속 적절하게 검거 제압하였음은 국립경찰의 신위(信威)를 높이기에 족한 바였다. 국립경찰 창립 이래 백 명의 희생자를 내어 가면서 국내치안 확보에 진력한 국립경찰의 명예와 업적을 찬양치 않고 도리어 고의로 왜곡 또는 중상하는 일부 진영에게 맹성을 촉하는 동시에 국련위원 제공(諸公)으로서 여사한 중상과 모략으로 인하여 정확한 판단을 잃지 않도록 요망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8일)

 

1948년 벽두 경찰의 모습이 두드러져 보이는 또 하나의 장면은 백형권 운수경찰청장의 독직사건 발표였다. 최고위 간부의 비리 수사는 경찰이 성역 없는 개혁에 나섰다는 인상을 준다. 기사 속의 “성동경찰서장 사건”이란 며칠 전 성동서장 유철이 뇌물 20만 원을 받고 사기사건 피의자를 무단 방면했다는 혐의로 불구속기소 된 일을 말하는 것이다.

 

“독직 혐의로 백 운경청장(運警廳長) 문초 중”

 

“강기숙청은 먼저 자기 부내에서부터”라는 구호 밑에서 성동경찰서장 사건을 송국한 경무부 수사국에서는 또다시 지난 2일 운수경찰청장 백형권, 동 경리과장 이종환 양씨를 모종 사건에 관련한 독직사건 혐의로 문초 중에 있는데, 청장의 독직사건은 이번이 처음인 만큼 그 귀추는 자못 주목된다. 그리고 양씨는 2일부터 정직처분이 되었으며 경찰청장 사무는 당분간 김 교육청장이 겸임하기로 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4일)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대단히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백형권 체포 직후 수백만 원의 모리 혐의가 보도되었으나(<동아일보> 1948년 1월 7일) 1월 19일의 기소 내용은 철도경찰청 배급물자 약 60만 원 어치의 부정이득이었고,(<동아일보> 1948년 1월 21일) 3월 16일에는 45만원의 배임횡령 죄목으로 1년 구형을 받았다.(<동아일보> 1948년 3월 18일) 그리고 3월 23일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았는데, 언도 직후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동아일보> 1948년 3월 25일)

 

법정탈주를 감행하고 도피한 백형권이 사람을 시켜 상고장을 제출했는데, 서류를 가져온 사람도 서류를 제출한 뒤 사라져버렸다. 꼭 만화를 보는 것 같다.

 

“도망한 백형권 사람 시켜 상고(上告)”

 

징역 10개월의 언도를 받고 행방을 감추어 화제거리가 되어있는 전 철도경찰청장 백형권은 돌연 26일 오전 9시경 1심 판결의 불복상고신입서를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시켜서 서울지방심리원 형사과에 제출하고 접수인이 미처 펴볼 사이도 없이 그 대리인마저 어디로인지 행방을 감추어 관계관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상고신입서는 접수하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하는데 상고 기일은 오는 28일까지로 되어 있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7일)

 

그 후 백형권이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것은 그와 연루되었던 이종환이 아무 혐의 없음이 밝혀져 복직되었다는 기사와(<동아일보> 1948년 5월 1일) 백형권 본인이 2심 공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판결을 받았다는 기사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상고장이 어떻게든 접수되었던 모양이다. 백형권은 극히 사소한 이유로 탄압을 받았고, 그것이 억울해서 법정탈주까지 감행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 그는 탄압을 받게 되었을까?

 

운수경찰청은 원래 식민지시대의 철도경찰을 이어받아 조병옥의 경무부와 별도로 운수부 산하에 설치되어 있었다. 1946년 8월 남조선 경찰의 고문 관행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조병옥은 보도된 사례가 자기 경찰이 아니라 철도경찰의 일이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물론 자기 경찰에도 고문의 사례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미국 신문기자가 보도한 바와 같이 경찰관이 범인에게 물을 먹여 고문하였다는 사건은 국립경찰관을 포함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부산역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이 사건에 관련된 경관은 조선철도에 소속된 특별경찰기관인 철도경찰의 경관이었으며 이 경찰은 체포되었으므로 그 불법행위에 대하여 조선 법정에 기소될 것이다. (...) 국립경찰과 같은 큰 기관에 있어서는 물론 잔인한 고문이 있을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상례는 아니다. 범인의 고문에 관한 보고는 전부 신중히 조사 중이므로 만일 조사한 결과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고문을 범행한 자에게는 엄중한 징벌이 있을 것이라고 조 박사는 말하였다.” (<경향신문> 1946년 8월 4일)

 

‘철도경찰’이란 이름으로 흔히 불린 운수경찰이 무서운 경찰이 아니라 친절한 경찰을 지향한 노력도 보인다.

 

“총 떼어놓는 운경(運警) - 메가폰 들고 지도(指導)”

 

민주경찰로서 먼저 일반 승객들에게 친절한 인상을 주기 위하여 운수부 경찰청에서는 우선 이동승무 운수경찰원과 서울 용산 양 운수경찰서원의 총기 휴대를 철폐하였다 한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총 대신 메가폰을 들고 친절하게 철도 관내 질서 유지에 정신하기로 되었으며 그 결과 얼마나 친절한 경관 노릇을 하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사복 감독 경위를 각 방면에 파견한 후 지도 감시를 하기로 되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2월 18일)

 

그런데 운수경찰은 1947년 3월 초 운수부에서 경무부로 옮겨져 조병옥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 때 조병옥은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작년 1월 철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운수부장의 명령계통 아래 운수경찰서가 생겼던 바 그 당시는 아직 국립경찰의 조직진용이 완성되지 못하고 사회는 혼돈무질서한 현상이었으므로 이러한 과도적 특수경찰을 조직하였던 것이나 그 후 국내 치안이 회복될 뿐 아니라 국립경찰의 기구진용도 완성되었으므로 이번에 운수경찰을 폐지하고 동 경찰 직원 전원을 국립경찰에 편입하여 경무부장의 명령계통 아래 한 관구로서 새로 운수관구 경찰청을 설치하고 철도 재산에 대한 보호 기타 경찰상 취체권을 국립경찰에서 집행하게 되었다.” (<경향신문> 1947년 3월 5일)

 

운수경찰의 관할을 바꾼 까닭은 몇 주일 후의 아래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메가폰 대신 총을 도로 쥐어야 할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경찰 간섭으로 철도파업 실패”

 

21일 오전6시를 기하여 24시간 파업에 돌입 계획이던 운수부 철도국의 파업은 사전의 운수경찰의 간섭으로 인하여 부분적인 계획 수행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다 한다. 현재 서울역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차는 종전대로 운행되고 있으나 파업 계획의 일부 실시로 부산 목포 토성행 등 열차는 2시간 내지 4시간 연발하였다. 한편 용산운수경찰서에서는 출근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10여 명을 검거하였다. 또한 남조선 각 철도사무소 관내의 사태에 대하여는 21일 밤 부산을 떠난 차가 아직 소식이 없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3월 23일)

 

그런데 1947년 10월 말 ‘운수경찰평의회’란 기구가 설치되었다.

 

“운수경찰평의회”

 

운수관구경찰청에서는 현하 미묘한 정세에 비추어 운수행정 및 지방장관과의 긴밀한 연락 아래 앞으로 많은 협력을 얻고자 운수경찰평의회를 지난 28일 조직하였다는데 이로 말미암아 철도경찰은 더욱 책임 완수를 강력히 추진시키게 되었으며 평의회 위원은 다음과 같다.

 

의장: 운수부장

위원: 운수부 미국인 고문, 서울지방검찰청장, 국방경비대 대장, 운수경찰청장. (<경향신문> 1947년 10월 31일)

 

운수부장이 의장이고 운수경찰청장 외에는 경찰 간부가 들어 있지 않은 평의회다. 일반 경찰과 달라야 하는 운수경찰의 특성을 운수경찰이 주장하고 이것을 운수부장이 뒷받침해 줘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찰관이 사회의 요구를 돌아볼 필요 없이 임명권자에게만 충성을 바치며 일사불란한 지휘체계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던 조병옥이 이 평의회 설치에 분노하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평의회가 만들어진 두 달 후 백형권이 독직사건에 걸려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