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한성신문> 1월 1일자의 신년사 “독립전취(獨立戰取)의 금 1년”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질문을 위해 문단마다 번호를 매겨놓습니다.

 

(1) 근역(槿域) 3천리에 서색(瑞色) 새로워 무자(戊子) 새해의 아침 고요히 밝으니 3천만의 비통한 부르짖음 한 곳에 묶어 성스러운 정도(征途)에 나아갈 찬란한 새벽일새 분명하다. 악몽과도 같은 지난 한 해는 이미 낡은 과거가 되었거니, 5천년의 민족 혈조(血潮)에 맥맥한 토지 다시 한 번 가다듬고 혹독한 시련에 둔해진 도검 빛나게 갈아들고 새외변성(塞外邊城)에 민족의 정기를 크게 떨치리라.

(2) 동포여! 일어나라! 민족의 참된 ‘삶’을 위해 너는 즐겨 네 자신을 바치라. 읽어버린 자유를 광복키 위해서 나는 용감한 전사이어야 한다. 굳게 네 자신을 움직이라. 남의 번롱(翻弄)을 면할 수 있으리라.

(3) 합(合)하라! 합하는 곳에 ‘힘’이 있느니라. 곧 너희끼리의 싸움을 정지하라. 엿보는 자 틈을 타고자 하나니! 준비는 되었느냐? 4281년은 합일의 해, 자주의 해, 독립의 해이다.

(4) 지난 한 해는 우리 민족에 가장 가혹한 시련의 1년이었고, 우리 역사에 가장 비참한 수난의 한 해였다. 국제적으로는 미소의 이해상극이 갈수록 첨예화하여 마침내 공위의 최종적 파열을 초래하였고, 국내적으로는 사대의타적(事大依他的) 악폐를 기연(棄捐)치 못한 채 좌우알력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종하고 말았다.

(5) 지금 세계 도처에서 견아대치(犬牙對峙)한 국제세력은 우리의 강토에서 봉첨(鋒尖)을 맞닥뜨린 채 공약된 ‘조선독립’은 오로지 외교적인 설전응수에 비하(飛下)하는 듯하며, 우리 민족은 인도, 팔레스타인, 독일, 희랍 등의 분할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웅크려 몸서리치면서, 철폐되기는커녕 굳어만 가고 있는 원한의 38선을 목메어 울어왔다.

(6) 정치적 실망과 경제적 혼란은 병약한 우리 민족사기를 여지없이 협박 유린하였으니, 대중은 나아갈 바 지향을 잃고 심각한 생활의 도탄에 숨차 허덕이며, 사정없이 밀려오는 험난한 국제조류에 불안과 동요를 거듭하면서 기복과 부침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7) 동포여! 이 얼마나 비통한 현실이었더냐? ‘애국애족’의 신성한 구호가 한갓 붕당적 각축에 한 개의 편의적 구실을 제공하였을 뿐 갖은 악풍과 모든 폐습이 상하를 통하여 민족도의를 잠식하고 무슨 열성병(熱性病)과도 같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였다. 거대한 실망에 따르는 퇴폐와 윤락, 이것이 지난해의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실정이었다.

(8) 그러나 역사 차륜은 결단코 역전하지 않는 것이며, 정의는 반드시 보장된 정당한 권리를 옹호할 것이다. 반만년 역사에 엉키고 뭉친 민족의 ‘피’ 또한 최후의 일선에서 반드시 통합 단결의 광휘 있는 전통에 빛날 것이다. 암흑에서 광명을, 사멸에서 신생을, 파괴에서 건설을 힘 있게 부르짖으며 용감히 돌진해야 한다.

(9) 물론 피안(彼岸)에의 길은 평탄치 않을지도 모른다. 유엔위원단의 내조(來朝)를 계기해서 통일독립의 길이 의외에 신속히 오게 될 것이냐? 일이 뜻과 같지 못하여, 소위 남조선의 단독조치가 미군정에 의해서 실시될 것이냐? 또 그 후에 오는 문제는? 비록 그 귀추에 대해서 속단을 피한다 하나 금년이야말로 양단간의 한 전기(轉機)를 지어 민족역사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룰 것만은 파악키 불난(不難)한 듯싶다.

(10) 그러나 피안은 가까이 있다. 철쇄(鐵鎖) 이미 끊어졌으니 여하한 형태의 새로운 예속도 다시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다. 독립의 관건이 비록 미소 양국의 협의에 그 많은 부분을 의존한다 하더라도 계급을 초월한 전 민족적 총단결이 보다 먼저 전제되고 요청된다. 우리는 멀지 않은 피안을 향해 3천만 각자가 빠짐없이 전진하여 첨병됨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먼저 난마 같은 국내정국을 정돈하고 수습해야 하겠다. 우리의 용기가 목전의 생활 위협에 비겁하게 굴복함은 용서될 수 없다.

(11) 우리는 인내해야 하고, 자애해야 하고, 민족의 위대한 정열이 무용한 내부적인 투쟁 대신에 객관적 외래적인 모든 압력에 대항해서 방사(放射)되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3천만이 한 뜻 한 마음 한데 묶어 나아가자! 독립전취의 전열에로! 그리하여 금년에는 기어코 통일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나아가서 자주 독립 국가를 완성하자! (<민세 안재홍 선집 2> 244-246쪽)

 

(4)에서 작년(1947년)을 “가혹한 시련”과 “비참한 수난”의 해로 규정했습니다. 그 원인으로 (5)에서 불리한 국제정세를, 그리고 (6)에서 민족사기의 침체를 들었습니다. (7)에서는 ‘애국애족’의 구호마저 악용되는 악풍과 폐습의 만연을 개탄했습니다. 작년과 같은 상황이 금년에도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의가 느껴집니다.

 

이 비관적 회고를 1년 전 같은 자리에 올린 글에서 1947년을 불안한 마음으로 맞이하던 대목과 비교해 봅니다.

 

가장 강맹하고도 각승적(角勝的)인 미소 양국이 전면적으로 자웅을 결하려는 최대한 역량으로써 겯고 트는 봉망(鋒鋩)을 38선에 마주대어, 그 막강한 영향력과 함께 영맹(獰猛)한 대립을 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장구한 역사상에 드물게 만나는 새 광명을 보는 채, 실은 또 절대(絶大)한 민족적 위기에 맞닥뜨렸다. 억세고도 웅성궂은 의기로써 이 위기를 타개하고 창의적 신건설에 돌진할 것인가. 망상거리고 잣드됨으로 다만 파멸과 윤락과 새로운 예속에서 웅대한 비극 속에 자지러질 것인가. 신(新) 1년은 결코 우리에게 어리무던한 무위(無爲)를 다시 허여하지 않을 줄을, 바짝 정신차려야 한다. 동포여. 지쳤는가, 잊었는가. 야속하고도 몸서리나는 36년의 쓰라린 경험을. (<민세 안재홍 선집 2> 164-165쪽)

 

1947년이 어떤 해가 될 것인지 불안하게 내다보신 길 중에 나쁜 쪽으로 판명이 된 셈입니다. 이렇게 나쁜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파악해야 1948년에는 나쁜 길을 벗어나 좋은 길을 열어갈 수 있겠지요. 외부적 문제, 즉 불리한 국제정세와 내부적 문제, 즉 민족사기의 침체 중 어느 쪽을 더 큰 문제로 보십니까?

 

안재홍: 국제정세는 우리 노력으로 바꿀 여지가 적은 문제입니다. 꾸준한 노력으로 국제정세가 평화로운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는 해야겠지만, 우선 당장은 주어진 국제정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소 대립은 1년 전에 이미 분명해져 있었고 지금까지 계속 고착되어 온 문제입니다.

 

미-소 대립의 배경 위에서 미소공위의 성공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큰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한편 극좌와 극우는 민족의 단결보다 분열에 더 힘을 써서 미소공위 성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민족국가 건설보다 공산혁명을 더 중시하는 극좌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민족진영만이라도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아쉬운 일입니다. 민족 자존심을 내세운 반탁운동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운동이 되었습니까? 불리한 국제정세를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진영을 자칭하면서 자기 욕심을 위해 ‘애국애족’을 팔아먹는 풍조까지 일어났으니, 이제는 외부 문제보다 내부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기협: 한민당은 원래 ‘지주당’이란 별명처럼 식민지시대 특권층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인 집단이니 그 속성이 환히 드러나 있거니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왔다는 이승만 씨의 행보에 놀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생님도 이 씨의 귀국 때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애를 많이 썼죠. 지금 이 씨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안재홍: 이 박사가 미국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김호 씨, 김용중 씨 등 미국에서 활동하던 분들의 이야기를 그 사이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미국에서의 30여 년 활동을 과연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운 생각도 드는군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노력, 높은 자리 차지하려는 책략 같은 것이 우리가 ‘친일파’라 부르는 사람들과 아무 차이 없더군요. 그 사람들은 국내에 있었고 그분은 미국에 있었다는 차이 외에는.

 

서재필 박사를 군정청 고문으로 모시고 있는데, 여느 미국인과 아무 차이가 없는 분이죠. 조선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이 박사가 서 박사보다도 더 미국인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 박사는 자기 혼자 미국인으로 살려는 것뿐인데, 이 박사는 다른 사람들까지 미국식으로 끌어들이려 드는 거예요. 재작년 초 민주의원 만들 때 내게 참여를 권하면서 그게 출세영달의 길이라고 내세우시는 것을 보고 하도 실망해서 그분을 잘 찾아뵙지도 않게 됐고, 어디 가서 그분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김기협: 이승만 씨보다 김구 선생 받드는 데 선생님은 공을 더 들였죠. 국민당을 한독당에 통합시키기까지 하고요. 그런데 그 합당 무렵부터 소원해졌고, 결국 한독당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김구 선생께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반탁운동으로 사람들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다가 근래에는 이승만 씨의 남조선 총선거 노선을 지지했다가 말았다가 갈팡질팡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민족 지도자로서 그분 역할을 어떻게 내다보십니까?

 

안재홍: 그분 귀국 며칠 후에 경교장으로 찾아가 국내정세를 보고 드리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무 말씀 없이 들으며 고개만 이따금 끄덕이셨죠. 그것이 참 미덥게 느껴졌습니다. 반탁운동 시작 후에도 나서서 말씀하시는 일을 아꼈습니다. 그래서 민족 지도자로서 그분의 신뢰감이 이 박사보다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적으신 것이 과묵한 성품 때문만이 아니라 생각이 적으신 까닭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내오는 동안 차츰 들게 되었습니다. 제2차 미소공위를 앞두고 반탁운동을 재개한 것은 아무래도 생각이 모자라신 일이었어요. 미소공위가 실패하면 중경임시정부 중심으로 건국이 될 것이라고 그분은 진짜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미소공위를 통해 소련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하면 38선 없애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 될지 그분은 생각 못하신 것 같아요.

 

특히 지난 달 동안 국민의회와 민대 통합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이 박사 노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반복하면서 위신을 크게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분 문제는 모자라는 문제이지 지나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분의 지도력에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나쁜 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바른 생각을 못해서 생긴 문제라면 언제든 생각을 바로잡을 때 옳은 길을 지켜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김기협: 여운형 씨에 대해 “나무라고 싶다가도 탐탁스러이 생각되고, 미운 듯하다가도 그리운 인물”이라고 회고하신 일이 있죠. (<민세 안재홍 선집 2> 198쪽) 뜻이 엇갈리는 점도 많지만 크게는 생각이 통하던, 그런 상대로 여기신 것 같습니다. 그분의 서거는 1947년 조선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면서, 또한 이 상황을 풀어나갈 중요 인물의 상실이기도 합니다. 그 일에 대한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안재홍: 나랑 인연이 참 깊은 분인데, 생각하는 방식도 행동하는 방식도 나랑은 영판 다른 분이었죠. 그런데 서로 다른 것 같다가도 크고 중요한 일에서는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기본적인 가치관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거죠.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데 그냥 동년배로 어울릴 것을 그분은 청했고, 내가 그대로 따른 것은 사실 그분을 좀 우습게 보는 마음이 있어서였어요. 일 처리하는 걸 보면 어설픈 것이 많고, 겁도 많고, 약속도 곧잘 어기는 사람이죠.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 대범할 수가 없는 거예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 하늘의 그물이 넓고 커서 성긴 것 같은데도 새는 것이 없다.)”란 말을 생각게 하는 사람입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이래 그분의 행보를 석연치 않게 본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고 나면 무릎을 치게 된단 말이에요. 그분이 가지 않았다면 역할이 클 뿐 아니라 나도 배울 것이 많았을 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기협: 이승만 씨는 민족통일국가를 포기했고, 김구 선생의 위신도 많이 떨어졌고, 여운형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널리 알려진 지도자로 역할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 김규식 박사와 선생님 정도인 것 같습니다. 김규식 박사 역할에는 어떤 기대를 하시는지요?

 

안재홍: 널리 알려졌든 좁게 알려졌든 나는 ‘지도자’ 이름이 안 맞아요. 나는 내 역할을 잘하기 위해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지, ‘존경’을 얻을 생각을 안 해요. 풍채에서도 성격에서도 나는 앞장서는 위치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김규식 박사는 지도자 역할을 잘 키워온 분입니다. 귀국 후 그분이 어느 일에도 나설 생각을 않고 냉소적인 태도를 많이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좁은 분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합작위원회 출범 이후 온갖 고비를 겪는 동안 그분의 의연한 태도에 탄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1946년 말 조미공동위원회에서 경찰과 군정청 개혁에 대한 강경한 태도에 많이 놀랐죠. 한편 구성이 복잡한 입법의원을 이끌면서 그 유연한 자세는 다른 면에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능소능대(能小能大)’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지도자로서 그분 역할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아니, 그분만이 아니라 조선 상황이 몇 분 지도자의 역량으로 풀어낼 단계를 지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대중의 각성 없이는 민족의 장래를 밝게 내다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기협: 금년 신년사의 뒷부분에서 새해를 어떻게든 밝은 눈으로 내다보고 싶어 하는 안간힘이 느껴집니다. (8)에서 “역사의 차륜”과 “민족의 피”를 내세워 낙관을 내놓으려 하지만 (9)에서는 “남조선의 단독조치”와 “그 후에 오는 문제”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합니다. (10)과 (11)에서 불리한 정세를 무릅쓰고 “3천만 각자가 빠짐없이 전진”할 결의를 강조하지만, 지난 1년보다 오는 1년이 더 좋아질 근거를 내놓지 못합니다. 선생님 스스로 낙관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안재홍: 어떻게 낙관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해방 후 새해를 맞을 때마다 1년 전보다 마음이 어두워져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습니다. 1년 전에 걸었던 희망이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번번이 확인하면서 마음이 쓰라립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그저 분단건국만 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인데, 그마저도 자신 있는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Posted by 문천